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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맘 Aug 15. 2020

나의 엄마와 다른 육아법 - 上

엄마의 육아법

나와 동생은 내복을 입고 자랐다. 우리 엄마는 ‘춥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여섯 살 무렵 같은 아파트에 살던 고모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동생에게 한겨울에도 치마를 입히곤 했다. 엄마는 이 엄동설한에 애를 저렇게 입혀 데리고 다닌다며 흉을 봤다.


그래서인지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지금 남태평양 호주에 살게 되었고, 고모와 그 사촌동생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데 여전히 두 모녀는 한겨울에도 치마를 입고 다닐 것 같다. 신의 한 수, 어쩌면 우리 엄마가 하늘에서 나와 고모네가 살 곳을 정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만약 우리 엄마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나와 엄마 우리 모녀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는 내가 초경을 시작하기도 전인 13살에 돌아가셨다.





엄마와 나는 궁합이 정말 좋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렸을 때 내가 엄마들의 워너비(wannabe) 아이였다. 밖에 나가 아이들이랑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집에서 엄마 옆에 앉아 엄마랑 이야기 나누는 게 더 좋았다. 혼자 집에서 그림 그리고 피아노 치고, 종이인형 잘라 옷 입히고 블록으로 집 만들고, 다섯 살에 한글을 깨쳐서 혼자 책까지 술술 읽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수업 시간, 엄마들이 뒤에 서서 참관을 하고 있고, 첫 교과서인 ‘우리들은 1학년’ 첫 페이지 그림을 누가 한번 설명해보지 않겠느냐는 선생님 말씀과 동시에 나는 제일 먼저 번쩍 손을 들어 첫 발표를 하였다. 이후로 우리 엄마는 1등 아이 엄마, 반장 아이 엄마가 되었고, 엄마도 질세라 학교 어머니회에 가입하여 수시로 학교를 드나들었다.


사실 우리 엄마는 학창 시절에 그리 썩 공부를 잘한 편은 아니었다. 막내 이모 정보통에 의하자면 엄마가 고등학생 시절에는 교복 치마를 풀칠까지 해서 빳빳하게 다려 입고 다니던 좀 노는(!) 언니였다고 한다.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1등 아이를 낳아 1등 엄마가 돼버린 통에, 엄마는 왕년에 좀 날리던 치맛자락을 신바람 나게 휘날리며, 나보다 더 열심히 내 학교를 다녔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와 엄마가 해준 간식을 먹으며, 미주알고주알 학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고(?)들을 엄마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또 곧장 집으로 돌아와, 혼자 숙제를 하고 내일 학교에 가져갈 책가방을 싸놓고 저녁을 먹었다. 학교를 파하고 운동장 철봉 위에 매달려 뱅글뱅글 돌던 아이들을 보며, 저렇게 맨날 놀 궁리만 하고 공부도 못하는 아이들은 커서 뭐가 될까 생각하던 애늙은이가 나였다.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골목길에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는 철봉 매달리기도 고무줄도 못했기 때문에,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기 전까지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다니시며 동네에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 보이면 같이 놀라고 나를 소개해줄 정도였다. 그러니 늘 집에서 엄마랑 노는 것이 제일 좋았고, 아이들은 유치하고 시시하다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학교는 참 마땅하고 좋은 곳이었다. 아이들, 아니 아이들 엄마가 그 집 아이를 나와 같이 어울리게 하고 싶어 했다. “우리 엄마가 너 공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래.” 고백하며 내게 다가오는 친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그 시절(!)의 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친구 언니들과 버스를 타고, 대구 시내에서 제일 큰 문구점을 가보려고 했었을 때, 엄마 앞에서 한 시간을 울었던가 두 시간을 울었던가? (요즘에야 세상이 워낙 험악(?)해서, 초등학생 아이들끼리 버스를 타고 어디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지 몰라도, 90년대 내가 자란 시절에는 사실 그렇지 않았다) 가까스로 엄마 허락을 받고 버스 정류장에 달려갔을 때,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다 온 아이는 나 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어버이날 선물을 사러 친구와 동네 시장을 가려고 했는데, 행선지를 말하지 않는 내가 의심스러웠던지 엄마는 또 가지 못하게 했다. 엄마랑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어버이날 선물 사러 간다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엄마는 피식 웃으며 나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내가 이 두 번의 사건을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내가 엄마 없이 친구랑 어디 좀 멀리 가겠다고 말한 적이 딱 이 두 번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첫 물상 시간, 선생님은 혹시 오늘 배울 부분 예습을 해온 학생이 있는지 물어보셨고 나 혼자 높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의 몇 가지 질문에 나는 완벽하게 맞는 답을 했고, 그 후로 일 년간 그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나만 쳐다보고 수업을 하셨다. 그리고 계속 1등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빠른 아이들은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더 이상 엄마를 핑계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이들은 이제 엄마보다 TV에 나오는 오빠야들을 더 사랑하고 있었다.


“저런 연예인들 다 방송사 기획사 꼭두각시야. 저렇게 젊을 때 춤이나 추다가 늙어서 뭐 먹고살겠어?” 나의 애 늙은 입방정에 아이들은 무용 시간만 되면, 몸치인 내 춤 동작을 따라 하며 뒤에서 킥킥킥 비웃음으로 복수를 했다. 어느 시험 날에는 갑자기 한 아이가 공부 잘하는 애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면 시험 잘 본다는 헛소문을 퍼트렸고, 아이들은 시험 보기 5분 전에 갑자기 나에게 떼거지로 몰려와서 내 머리카락을 마구 뽑아가기도 하였다. 월요일마다 조회 시간에 상장 꾸러미를 한 다발씩 받는 나를 보며, “너네 집은 명절에 전 부칠 때 신문지나 달력 말고 니 상장 종이 깔고 해도 되겠다.”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엄마가 필요했다. 아이들이 나를 놀린다고 괴롭힌다고 왕따 시킨다고, 엄마한테 가서 미주알고주알 이르고 싶었지만 그때 나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매운 거 잘 먹지 못한다고 항상 김치를 자기 입으로 한번 씻어서 내게 먹이고, 다 커서까지 “엄마 물 줘” 한 마디면 금방 물을 가지고 내 방으로 달려오고, 무거운 가방 들고 다니면 키가 크지 못할까 봐 피아노 교본을 항상 두 권씩 사주던 엄마가 이제 나에게는 없었다.



더 이상 나는 겨울에 내복을 입지 않았고,
내 교복 치마는 늘 꾸깃꾸깃 주름이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공부를 조금씩 놓았다. 그래도 하던 가락이 있어 반에서 1등 정도는 했고 특목고에도 진학을 했다. 그리고 제대로 찾아온 열일곱 살 늦은 사춘기에 나는 제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나는 엄마 없는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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