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육아법
우리가 살고 있는 남반구인 호주는 현재 겨울이다. 멜버른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지만, 여름에 비해 일조량이 턱없이 낮고 비바람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 몸과 마음을 으슬으슬 아프고 스멀스멀 쳐지게 만든다.
나는 매일 아침 아이와 산책을 나간다. 집에서 나온 지 10분만 지나면 내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흐르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는 별로 그렇지가 않다. 나는 항상 아이 옷을 내 옷보다 얇게, 한 겹 적게 입혀서 밖에 나간다.
그리고 여기도 지금 코로나로 마스크 의무제가 되었지만, 만 12세 이하 어린아이들은 예외이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아이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우리는 산책을 나간다. 이제 우리는 둘 다 콧물을 흘리지 않는다.
호주 사람들은 내가 패딩 잠바를 입고 다니는 한겨울에도 바깥에서 반팔 반바지를 입고 뛰어다닌다. 한국 같았으면 미친 x 소리를 들었겠지만, 여기는 그런 미친 x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 가지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텐트를 가지고 바닷가에 캠핑을 하러 갔었다. 막 동이 트는 아침, 나와 친구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며 찻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저 멀리 바닷가에 래시가드 수영복을 쫙 빼입은 백발의 노인이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다. 나에게는 그날의 바닷가 일출보다 훨씬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올해 첫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동네 한국 엄마가 어느 날 불평을 했다. 학교에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애들에게 야외 활동을 시키니, 아이가 감기가 떨어지는 날이 없어서 맨날 병원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문득 누런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리고 나오는 호주 엄마들이 떠올랐다. 내가 패딩 잠바를 입고 밖에 나간 날, 아이들에게 반팔과 반바지 한벌씩 입힌 채로 밖에 나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호주 아빠들 모습도 떠올랐다. 여기에서 나고 자란 한국 아이들 중에 알파벳을 떼지 않고 학교에 가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호주 학교에 들어가려면 알파벳보다
감기 정도는 떼고 갔어야 했다!
나는 이제 애 늙은 소리나 하다가 왕따 되는 어른이는 아니므로 (더군다나 애도 어린 주제에) 감히 선배 엄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아이는 더 강하고 건강하게 키워야겠다고 내 스스로 다짐했다.
비록 내복 입고 자란 나는 콧물을 흘릴지언정,
내 자식은 한겨울의 바다에도
멋있고 용감하게 뛰어들 수 있기를!
그래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 추운 겨울 아침에도 나는 두 돌짜리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17개월에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가 27개월 현재 제 발로 하루에 3km 정도를 걸어 다닌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호주 조기교육이자 멜버른 모(母) 삼천(3,000m) 지교이다.
아직 말문도 트이지 않은 아이가 요새 부쩍 취향이 생겼다. 양말을 신기는데 자꾸 별 모양이 그려진 양말을 신으시겠단다. 말을 못 하니 손으로 반짝반짝 작은 별 손동작을 해 보이며 그 양말을 가지고 오란다. 그리고 제 손으로 신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양말 앞뒤를 거꾸로 해서 오른쪽만 신으신다. 집이 온통 타일 바닥이라 겨울에는 발이 차서 나와 남편은 실내화를 신고 다닌다. 그런데 아이에게 아무리 양말을 신겨놓아도 자꾸 제 손으로 벗어버리고, 어디서 또 다른 양말을 찾아와서는 오른쪽만 거꾸로 신고 계신다.
그래, 네 멋대로 해라!
한때 좋아했던 드라마 제목을 쿨하게 외치며 애가 양말을 신건 말건 내버려 두었다. 비록 나는 수면양말에 털실내화를 신고 다닐지언정, 너는 뜨거운 맨발의 청춘이기를!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이가 제 손으로 양말 두 짝을 똑바로 다 신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신바람 난 아이는 이제 신발까지 제가 신고 벗겠다며 도전에 박차를 가한다. 나는 문득 내 손에 흙이 묻을까 봐 학교 갈 때까지 내 신을 신기고 벗겨준 내 엄마가 생각났다. 90년대 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재능 교육은 TV 광고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만약 우리 엄마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나와 엄마 우리 모녀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는 내가 초경을 시작하기도 전 13살에 돌아가셨다. 나는 엄마의 임종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날은 하필 어버이날이었고 엄마는 내가 만든 카네이션 꽃을 머리맡에 둔 채, 허공에 대고 내 이름을 계속 부르며 마지막 눈을 감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아이들이 나를 놀리고 내 머리카락을 뽑아가고 나를 왕따 시켰을 때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 특목고에 입학해서 내가 더 이상 1등이 아니라는 인생 최대 좌절감에 빠졌을 때, 그리고 그전까지 집 밖에 나가 한 번도 큰일을 본 적이 없던 내가 기숙사 생활에 적응을 못해 장결핵까지 걸렸을 때,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대학교 1학년 때 한창 쓰나미가 터진 인도로 배낭여행을 가려고 했었을 때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 모든 과정에 엄마가 있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조금은 다른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엄마와 짝짝 궁합이 잘 맞는 딸로 컸다면 다행이겠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혼자 상상을 해본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이 모습이고, 엄마 없는 어른으로 자라 이제 나도 엄마가 되었다.
예전에 아이가 “엄마~ 엄마~” 하고 울 때, 나도 모르게 ‘참, 엄마 없는 놈은 서러워 살겠나.’ 하곤 혼잣말을 한 적이 있다. 결코 엄마 없는 서러움을 내 아이에게는 일찍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결심하면서.
하지만 내 엄마인들 그걸 미리 알았을까? 누구보다 열심히 ‘엄마로’ 살아왔던 내 엄마는, 마지막 가는 길에도 내 이름을 불렀던 우리 엄마는, 내가 엄마 없는 서러움을 겪으며 살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 나는 엄마와 다른 육아법을 선택한다. 엄마가 있어도, 또 엄마가 없어도 강하게 클 수 있도록. 화초가 아닌 잡초처럼, 그 뿌리를 튼튼하게, 두 다리는 튼튼하게, 매일 아침 아이와 함께 걷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