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를 낳은 엄마의 걱정 대잔치
서효인 시인의 ‘잘 왔어 우리 딸’ 책을 접한 건 2015년 말, 당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이에 대한 생각은 옅은 때였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않았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딸을 둔 아버지가 쓴 책인데, 제목만 들어도 마음이 짠했고, 트위터를 통해 짤막짤막 책을 접할 때마다 코끝이 찡했다. 이 책을 읽겠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펑펑 울겠다는 뜻인데, 책을 통해서도 내 인생을 통해서도 그 슬픔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나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기쁨의 감정부터 내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놀라움과 찝찝함의 애매한 경계, 그 원인에는 임신인 줄 모르고 마셨던 와인 13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신 7주 차에 초음파로 젤리 곰을 확인하고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그제야 저 멀리서 새하얀 기쁨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한 편의 내 이성은 ‘아직 잠깐, 조금만 더 기다려봐.’ 하며 내 기쁨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나는 임신 10주 1일에 피를 뽑으러 병원에 갔다.
NIFTY는 산모의 혈액을 채취하여 태아의 염색체에 돌연변이가 있는지를 알아내는 기형아 검사이다. 비용이 조금 비싼 편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99% 정확하며 검사도 안전하다. 다운증후군 판별을 위한 목 투명대 검사를 보통 임신 12주에 하게 되는데, NIFTY 검사는 임신 10주부터 할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는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일찍 검사를 할 경우 산모의 혈액 속 태아의 DNA 정보가 충분치 않아서 다시 검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임신 10주 1일 월요일 아침 8시에 NIFTY 검사를 하기 위해 아직 문도 열지 않은 병원에 도착해있었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태아가 기형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그 젤리 곰의 손을 놓아야만 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으로 나왔고, 염색체 검사라서 성별도 알 수 있었던 덕분에 태명 없이 바로 아이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제야 나는 마음을 놓고 맘껏 임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갓 지은 아이 이름을 부르며 예비 엄마의 행복한 태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임신 38주 4일에 출산 전 마지막 검진을 받으러 산부인과에 갔다. 호주에서는 모든 장기들이 다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는 19주 정밀 초음파 후로는, 특별히 문제가 있는 산모가 아닌 이상 출산 전까지 초음파를 하지 않는다. 나는 만삭 치고 너무하다 싶을 만큼 배가 부르지 않았고, 마지막 검진 날 그것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싶었다. 내 배 둘레를 재본 간호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른 간호사를 불러오더니 다음번에는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일단 안심시키고 초음파를 해보자고 했다. 초음파 기계 마우스로 태낭 지름을 드래그하던 의사는 계속 침묵을 지켰지만, 몇 번을 반복해봐도 모니터에는 ‘33w’ 내 아기집 크기가 33주 짜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38주 4일 출산 전의 마지막 검진일에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유도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 2.4킬로로 태어난 아이는 다행히 인큐베이터는 면했지만, 작은 몸무게 때문에 6일이나 우리는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 후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도 보름 동안 간호사가 우리 집을 네댓 번 방문해 아이의 몸무게를 체크했다. 신생아는 매일 하루 최소 20g 몸무게가 증가해야 하는데, 아이는 젖을 잘 빨지 못했고 몸무게가 잘 늘지를 않았다. 간호사는 아이가 계속 이럴 경우 감염의 위험이 있고, 다시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며 위협(?)을 하기도 하였다. 생후 3주 정도부터 아이는 제대로 젖을 빨기 시작했지만, 항상 몸무게는 같은 또래 성장 곡선에서 하위 3% 정도였다.
지금도 아이의 몸무게는 여전히 하위 3%이다. 퍼센트로 매겨지는 상대 평가 점수에서 내 아이가 왜 밑에서 3등인가 하는 엄마 마음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상위 3%가 있으니까 하위 3%도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이의 성장과 수면, 식사 문제(?)를 고쳐보려고(!), 스무 군데도 넘는 병원과 열명도 넘는 소아과 전문의 및 각종 전문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 모든 노력에도 두 돌이 지난 남자아이의 몸무게는 10kg 남짓 여전히 하위 3%이다.
다른 아이들은 백일상 사진 찍을 때 범보 의자에 앉아있던데, 목을 전혀 가누지 못하던 우리 아이는 대자로 눕혀놓고 백일 사진을 찍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돌 무렵이면 슬슬 걸음마를 시작하던데, 뒤집기 배밀이 앉기 기기 모두 또래보다 늦던 우리 아이는 17개월에 첫걸음을 뗐다. 다른 아이들은 이제 곧잘 하고 싶은 말도 다 하고 노래까지 부르던데, 28개월 현재 우리 아이는 엄마 아빠 포함해서 5개 단어밖에 아직 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자. 처음부터 조금 작은 아이였으니까, 조금 늦게 따라가는 것이니까, 천천히 우리의 속도로 최선을 다하자. 아직 백일의 기적도 오지 않은 아이는 밤에도 3시간에 한 번은 깨고, 아이가 하루 종일 먹는 식사량은 어른 숟가락으로 3스푼이 될까 말까, 그런데 도대체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지 요새 매일 밖에 나가 3km를 걷는 아이. 덕분에 낮이나 밤이나 너무 힘든 엄마는 아이의 발달을 더는 걱정할 힘도 없어서, 그냥 아이를 믿고 따라가기로 포기 아닌 내려놓기를 선택한다.
얼마 전에도 동네에 사는 또래 엄마가 아이의 언어 치료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괜찮아. 나는 아이랑 매일 충분히 이야기 나누고 같이 노래도 불러.”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고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늦게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요새 하루 3km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그런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체력이 달려 헉헉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며, 늦게 터진 말문에 또 얼마나 말도 많을지 되려 걱정이 된다. 아이에 대한 믿음이 엄마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올해 초 아이를 쇼핑카트에 태우고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보던 때였다. 아이는 “어, 어, 어”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이는 물건은 죄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팔을 뻗어 그것들을 잡아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쇼핑은 돈을 준다고 해도 사양하고 싶을 만큼 피곤한 일인 법. 대충 필요한 물건들만 빨리 사서 집에 가려고 카트를 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듣기 힘들 정도의 큰 목소리로 누군가 괴음을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나는 한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였고, 엄마는 아이에게 물건을 골라 쇼핑카트에 담는 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혼자 속으로 ‘리스펙!’ 감탄사를 외쳤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마트에서 이 소란을 피워가며 (어쩌면 민폐를 끼쳐가며) 엄마는 아이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천천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마트 내 다른 사람들도 큰 소리에 놀라 한 번씩 쳐다보긴 했지만,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자신들의 쇼핑에 집중했다. 나만 조금 오래 그 자리에 멍하게 서있었다.
그냥 엄마가 해주고 말지. 저렇게 가르친다고
저 애가 뭐 더 발전하겠어?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머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문득 4년 전 서울 어느 지역에서 특수학교 건립 계획이 동네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발달장애아 엄마들이 눈물의 호소를 하며 삭발 시위를 했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우리는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길 기도합니다.
내가 작고 더딘 내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지금 이 시간을, 발달장애 아이를 가진 엄마들의 한평생 고단한 세월에 감히 비교해볼 수 있을까?
안 자고 안 먹는 아이를 두 돌 넘게 키우느라 마음도 몸도 10킬로나 축이 난 내가, 요즘 매일 밖에 나가서 10킬로인 아이를 들쳐업고 집에 올 때마다 ‘이건 나의 십자가요’ 조용한 비명을 지르곤 하는데, 아직도 와인 13병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죗값을 받는 중이라고 혼자 속으로 아이에게 사죄(?)하곤 하는데,
자신보다 몸집이 더 커져버린 아이를 안고 씻기고 먹이고 해야 하는 엄마들은, 얼마나 많이 당신들의 무죄를 뉘우치고 또 뉘우쳐야 했을까? 평생 얼마나 신을 원망하면서 살아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 불리는 것들을, 기적이라 불리는 것들을 믿고 또 믿고, 천천히 아이의 속도로 더 낮게 아이의 눈높이로, 오늘도 아이와 함께 힘차게 걸어가겠지 세상을 바라보겠지, 감히 그런 짐작도 해본다.
그들의 더 큰 사랑을 더 크게 응원하면서, ‘잘 왔어 우리 아들’ 글의 제목 또한 감히 붙여본다. 내 작은 아이와 함께 하는 느린 나의 인생도 응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