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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맘 Sep 20. 2020

제2외국인 남편과 제3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카펫과 포경 수술

남편은 이란 사람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아이를 낳고 나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는 각자 30년을 이란과 한국에서 나고 자랐고, 둘 다 서른이 되었을 무렵 호주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여기서 처음(?) 결혼을 했고, 처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중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기 전까지 3년 넘게 수도 없이 남편의 이란식 케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어째서 남편이 이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잘 먹고 잘 자고 내 입맛이 정상으로 작동하던 시절에는 그 케밥이 내 혀 위에서 살살 녹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둘 다 입맛이 글로벌한(!) 편이다. 한국에서 크게 양고기를 접할 일이 없던 나는 이란식 양고기 요리를 곧잘 먹는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이란에서는 술과 돼지고기가 아예 불법인데, 호주에 와서 처음 돼지고기를 맛본 남편이 현재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는 삼겹살과 소주이다. 국제 커플에게 언어 장벽보다 높은 것이 음식 장벽, 서로 다른 식성과 입맛의 차이일 것이다. 말은 좀 통하지 않아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지만, (그리고 원래 부부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거 맞죠?)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실로 같이 살기에 큰 애로사항이다.

식구(食口)라는 단어 뜻이 한 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밖에서는 호주식 스테이크
집에서는 이란식 케밥과 한국식 삼겹살 (각기 불판도 있다!)







출산 전 외할머니께서 최고급 완도산 산모 미역을 보내주셨다. 내 평생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것 같은 미역 양에 나는 기겁했지만, 손녀딸이 타지에서 혼자 애를 낳는 것이 마냥 안쓰러웠을 할머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근데 아이를 낳고 집에 와서 내 손으로 미역국을 끓여먹는 나를 보는 남편의 표정에서 나는 또 한 번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그런 바다 풀때기로 끓인 국만 먹고,
몸이 어떻게 회복되겠어?


라고 말하며 남편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온갖 고기들을 듬뿍 썰어 넣고 토마토 페이스트로 간을 한 이란식 수프를 만들어 내왔다. (남편은 나보다 요리를 훨씬 잘한다) 그때 나는 한창 젖이 돌고 젖 양도 많은 편이라 유선염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남편의 고깃국이 마음은 고맙지만 어쩐지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젖먹이 때문에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무얼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내 몸은 신기하리만치 (입덧할 때도 몰랐던) 한국 음식만 원하는 상태가 되었다. 냄비마다 한가득 차있는 남편의 이란 요리들이 그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달갑게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출산 후 남편이 해준 몸보신(!) 이란 요리들


아이가 태어나고 정확히 일 년 후, 나는 임신 전보다 10킬로가 빠졌고 남편은 10킬로가 쪘다. 보통은 출산 후에 와이프는 임신으로 불어난 몸이 도무지 줄어들지를 않고, 남편은 가정과 회사의 이중고에 식사도 부실해져서 살이 빠진다고들 하던데 우리는 정반대였다. 나는 일 년간 모유수유로 아이에게 젖뿐만 아니라 기(氣)를 쪽쪽 빨려가며,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 하루하루 시들시들 해져갔다. 반대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고 매일 설탕 범벅인 주전부리로 허기를 달래던 남편의 복부는 나날이 부풀어 올랐다. 둘 다 건강의 적신호가 왔고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각자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했다.


우리 식구는 같은 식탁에 앉아 각기 다른 음식을 먹었다. 나는 김 반찬 하나에 밥을 찬물에 말아 후루룩 마시고, 남편은 이란 슈퍼에서 사 온 통조림 요리를 데워서 먹고, 아이는 이유식을 손으로 치덕치덕 먹는 시늉만 하였다.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할 무렵 남편은 집 전체에 카펫을 깔자는 제안을 하였다. 우리 집은 방바닥은 다 카펫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타일이 깔려있다. 그나마 거실에는 큰 아기매트가 깔려있어서 괜찮았는데, 호주 집 구조상 현관에서 방을 지나 거실까지 이어지는 긴 복도가 문제였다. 열심히 기어 다니는 아이의 무릎에 자꾸만 멍이 들었다. 그렇지만 카펫이라니... 먼지도 엄청 쌓이고 물걸레 청소도 못하고 뭐 흘리면 얼룩 지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빨리 아이가 걷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남편은 대여섯 번 말을 꺼내보다 나의 강경한 태도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같이 아이 목욕을 시킬 때마다 아이 무릎에 멍을 만지며, 내가 일부러 애를 다치게 하는 양 나를 나쁜 엄마 취급하였다.


그 이름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 일반 가정집이든 왕이 살던 궁전이든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이슬람식 사원이든, 바닥에는 모름지기 카펫을 깔아야 하는 나라에서 남편은 나고 자랐다. 당연히 아기 때부터 카펫 위에서 기어 다녔을 것이고, 거실 카펫 위에 소프레(이란에서 식사할 때 바닥에 까는 보자기)를 깔아놓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었을 것이다. 모스크에서는 오랜 세월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 밟았을지도 모르는 카펫 바닥에다 이마를 대고 기도를 했을 것이다. (이란에서는 모스크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친(親) 카펫 환경에서 자란 이란인 남편에게 한국인 아내의 카펫 불청결설(說)은 말이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결코 말이 되.지.않.는 소리였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나는 결국 복도에 카펫을 깔았다. 남편은 아이 무릎에 멍을 다 들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카펫이 무슨 소용이냐고, 진작에 자기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나를 비난했다. (그리고 살짝 승리의 미소도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남편의 친카펫설 꼬임에 넘어간 게 아니었다. 그 얼마 전 동네 한국 엄마들과 모여 점심을 같이 한 자리에서, 한 아이가 집에서 뛰다가 슬라이딩을 하며 뒤로 꽈당 넘어졌다. 그 아이 엄마는 지난번에도 아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얼마간 숨도 쉬지 않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며 거실 전체에 아기 매트를 깔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반년 동안 남편 말을 무시하던 나는 바로 카펫을 깔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타일 위에서 기기 연습을 하고,
카펫 위에서 걸음마를 시작했다!







국교가 이슬람교인 이란에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보통 그 자리에서 바로 할례를 한다. 그래서 이란인 남편은 성기 끝이 살로 덮인(!) 자연 그대로의 남자 고추를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한국인들도 위생 청결 목적으로 보통 남자아이들이 초등학교 무렵에 포경 수술을 하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태어난 그대로 두기 때문에 성형(!) 전 고추를 흔히(?) 볼 수 있었던 나와는 달랐다. 남편은 같이 아이 목욕을 시킬 때마다 멀쩡한 아이 고추를 보며 못마땅해하였다. 소시지처럼 끝이 길쭉한 모양이 못생겼다면서 틈만 나면 포피를 뒤로 젖혀 귀두 검사를 했다. 물론 나도 남자아이는 그 부분을 잘 씻기고 건조시켜 주어야 한다고 출산 전 미리 공부도 했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보기에는 살짝 병적이다 싶을 만큼 아이의 고추에 민감하였다.


하루는 남편이 아무래도 아이의 고추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며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동네 병원들을 검색해보다가 영국의 제일 명문대라는 옥스퍼드를 나온 의사를 발견하고 예약을 했다. 의사는 아이를 보더니 염증까지는 아니고 살짝 부었다며, 잘 씻기고 건조와 통풍에 신경을 써주라고만 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기어이 항생제 크림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할례 시기를 놓쳤는데 (호주에서도 보통 무슬림들은 신생아 시기에 할례를 한다) 언제 하면 좋을지를 물어보았다, 의사는 아이의 성기 모양이 꼭 수술이 필요한 케이스가 아니고,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면’ 굳이 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종교가 아닌 ‘과학적인, 의학적인’ 포경 수술의 당위성을 의사에게 설파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남편은 혼잣말처럼 외쳤다.

옥스퍼드 나왔다더니 완전 돌팔이네!


아이가 호주에서 계속 자란다면 나는 아이의 포경 수술을 시킬 생각이 없다. 그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 인생에 정말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고, 나는 종교도 과학도 아닌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이에게 보편성을 주고 싶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듯이, 우리가 여기 사는 이상 이 곳의 룰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내 뜻을 남편에게 전했고 남편은 수긍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또 아이 고추를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자꾸 손을 갖다 댔다. 그럴 때마다 한국인 와이프는 이렇게 외쳤다.

제발 손이나 좀 씻고 만지라고!





우리 안에 굳게 자리 잡은 고정관념과 행동 양식이 나고 자란 사회 문화의 오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와 남편의 육아법을 보며 깨닫는다. 아이가 다 클 때까지 나는 저 카펫을 보며 못마땅할 것이고, 아마도 남편은 아이 고추가 그러할 것이다.

제2외국인 남편과 제3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가끔씩은 허들 두 개를 동시에 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우리는 한 팀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과 말이 통할 때까지 싸우며, 더 크게 바라보고 더 넓게 이해하는 글로벌한 부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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