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지개 나라, 이제 우리의 무지개 나라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 미술 학원을 방학 때마다 드문드문 다녔다. 나는 색감이라든가 관찰력 혹은 손재주 같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조금 부족한 아이였다. 예를 들어 나무를 그려야 할 때면 그리기도 전부터 속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저 잎사귀 하나하나를 어떻게 스케치북에 옮겨와야 할 것인지, 그나마 저학년 때는 두리뭉실하게 엄마의 뽀글이 파마머리 모양을 기둥 위에 얹으면 그만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다른 아이들은 잎사귀 모양도 더 세밀하게 그리고, 크래용이 아닌 물감을 사용하면서부터 단순히 초록색이 아닌, 비슷하지만 또 조금 다른 녹색 계열의 색들을 만들어서 칠했다.
나는 점점 학년이 올라가고 미술 학원을 다니면 다닐수록 그림 그리기에 흥미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 학원에서 ‘무지개 나라’라는 주제로 작은 대회를 열었다. 그 미술 학원에서 해마다 하는 행사인지라 미술 학원 곳곳에는 이미 지난 수상작 그림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그 모범 견본들에 따르자면 ‘무지개 나라’는 큰 아치형의 일곱 빛깔 무지개 위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림이었다. 올해도 아이들은 모두 스케치북 하단에 먼저 아치형으로 큰 무지개를 그리고, 그 위에 집을 그릴지 나무를 그릴지 아이들 모습은 어떻게 그릴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무지개 나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데, 어떻게 아이들은 모두 같은 세상을 그리고 있을까?
나는 비록 ‘똑같이’ 혹은 ‘예쁘게’ 그리지는 못했지만,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쫙 펼쳐보았다. 직사각형의 스케치북을 잘라 정사각형으로 만들고, 그 중심에 둥근 원 모양의 무지개를 그렸다. 그리고 그 둥근 무지개 바깥쪽으로 위에도 아래도 좌우로도 집도 나무도 아이들도 그렸다. 나는 그때 미술 학원을 다닌 이래 처음으로 최우수상을 받았고, 좀 이상하게 생긴 내 ‘무지개 나라’ 그림은 다음 해까지 미술 학원 벽에 걸리게 되었다.
서울에서 기획자로 일을 할 때, 회사 홈페이지 리뉴얼을 위한 아이디어 팀 회의가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끝도 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추리고 추려가며 PT를 준비했다. 회의에서 팀원들 PT가 모두 끝나고 팀장님 말씀.
역시 세모(나)씨 아이디어가 제일 좋네. 내가 좀 전에 말한 수정사항 반영해서 다음 회의 때까지는 구체적인 기획안 작성해 오도록 해요.
그런데 회의가 끝나도 내 머릿속은 또 다른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회의 시간, 여전히 브레인스토밍 마인드맵 같은 나의 돼먹지 못한 기획안을 보신 팀장님 말씀.
역시 세모씨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아이디어 이제 그만 짜고, 제대로 된 기획안 작성 해오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그래서 홈페이지는 언제 만들래? 디자인팀한테 기획안은 언제 넘길 거야!
그랬다. 나는 태생적으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공상하기 좋아하던 아이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자기소개서 혹은 사업기획서 쓰기에만 상상력을 잘 발휘했다. 덕분에 여러 작은 회사들을 잘 들어가고(?) 잘 나오며(!), 별의별 난전을 해보다 내 이름으로 사업자까지 내고 망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늘 미약했던,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가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 호주까지 와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에 전업맘이 되어 집이라는 감옥에 갇힌 것이다. 더군다나 장기전에 약한 내가 일단 결혼은 평생을 약속했고, 육아는 아이가 학교를 갈 때까지? 부모 노릇이야말로 평생의 업이 아닐는지... 마치 별주부 자라의 말에 덜컥 속아 바닷속 용궁 구경을 갔다가, “아이고! 나 살려주소!” 육지에 내 간을 두고 왔노라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고 외치고 싶은 토끼가 또 바로 나였다.
살림과 육아의 공통점은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안 하면 티 나는 것이 아닐까. 머리카락은 주워도 주워도 떨어지고 먼지는 닦아도 닦아도 쌓이듯, 아이 밥은 먹여도 먹여도 또 밥 먹일 시간이고 기저귀는 갈아도 갈아도 또 무거워 내려온다. Home sweet home 웃으며 내 발로 들어갔지만, 운다고 내 마음대로 다시 나올 수도 없는 이 행복한 둥지에서, 그 끝이 창대하건 미약하건 삶은 계속될 것이고, 아이는 온 집안에 장난감을 흩뿌리고 다니는데 또 저녁 시간은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의 유일한 생존 무기는 내 타고난 상상력과 창의력에 있었다.
나는 지금 여기 ‘대환장 파티’에 초대된 게스트, 바닥에 이 과자 부스러기들은 파티 폭죽이 터지고 난 후 떨어진 종이꽃가루들, 아이의 온종일 징징징 보채는 울음소리는 대형 스피커에서 뿜어대는 신나는 파티 음악, 아이가 온종일 졸졸졸 따라다니며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조르는 것은 내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나에게 춤을 추자고 하네? 곧 나의 왕자님, 아니고 하인(남편)이 오면 음식을 좀 사 오라고 시키자. 온종일 춤을 췄더니 머리는 산발이요, 배는 고파 죽겠는데 파티장에 음식까지 동이 났네!
아이랑 놀 때도 나의 창의력을 뿜뿜 발휘하여 내가 더 즐거워야 했다. 지난번에 [인스타, 나의 人star, 나의 작은 별] 글에서 썼듯이, 나는 아이를 낳고 백일까지 디데이(D-Day) 달력을 배경으로 세워두고, 매일 온갖 색다른 테마를 구상해서 나만의 백일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산후조리이자 산후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아이가 목을 가누고 앉고 기고 서고 성장이 발달함에 따라서, 와상(臥像)에서 좌상(坐) 입상(立) 구도로 다양한 연출을 해볼 수 있게 되었고, 흔들리는 사진이 많아질수록 아이폰의 LIVE 모드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미술 놀이를 할 때는 종이 한 장을 뒷마당 사과나무에 걸어두고 아이 손에 붓과 물감을 쥐어주었다. 오후의 끝자락 뒷마당에 걸린 오늘의 마지막 햇빛 한 조각 아래, 수채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빛났다.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같은 또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동네 엄마가 저렴한 아동용 이젤을 파는 마트 정보를 내게 댓글로 알려주었다.
앗, 나의 이 찬란하고 창의적인 작품이 그렇게 빈티가 나보였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엄마가 예술적 감각이 전혀 없는 거라고!
다음번에는 보란 듯이 귤나무에 빨래집게로 종이를 고정시키고, 계란판에 물감을 짜서 친환경적인(!) 팔레트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며 내 작품의 포인트를 이해하기 쉽도록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Citrus tree easel & Egg tray palette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엄마는 그 포스트에 댓글도 좋아요도 눌러주지 않았다. 집에서 애만 보고 있는 나 혼자만의 쑈(show) 쑈 쑈였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나는 지금 쓸모없는 나의 창의력을 발산해야만 하였다. 고백하건대 사실 그때 종이 위에 붓질을 한 것은 나요, 아이는 온갖 색을 섞어 만든 똥색으로 담벼락에 온통 똥칠만 해대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에서 5년 동안 접시 닦이를 한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에서 불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생한 주방 상황을 묘사할 수 있었다고 했던가.
나는 한국에 가지 못한지 (않은지) 4년이 되었고, 외국에서 처음 혼자 아이를 낳았다. 26개월째 어린이집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채, 남편 외에 도와줄 가족 친구 하나 없이 주 7일 24시간 육아 중이다. 아직도 통잠을 자지 못자고 밤에 수시로 깨는 아이라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새벽 3시 반부터 6시 현재까지, 아이를 3번이나 토닥여주고 분유까지 태워서 먹여가며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설상가상 우리가 살고 있는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은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 2차 유행으로, 또다시 도시 전체에 락다운이 선포된 지 오늘로 꼭 한 달이 되었다. 하루 한 시간의 동네 산책 이외에는 하루 종일 아이와 집에만 있어야 하는 신세이다.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밖에 나가자고 보챈다. 자, 이만하면 독기든 광기든 나에게도 예술혼이 불타고 있지 않겠는가!
희망의 무지개를 그린다. 그냥 남들 따라 그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번에도 나만의 무지개 나라를 만든다. 햇빛 좋은 날 뒷마당에 호스로 물을 뿌리면 진짜 무지개가 생긴다. 아이는 눈 오는 날 똥강아지마냥 물에 흠뻑 젖어, 엄마표 무지개 위로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아이와 같이 그린 담벼락 무지개 그림 옆에서 방울방울 비눗방울도 불어 본다. 아이는 또 그것을 잡겠다고 엄마표 무지개 위를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닌다.
절망의 무지개도 그린다. 지난주 [개새끼와의 산책, 그 험난한 순례길에서] 글에도 썼듯이, 이제 제법 말귀를 알아듣지만 또 말은 죽어라고 듣지 않는 우리 집 똥강아지를, 내가 그래도 사람새끼라고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화까지 내고 있을 때, 아이와 함께 플레이도우로 일곱 빛깔 금수(禽獸) 무지개를 만들며, ‘이노무 강아지 새끼야, 금수 금수 우리 금수’ 읊조리며 동물 모양 무지개를 찍어낸다. 그리고 가끔은 절규에 가까운 노래도 부른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저 너머 어딘가에 무지개가 있다고. 물론 우리 똥강아지와 함께 부른다.
세 살 아이와 함께 하는 서른일곱 짤 엄마의 창의력은 오늘도 쑥쑥 자라고 있다. 25년 전 나의 무지개 나라는 이제 우리의 무지개 나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만드는 빛과 색들이 아이에게도 스며들기를.
요즘 뉴스에 나오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바다에 불바다에 역병까지 절망으로 가득 차 보인다. 그래도 우리는 저 너머 어딘가에 무지개가 있다고, 오늘도 나는 아이와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