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가을에 읽고 쓰고 둔다

by NIL

“시대를 기록하는 방법”

『이반 데니소비치,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이 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


선량하고 재주 많은 민족이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단순한 행운일까?

아니면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일까?

엄청난 투쟁과 노력끝에 얻는 보상일까?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 독선적이며 무도한 광기의 지도자가 여럿 있다. 악행의 우측 끝에 히틀러의 독일 나치 체제가 있었다면 좌측 끝에는 스탈린의 소비에트 체제가 있었다. 히틀러의 수용소가 인간성 말살의 현장이었다면 스탈린 독재 권력의 잔인성과 무도함을 대번에 보여준 것도 “굴라크”라고 불리는 수용소였다.

이유도 알지 못한 체 수용소로 잡혀 온 죄수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지 기약 없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작가 ‘솔제니친’은 직접 경험했던 수용소 생활을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평범한 러시아인의 하루를 기록하는 방법으로 고발한다. 아침 기상 시간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그의 일과를 꼼꼼히 따라가며 순간마다 변하는 감정을 읽고 기록한다. 언제 더 나쁜 일이 벌어질까 하는 두려움에 조마조마하며 그에게 더 큰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읽는 새에 그의 하루가 지났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 ...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스스로 거의 행복했다고 기술한 단 하루를 보며 다른 날은 어떠했을까 상상한다. 8년의 수용소 경험으로 요령껏 버틴 날이 이 모양인데 다른 날의 그의 형편을 상상하는 것은 슬픔 그 자체다.

끼니를 거르고 몸이 아팠거나 영창에 가는 날도 있었을 것이며, 담배를 얻지 못하거나 어려운 작업장에 배당되어 고통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최악의 날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담담하게, 때론 우스꽝스럽게 펼쳐 놓은 하루의 기록을 읽으며 독자들은 다른 날을 염려한다. 아주 운 좋은 날이었다는 그의 고백에 더 끔찍하고 더 암울했던 수용소의 다른 날들을 상상하며 몸서리치고 감각이 마비되는 경험을 한다.

스스로를 마지막까지 지키는 방법

수용소라는 말 자체에서 이미 추위와 굶주림, 질병, 간수들의 학대와 같은 처절한 환경과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때론 박탈당한 자유를 향한 그들의 갈망과 단합된 의지로 펼쳐지는 처절한 투쟁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이미 권력의 강제와 횡포에 굴복한 모습이다. 투쟁할 힘마저도 사치인 하루를 버티기 위해, 빵 한조각을 얻기 위해 서로 속이고 밀고하며 다른 사람의 불행에 둔해져 있다.

전직 군인과 관료, 부유한 예술가등 동료 죄수들과 비교할 때 평범한 농부 출신인 슈호프의 태도는 제한적이다. 작업 반장에게 순종하며 동료 죄수들의 어려움을 돕고 약간의 댓가를 받는다. 절대 비굴하거나 과도하게 요구하지도 않고 , 남을 속여 이익을 얻을 생각도 없다. 형기가 끝나도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그에게 자유란 의미 없는 말이었다. 돌아갈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희망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상태는 형편없다. 아내는 그가 돌아와 벽걸이 염색 일이라도 해서 부수입을 올리길 기대한다.소비에트 집단 전체가 고난의 시간이었다. 슈호프는 막연히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희망을 갖고 버티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천성과 적응력으로 매일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슈호프는 그래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 -밥 먹을 때 모자 벗기, 동료를 고자질하지 않기- 를 지키려 노력한다. 절대 동료에 피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가 벽돌 쌓기에 진심이고 경건한 식사 시간을 누리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모범적인 하루하루를 쌓으며 버틴다. 흔들리는 순간에도 절대 내려좋지 못하는 자신의 기준을 지키는 슈호프의 양심이 눈물겹다. 슈호프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러시아 민족이 얼마나 고매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인지 증명한다.



고전의 수명과 현재성

1962년, ‘솔제니친’의 고발이 처음 출판되자 서구 진영은 충격에 휩싸였다. 치열한 냉전의 시대, 자국민에 대한 반윤리적, 비인간적 행위로 점철된 공산주의의 모순과 스탈린 체제가 그대로 드러났다.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생활과 소비에트 연방 전체의 경직된 현실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며 수용소에 대한 진지한 고발은 상식이 되었고 다시는 존재해선 안되는 역사의 교훈이 되었다.


배가 따뜻한 놈들이 한데서 떠는 사람의 심정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혹한이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슈호프을 엄습해서

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온은 영하 27도였고,

슈호프는 열이 37.2도였다.

, 이젠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


2024년의 여름, 시원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카페에서 이 작품을 읽었다. 배가 따뜻한 상태였다. 수용소의 처참함보다는 현재의 삶에 대입하여 읽었다. 예전 군대 생활도 기억나고 뺑뺑이 도는 직장 생활과 엮어 보기도 했다. 하루의 일과라는 점에서 ‘운수 좋은 날’도 나왔고 러시아 문학과 노벨상의 인연도 적어 보았다. 작가의 생애와 담담한 문체, 빛나는 위트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그렇지만 영하 27도의 추위와 굶주림을 같이 느낄 순 없었다. 주변을 겉돌뿐 진짜 공감은 아쉬웠다.


그런데 딱 한 계절이 지난 그해 겨울, 권위주의와 수용소의 공포가 느닷없이 다가왔다. 삼청교육대와 형제 복지원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와 체제 안에서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무너졌다. 그것은 정치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였다.

작품에만 존재하던 인간 군상의 모습과 삶에 대한 태도가 다시 현재성을 띠며 재현되었다. 고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공포를 이겨내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자유를 위해 묵묵히 행진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다시는 슈호프와 같이 선량한 이웃이 이유도 모른체 생명과 존엄을 위협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을 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선언은 계속되어야 한다.

정말 멍청하고 독선적인 리더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반복되는 역사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며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전통또한 시들지 않는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을 지내고 다시 생각한다. 선량하고 재주 많은 민족은 좋은 리더를 만나는 행운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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