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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y 18. 2023

비곗덩어리

책 읽는 시간 (가을에서 겨울 지나)

모파상 단편선 비곗덩어리』, 기 드 모파상 지음임 미경 옮김㈜열린 책들 세계문학 274, 2021

    

    프랑스혁명 이후 100년 동안 정치적인 변혁이 계속되었다. 공화정과 제정이 반복되며 정치 세력과 구호가 난무하였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마감하고 다시 제3공화국이 성립하게 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프로이센 군이 점령한 루앙시를 떠나는 마차에 10명의 승객이 있다. 고귀한 혈통의 귀족, 부르주아 사업가, 공화정 혁명 투사, 경건한 수녀들 사이에 어렵게 자리를 잡은 화류계 여인.‘비곗덩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작고 당찬 여인이 있다.  

 

    보나파르트의 열혈지지자인 여인은 패전의 치욕을 안겨 준 프로이센 군과 타협할 수 없어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차에 한 자리를 어렵게 얻어 탑승한 순간. 동승객들의 모습에 주눅 들었다. 정숙한 부인들의 수군거림에 그들에게 봉변을 당할까 불안하다. 그럴수록 더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들을 제압한다.   

   

    다른 승객들이 그들의 부와 배경만 갖고 피난길에 오른 반면, 삶의 역경이 많은 이 여인은 혼자 모든 것을 준비해야 했다. 눈 때문에 늦어지는 마차 안에 먹을 음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결국 모두에게 음식을 나눠줄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그녀의 따뜻한 품성도 있지만, 자신을 경멸하던 부인들의 눈빛에서 음식에 대한 탐욕과 살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중간 기착지에서도 귀부인들보다 더 기품 있고 고고한 태도를 보이고자 노력했다. 


    비열한 점령군 장교의 집요한 요구에 분노했다. 그런데 일행은 협박과 강요, 회유를 통해 그녀의 희생을 요구한다. 여행을 함께하며 음식을 함께 나눈 그들을 믿는 마음이었으나, 어떤 순간 그들이 본색을 드러낸다.

   적에 대한 분노와 애국심을 떠들던 사람들이 출발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그녀를 압박해 올 때, 모두를 위한 희생을 결심한다. 다시 출발한 마차 안,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그녀는 그들이 먹어치운 자신의 음식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복수와 투쟁을 다시 결심한다.


    단순한 줄거리와 달리 이 작품의 강점은 등장인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에 있다. 건조하게 훑어가며 계층과 캐릭터, 행동을 그림처럼 보여주며, 심리 변화를 매 순간 바로 느끼게 한다. 단 한 문장도 놓칠 수 없는 긴장이 계속 흐르고, 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전달된다.

  

    ‘비곗덩어리’라는 단어 하나에서 바로 여인의 초상이 그려진다. 80년대 기차역 앞을 지나다 보면 가게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여인들이 있었다. 피로가 가득한 얼굴에는 약간의 당당함도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처음엔 그런 가게에서 보조로 일하다가 독립하여 자기 업소를 갖게 된 여인들. 거리를 지나는 상인과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학생 시위대가 지나가고, 전경들이 대형을 갖추고 지키는 낮이 지나고 밤이 오면

그 거리의 주인은 그녀들이 된다.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공화정을 지지하는 투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노래만 부른다. 성직자의 옷을 입고 암묵적 동조의 태도를 보여주는 수녀들의 모습도 익숙하다. 폭력적 본성을 위선으로 감추고 있는 청년 장교의 모습도 80년대의 그 거리에 있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훨씬 적나라하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자본가와 귀족들. 계층이 상승할수록 욕망에 충실하다. 지위에 맞는 화법으로 무장하고 정숙한 부인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비곗덩어리’의 비극을 희화화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그녀를 착취하고 학대하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달성해 가면서도 그녀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모습은 우리가 지난 한 시대의 모습과 닮아있다. 

   

    도시의 재개발 바람과 함께 80년대의 유산이던 그 가게들도 사라졌다.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고 평등과 공정이 흘러넘치는 시대가 왔다. 그렇지만 우리 도시의 후미진 골목에는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생존과 존중을 위해 매일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의 안녕과 공공의 이익이라는 기득권층의 기만에 허덕이며 소중한 마음을 다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탄 마차 안에는 어떤 이웃이 같이 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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