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팔렸다. 드림백화점이 골드 백화점을 인수한다는 기사가 떴다. 망했다.
한 달간 땀을 찍어가며 쉬지 않고 만든 '골드 백화점 비전 2030' 기획서는 회사를 팔아먹기 위한 자료였다.
일단 의심해야 했는데. 장기 프로젝트 계획을 일개 대리 혼자 만든다는 것도 어이없고, 확정되지 않는 내용을 영어, 일어로 번역까지 시키는 이유도 궁금했다. 가진 지식에 영혼까지 갈아 넣은 '파일럿 플랜'을 부사장에게 보고한 것이 일주일 전, 피드백이 없어 궁금했는데 오늘 인터넷 속보창에서 확인한 셈이었다.
'역시 나는 육두품이지. 항상 말하는 그들의 가족은 아닌 거지. 자료만 만드는 머슴. 삽질은 내가 하는데 돈은 그들이 챙기는 거야. 가게 팔아서 얼마나 받았나. 값을 올리려고 식품관 리뉴얼 한 거지'
성원은 한동안 멍청히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웅성거리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나. 많은 생각들이 몰려들었다. 형광등마저도 껌벅거리며 성원을 비웃었다. 나름 회사의 우수 자원이라 자부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헛된 생각인가. 어떻게 그렇게 깜쪽같이 모를 수 있나. 최근 사장과 임원들이 오후만 되면 사라지는 것이 인수 협상을 위한 외출이었음을 이제 알았다. 자금 일보를 매일보면서도 회사에 유동성 문제가 심각함을 간과했다. 추석행사가 끝나고 백화점의 실적이 극대화되는 4분기 랠리가 시작되면 해결될 것으로 판단했다. 일주일도 못 버티고 급하게 팔아먹을 정도는 아닌데.
옥상에 올라와 하늘을 본다. 푸르다. 서럽게 푸르다. 3년의 기억이 구름 사이로 흐른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와 맘을 붙이려 노력했던 회사, 재벌급은 아니지만 지역에서 인정받는 탄탄한 회사, 회사와 내가 함께 성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한 미지막이라니. 재벌 그룹의 다점포 백화점들 틈에서 지역 기반의 단일 점포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백화점, 지역 주민의 신뢰가 높은 백화점으로 자부했지만, 말 그대로 혼자하는 자부였다.
최대, 최고는 아니어도 최초 시도가 많은 백화점을 만들고 싶었다. 명품 브랜드는 입점시키지 못하지만 고객의 즐거움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나고 정을 나누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3년동안 일을 하고 남은 것은 회시가 인수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고민뿐이다. 담배 연기처럼 떠오르는 망상을 접고 다시 사무실로 내려왔다. 그들이 말하지 전까지는 그냥 평소처럼 일하는 거지. 모.
추석 행사 실적 자료를 들고 임원실로 들어섰다. 한비서가 눈짓을 하며 부사장실을 가리켰다.
"사장님은?"
"아직, 어디로 도망가신 건지... 연락도 없어요."
"쓸데없는 소리.."
"언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한비서의 눈망울이 두 배는 커져 있었다. 고졸로 입사해서 2년째 근무하는 한비서는 평소엔 그냥 발랄한 스무 살 소녀다. 오늘의 어수선한 소문은 그런 그녀까지도 불안에 떨게 한다.
노크를 하고 부사장실로 들어섰다. 김 세안 부사장은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 사무실의 주인이라기보다는 누군가 잡아다 놓은 한 점의 정물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떠나고 싶어 하지만 무슨 미련이 있어 다리가 붙어버린 소금 기둥이다. 백화점 10층에 있는 부사장실에선 송안시 도심이 내려다 보인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시청과 마주 보고 있어 하루 종일 교차로를 돌아가는 교통량으로 도시의 컨디션을 측정할 수 있다. 백화점 쪽 신호 대기 차량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 그날의 실적을 예측할 수 있다. 저 사람은 하루종일 그것을 내려다본다.
"어제까지 실적 보고 드리겠습니다. 추석 선물 세트는 ~"
"민대리는 오늘 같은 날도 일을 하는 거요?"
언제 들어도 부사장의 목소리에는 나른함이 묻어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 흥미가 없다는 듯 높낮이 없이 중얼거리듯 말하는데, 딕션은 정확하다. 부짓집 도련님의 여유인가. 감정 없는 질문이 계속된다.
"민대리는 우리 골드백화점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나요?"
"만 3년입니다."
"아! 그러쵸.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경영기획팀장을 맡았을 때 막 입사한 상태였죠. 그러고 보면 이 회사에 유일한 입사 동기네, 우리 두 사람이."
약간의 감정이 묻어났다. 어색하지만 성원을 위로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 더욱 담담하게 대답했다.
"녜. 저희 팀장님이셨지만 자주 뵙지는 못했지요. 사무실보다 PC 방에 더 많이 계셔서."
"하. 내가 출근을 자주 안 했다고 비난하는 건가요. 그땐 여러 사람 같이 일하는 게 왜 그리 어색한지."
"비난은 아닙니다. 그냥 그땐 저도 백화점 일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었고, 팀장님께 직접 보고할 만한 짬밥이
아니었지요. 회식같은 것도 자주 안하시고. 출퇴근도 지맘대로... ... "
성원이 아차하는 순간, 자료를 내려다보던 김 세안의 눈길이 성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후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르게 다시 중얼거렸다.
"하여간 인수를 제안한 여러 회사 중에 드림 백화점만 100% 고용 승계를 약속했기에 그쪽에 넘긴 거니까
오히려 민대리에겐 기회가 될 거요. 대기업에서 능력을 맘껏 펼쳐요. 이번 기획서에 그린 멋진 백화점을
직접 만들어봐요"
"부사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시나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예의상 한번 물었다. 그의 말대로 유일한 입사 동기이고 부사장에 취임한 이래로 실적 보고를 위해 아침마다 만났고, 최근 한 달간은 비전 계획서를 만들어 보고하느라 더 많은 접촉이 있어선지 예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전에 백수로 지낼 때 부동산 중개사 자격증 따놓은 게 있는데 복덕방이나 할까. 어차피 송안시를 떠나지는
못할테니 이곳에서 할 일을 찾아야겠지요."
성원은 피식 웃었다. 백화점의 모기업인 골드 건설은 탄탄한 회사였다. 송안 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를 짓고, 시청옆의 호텔도 가지고 있다. 호텔과 백화점, 그리고 송안의 요지마다 막대한 부동산을 가진 알짜 기업. 골드 건설의 유일한 후계자가 김세안 부사장이다. 먹고 살 궁리해야 할 말단 대리가 그런 사람 걱정을 하다니.
복도로 나와 혼자 걸으면서 크게 웃었다.쥐가 고양이 걱정하고 있군.
부사장에게 질문을 할 때 순간적으로 스쳤던 생각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백화점을 팔아 생긴 자금으로 새 사업을 할 테니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는 상상. 잠시라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던 걸까. 상상은 상상일 뿐 앞으로 그를 볼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던힐 라이트에 불을 붙이고 휴대폰을 눌렀다.
"강여사, 우리 회사 드디어 망했어"
"그 놈의 영감탱이, 주책을 부리더니 결국 그렇지. 기사 읽었다. 쓸데없이 미련두지 말고 빨리 집에 와."
성원의 엄마, 강현옥 여사와 골드 건설의 김기도 사장은 어릴적 교회 친구다.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세사람은 같은 교회에 다녔다. 김사장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고 고향을 지킨 아버지는 강 여사를 얻었다.
통화를 하며 검색하니 이미 드림백화점에서 보도자료를 뿌려대고 있었다.
#골드백화점#투자실패#고용승계#지역친화#드림백화점#김기도회장#권근식회장
'드림 백화점이 송안시의 골드백화점을 인수한다. 오너 일가의 투자 실패로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대기업인 드림백화점이 구세주처럼 나서 송안시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차원에서 인수를 결정했다. 드림 백화점은 골드 직원들의 100% 고용 승계를 약속하고, 향후 5년간 천억대 이상의 투자를 통해 전국 10위권 백화점으로 성장시킬 계획이라 밝혔다.특히 송안시는 드림 그룹 창업주의 고향이기도 해서 더욱 애착을 갖고 그룹의 주력 점포로 키우기 위한 전략을 이미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 10위권 백화점'이 목표의 출처는 바로 성원의 '비전 2030' 계획이다. 오직 성원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며 그것을 보고한 사람은 김 부사장뿐이다.
'역시 그 문서는 백화점을 팔아먹기 위한 용도였어. 나 혼자 꿈꾸며 원숭이 재주 부린 거지. "
창고 부지에 별관을 짓고, 시청과 협조하여 광장 지하를 개발하여 연결하고, MZ 전문관과 명품 라인업 보강이라는 확장 계획, VIP 관리를 뛰어넘는 팬클럽을 육성하고 뉴타운 커뮤니티를 공략하는 마케팅 플랜까지 성원의 계획서 그대로 드림 백화점의 사업 계획으로 발표되었다.
"얘, 듣고 있니, 그래서 넌 어쩔 거냐고... 서울로 돌아갈 거냐?'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계속 때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 타들어 간 담배가 손가락까지 태울 기세였다. 후드득 거리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가긴 어딜 가, 서울에 누가 기다린데... 강여사 옆에서 늙어 죽는다니까..."
"이쁜 얼굴 만들어주고, 좋은 대학 보내줬으면, 이제 출세하고 돈벌어 와야지. 왜 작은 동네에서 얼쩡거려...
이번 기회에 서울에 일자리 알아보도록 해. 서울가서 신랑감도 물어오고,"
"회사도 망하고 실업자 될판에. 그게 엄마가 할 소리냐. 난 여기 딱 붙어서.가늘고 길게 살 거야.
새로 들어오는 드림 백화점에 충성하면서 엄마랑 살거라고"
"듣기만 해도 징그럽다. 물려 줄 재산도 없는데.뭐하러 붙어있는데. 이번 기회에 네 인생 찾아가."
강여사는 어이없다는 핀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어머니를 어쩔 수 없어서 송안으로 내려온 지 3년. 골드백화점에 달걀을 납품하던 아버지의 인연으로 경력직 특채로 입사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농장을 정리하고 포구 쪽에 커피하우스를 오픈했다. 커피보다 책이 많은 카페는 엄마의 시간을 달래 줄 공간일뿐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지는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혼자 남은 엄마가 서럽게 우는 것이 안쓰러워 같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뿐인데, 그것이 성원의 꿈을 뺐었다고 강여사는 자책했다.
세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성원은 꿈에 대해 생각했다. 어제까지 그녀의 꿈은 이 백화점이었다. 송안시에서만 30년을 영업하며 구축한 로컬 네트워크를 온라인으로 옮겨 새롭고 강력한 유통망을 구축하는 플랜을 구상하고 이번 계획서에도 반영했다. 평생 농장에서 산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거대한 온라인 플랫폼을 가진 드림 그룹에게 아이들 장난같은 사업 계획 아닐까. 회사 경영권의 변동은 성원은 꿈까지도 지배하려 한다. 그들 입장에서 별로 크지 않은 이번 거래가 성원의 삶과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바꾸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앞에 있는 선택지는 계속 다니거나, 그만 두거나. 둘 중 하나다.
내일 그들이 오면 모든 것은 리셋되는 것이다. 가을의 한복판에 꿈꾸지 않던 길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