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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Nov 15. 2023

가을 바람이 분다.

하늘 정원

    영업팀 회의. 층별로 매장 개편 계획을 보고하고 토의하는 시간. 퇴점 대상이 늘고 공사의 규모가 커졌다.

 

   "다음은 지하2층 말해봐. 뭐가 문제야?"

   정상무의 질문에 지하2층을 담당하는 송차장이 계획을 보고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 비서가 생수병을 들여온다. 세번째 물 보충 시간. 참석자들은 목이 타들어가고 있었다.벽면에 붙여 놓은 대형 일정표 앞에 선 성원은 공사 내역이 결정되는 대로 바로 메모했다.회의가 끝날 때 쯤에는 일정표 상의 여백이 입 퇴점 매장 명칭으로 빽빽히 채워졌다.

  

  "일단 정리 된 것 같으니, 거 뭐야. 도표로 정리하고, 투자 비용 뽑아서 권차장이 품의서 써"

  "녜. 내일 아침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조직의 인간들은 내일 아침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침에 보고하고 수정 사항 지시 받고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 수정해서 다시 아침에 보고하고. 야근을 끊을 수 없는 구조였다. 골드백화점 시절에 이렇게 일했다면 망하지 않았거나 모두 죽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영업팀 직원들이 모두 나간 후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권차장이  다가왔다. 권차장은 휴대폰을 들고 추가로 작성된 내용들을 사진 찍고 있었다.

  "오늘 토요일인데 정리하고 퇴근하지"

  "이거 품의서 쓰려면 제가 도와드려야 할텐데요."

  "양식 뿌려서 세부 내용은 각자 작성하라고 하고 우린 표제만 만들면 돼. 크게 바뀔 내용은 많지 않아"

   그리고 권차장이  한마디 덧 붙였다.

  "어미니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시는데 주말엔 데이트도 하고 그래"

  "풋. 시간이 없어 못하는게 아니고. 사람이 없어 못하는 거죠"

  "그건 민대리가 노력을 안해서 그래. 교회라도 나가서 사람들 좀 만나라구"

  "우린 일요일도 일하는 직업인데 교회는 무슨. 그러고보니 차자님 이제 사생활 간섭까지 하시네요

   혹시 우리 엄마 만나셨어요?"


     이런 순간에는 옥상이 확실한 도피처였다. 돌아온 날부터 엄마가 교회도 나가고 친구도 만나러 가라며 더밀었지만 철저하게 집과 회사만을 고집했다. 엄마와 함게 하는 것. 그것이 돌아 온 이유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엄마 옆에서 함께 하는 것외에 취미 활동이나 친목 모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 동안 회사와 집,그리고 엄마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권차장을 통해 듣고보니 엄마가 진짜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순간,  옥상에 불청객이 나타났다.

     권차장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맑은 공기를 빨아들이는 시늉을 했다. 성원을 바라보고는 담배를 계속 피우라는 제스추어를 보냈다.

  "옥상이 꽤 넓은데 활용할 생각을 안했네"

  "일단 조경이나 그런것에 투자할 돈도 없고.아래 층고는 높고 에스컬레이터도 없어서 고객들이 계단으로

   올라오기는 힘들어요. 한마디로 꾸며도 아무도 안오게 생긴거죠"

   이야기를 듣던 권차장이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10월 중순이면 적절한거 아냐.어차피 여긴 리셉션 할만한 곳도 없고.한번 와서 보기나 하라고."


   자세한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상대를 설득해 나갔다.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두번째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권차장이 통화를 끝내고 다가왔다.

   "자주 못오니까.한 번 올라오면 여러개 피고 내려가게 되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빠른 걸음에 당황 연기를 먹버렸다 켁켁거리고 있는데 권차장이 말했다.

   "오픈 축하 우수고객 리셉션은 여기서 하도록 하지. 가든 파티 해본 적 없지. 여기를 가든으로 만들고

    멋진 가을 밤의 정취를 보여주는 거야.10월의 멋진 밤공연도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드레스를 입은 고객들이 옥상에 꾸며진 정원을 누비며 칵테일을 마시고, 대화를 하고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몇년동안 잊고 지낸 삶의 모습이었다.그들 대부분은 아빠와 엄마의 손님이거나 친구였던 사람들이었다. 매장에서 그들을 보더라도 모른척하고 지나갔다. 성원은 자신이 기획담당이지 우수고객이나 서비스 담당이 아니므로 고객들과 대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엄마의 시간에 대한 상처가 아직 아물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권차장의 제안에 옥상의 가을 바람이 느껴졌다.그가 설명하는 환상적인 밤의 풍경속에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우리 고객들이 왈츠를 추거나 그런 파티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저 친한 매니저들과 사진이나 찍고 내려가겠지. 파티장 연출과 소품 배치 계획을 스케치하던 권차장은 무엇인가 몽상하는 듯한 성원의 표정에 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한번도 보지 못한 흐믓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명하는 모든 장면을 상상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이 맹랑한 여성의 안에 그동안 숨기고 있는 정체는 무엇일까 다시 궁금해졌다.옥상에 바람이 불었다.


  "어때요. 그 밤의 느낌이...."

  "길고 지루한 여름의 열기가 지나가고,차가운 이슬이 내리기 바로 전 우리 나라에 단 2주만 허락되는 진정한

   가을 날. '10월의 어느 멋진 날'로 시작해서 '10월의 마지막 밤'으로 끝낼 수 있겠어요."

  "단 2주만 허락된다는 것은 누구 얘기지?"

  "그냥 제 생각이어요. 가을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

  "민대리가 가을을 좋아하는지 몰랐네"

  "가을은 우리 엄마를 닮았어요. 긴 여름을 물리쳐 놓고는 자기 혼자서 외롭다고, 강하지 못하다고, 바람을

    부르고 낙엽을 만들고, 단풍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어울려 살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우리 엄마도 그렇게

    살고 싶어해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엄마가 외로우면 안된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외로운 것은 저였단

    생각이 드네요. 집을 떠나 있던 10년 동안 저는 겨울이었어요."


    말을 해 놓고 끔찍했다. 이 타이밍에 왜 이런 말을. 전혀 답지 않은 말을 했다고 성원은 후회했다. 다행히 권차장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그냥 기분이 좋았다. 항상 따지고 덤비는 그녀에게서 그동안 보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가 마구 삐져나오는 모양새였다. 이제는 철지난 레퍼터리라고,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고객 감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이 된 가든 파티를 송안점에서 한번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촌스러운 민성원 대리를 위해서라도.


  정상무가 찾는다는 한비서의 전갈에 다시 이성으로 무장하고 예산안을 들고갔지만 완벽하게 패했다. 매출 예산 숫자는 적정한 것 같은데, 그 숫자에 다다르는 논리가 빈약하니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보고 동일한 결과가 도출됨을 간단 명료하게 보여달라는 지시를 받고 물러섰다. 내일 아침에 보고해 달라는 말은 곧 오늘도 야근이라 외치며 사무실로 돌아오니 김부장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다들 저녁 먹으러 갔는데, 민대리는 어디 갔었어?"

  "팀장님은 저녁 안 드시고요?"

  "글쎄. 별로."

  "저랑 라면 드시러 가실래요?"

  "라면? 오랫만에 한 번 먹어볼까."


   김부장과 함께  라면집 '리플리'로 향했다.  김부장은 처음 가는 라면집이 분식점이라기 보다는 운동권 학생들의 아지트 같다며 투덜 댔다. 운동권 아지트를 생각한다는 것에 세대의 벽을 느끼며 가볍게  물었다.

 "팀장님 학교 다닐 때 운동권이셨어요?"

 "운동권은 아니고 운동 좀 했어. 내가 회장님과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인건 알고 있지"

 "아니오. 처음 듣는데요"

 "저런 우리 회사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인데.민대리만 몰랐군"

 "저와 황인아가 동기 동창인건 아세요.어차피 서로 사적 관계는 모르는게 당연하죠"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어 먹으면서 김부장은 전형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렸을 때 너무 많이 먹어서 라면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집 라면은 해물이 많이 들어가서 럭셔리한 느낌이 있군. 우리 집이 엄청 가난 했거든.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해서 부자 친구가 생긴거야. 공부는 잘하는데 몸이 작아서 큰 애들에게 시달리는 친구가 하나 있었지. 내가 그냥 정의감에서 그 친구를 도와주고 보호해 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였던 거야. 난 원래 실업계 고등학교 가려 하다가 그 친구 덕에 같이 인문계로 진학했지. 공부에 재능이 없었던 나는 대학도 체육과로 같어. 그것도 그 친구 덕분에 갈 수 있었지. 체대 입시도 돈 많이 들거든. 그 친구가 바로 너희 회장님이고."

   그런 연줄로 입사했기 때문에 공채로 입사한 정상무같은 친구들 보다 승진이 늦은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본인의 그룻 만큼 일하면서 회장님께 누를 끼치고 싶진 않다고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에 성원은 식상하고 전혀 감동하지 못했다. 리액션없이 라면만 먹었다. 전화기로 한비서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점장님이  대리님을 찾으셨는데. 권차장님이 퇴근했다고 말했습니다."

 김부장이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기에 문자를 보여줬다.

 "그럼 여기서 그냥 퇴근 해. 나 혼자 올라갈테니"

 "어차피, 가서 예산안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제가 팀장님을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건 권차장이 안 해주나. 지가 맘대로 퇴근시켰으면 일도 지가 해야지. 지가 팀장이냐. 내 팀원을 왜 지가

  챙겨.무조건 퇴근해. 예산안은 내가 내일 점장이랑 맞짱떠서 해결해 줄께 "


   강제 퇴근 당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 어색했다. 라면까지 먹었는데 바로 집에 가기도 아까웠고 불러 낼 친구도 없어 시청앞 광장을 배회하고 있는데, 트리이엄프 호텔 쪽에서 야구 모자를 눌러쓴 빨간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는 사람이라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번쩍들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다. 그  정도로 사적인 친밀도가 있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뭐 하오"

"그냥 저녁 바람이 좋아서.버스 타러 가는 길입니다.저녁은 드셨어요?  어디 가는 길이세요?"

"나야 뭐. 라면먹고 PC방 가려고 나선 길이지요."

중얼거리는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성원은 할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반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같이 pc방 가자고 할 순 없고, 버스 타기 전에 잠깐 산책이나 할래요. "

"아니, 맥주나 한잔 사주세요.저 라면 먹고 집에 가는 길이거든요.바람 좋은 테라스에서"

   갑자기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아마도 회장님의 호위 무사였다는 김부장의 말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PC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 초저녁 가을 바람에 담소를 나누는 것이 이 사람에게 좋은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광장에도 가을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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