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부사장님이 돈도 많은데 집에서 시스템 갖추고 게임하지 왜 맨날 pc방 가는지 아세요?
시내에 시설 좋은 곳도 많은데, 시장통에 쭈구리한 PC방으로"
"그 PC방 주인이 고등학교 때 친구래"
"아.그렇군요. 난 그런 친구도 없구. 점장님 본사 있을 때, 비서가 온데요. 전 이제 짤리나 봐요"
"그럴 리가.다른 부서에서 일하면 되지!"
정상무의 아침 스트레칭이 끝나길 기다리며 한비서와 잡담을 나누지만 맘은 편치 않았다. 조직 개편 이후 인력 조정에 대한 소문이 계속 돌았다. 그때, 권차장이 웬 여성과 비서실로 들어왔다.
"민대리 여기 있었군. 모 하는데..."
"실적이랑, 예산이랑, 이 것 저 것 보고하려고요..."
"그래. 그럼 인사나 하지. 이 쪽은 본사 고객케어팀장 권새록 팀장. 내 동생이기도 해"
그녀의 첫인상은 사람으로 정의된 명품이었다. 수입 럭셔리 브랜드 카탈로그를 찢고 나온 사람이었다.부드러운 머리결과 잡티없는 피부는 타고 난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입고 걸친 모든 것이 명품 브랜드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너 따위는 내게 말도 붙이지 마'라는 태도였다. 말로만 듣던 도자기 피부 틈새로 사람의 말이 나왔다. 인사 따위는 생략하고 본론을 던지는 그녀였다.
" 사업개발팀에서 VIP리셉션 준비를 의뢰해서 왔어요. 이따 옥상 안내해 줘요"
그리곤 점장에게 인사하겠다고 들어가 버렸다. 먼저왔는데 새치기 당했다.
옥상에서 다시 만난 그녀가 낀 선글라스 하나만으로도 옥상을 뉴욕 한복판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넓고, 충분히 파티를 할 만 하겠어요"
"근데, 여기 VIP를 따로 관리했나요. 몇 명이나 되죠. 관리하는 고객이. 파티에 올 사람들 선정 기준은?"
" 연간 2천이상 구매 고객이 한 천명 정도,발렛 주차하고 명절 선물 보내드리고 그런 정도 관리했죠"
"VIP라운지는?"
"3층에 VIP룸에서 음료서비스 정도"
"나중에 세부 데이터 보내주세요. 내년부터 드림백화점의 압도적인 VIP 혜택을 받게된다는 것을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성원은 압도적인 이라는 수식어가 맞는것인지 의아했다. 뭔가 언발란스한 거 아냐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압도적 외모는 인정할 수밖에. 저만치 떨어져같이 온 일행들과 무엇인가 심각하게 논의중인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 하나를 빼 물었다. 드림에도 여팀장이 있었군. 그들의 이야기는 고객의 수준, 예산, 선물, 연예인 섭외등으로 뻗어 나가며 성원을 계속 자극했지만 참았다. 할일도 많은데 끼어들면 안된다. 그들이하는데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하겠지하는데 황인아가 올라왔다. 잘 되었다 싶어 고객케어팀장을 불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아는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인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성원을 슬프게 했다. 골드백화점은 모든 직원을 직접 채용했다. 상담실, VIP 라운지뿐 아니라 직원식당, 배송 기사, 주차 요원까지 모두 정규직이었다. 기획팀의 민성원 대리나 주차장의 김대리 아저씨나 같은 급여를 받는 구조였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거지.자기들은 그런 것들은 다 아웃소싱이라고.상담실도 비정규직이라고.제도 설명한답시고 불러서는 은근히 압력을 넣은거지."
"그래도 인수 합병 계약에 고용 보장 항목이 있는데."
"말 안들으면 원거리 발령을 내는 모양이야. 너 부산이나 광주로 가라 그러면 갈래? 너도 알다시피 상담실 언니들 결혼도 했고 먹고살 만하잖아. 솔직히 말하면 송안시 유지의 딸 들인데, 치사하다고 때려 칠 생각인 것 같애. 나 같은 애만 안 된 거지.먹고살려면 계약직이라도 비벼야지"
"너도?"
"아직 우리 쪽은 말이 없는데. 아까 그 권팀장이라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닌가?"
"그건 아니고. VIP 파티 때문에."
말을 흐렸다. 그건 겉으로 말하는 것이고,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갑자기 자신이 없었다. 인아가 말하는 범위에 있는 사람은 거의 200명 가까이 된다. 그들을 모두 비정규직으로돌리고 최저 임금으로 삭감한다면, 인건비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답이 나왔다. 그중에는 20년 이상 여기서 일한 사람들도 있다. 예전 송안 시장에서 일하던 분들이 계속 주변 업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들은 어찌 되는 건가.모든 상황이 의심스러웠다. 오늘 갑자기 나타난 권팀장뿐 아니라, 권차장과 인사팀장이 자주 만나는 것도 의심스럽고, 영업팀 회의는 항상 배석시키면서 지원팀 회의는 드림 출신끼리만 하는 것도 음모가 있는 듯했다. 아침에 한비서가 한 말도 생각났다. 그냥 본사에서 데리고 있던 비서가 편해서가 아니라, 그 어린아이도 쫗아내려 한다니.
성원은 잠시 잊고 있었던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계속 백화점에 다녀야 하는 건가.."
"너는 계속 다녀. 너는 과장도 하고, 부장도 하고, 사장도 될 수 있잖아.좋은 대학 나오고 실력도 있고, 이미 드림의 앞잡이가 되었는데 뭐가 걱정이야"
인아가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힘을 돋우지만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회사가 인수당하고 잠시 고민을 했지만 잊고 있었다. 일단 쏟아지는 업무를 따라가기 바빴다. 신상에 대한 고민을 할 시간에 잠을 자고 싶었다. 정상무의 독설에서 벗어나기 위해 땀을 찍어 문서를 만들었다.시간을 보내며 고민을 놓고 있었다.
"한편으론 재밌기도 했어.."
"무슨 말?"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하는 것. 권차장이나 정상무 지시로 일하면서 뭔가 제대로 배우는 느낌이었어. 트집은 잡지만 기본기가 강한 사람. 일하는 방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지."
"맥킨지에서 일하는 법"
"맞아.. 책에서 본 것. 혼자 공부한 기획서 작성법. 최신 경영 트렌드 이런 것들을 대화하고 지도해 주는 사람을 만난 듯한 느낌.."
그래서 고민을 더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학부 때 공부하고, 창업한다고 놓고 있었던 기장 기본적인 것 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실전에서 써먹고 있다는 생각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인아가 웃었다.
"흐흐. 나도 알아."
"네가 뭘. 너는 공부도 안 했잖아 아.미안. 하려고는 했지. 머리가 안 따라줘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너 지난 3년 동안 좀비 같았어.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지 모 하는지. 그냥 맨날 풀죽어있는 것이.맨날 뭔가 끄적거리는데 눈동자엔 생기가 없고 공상에 빠진 것처럼. 우리에 갇힌 곰새끼 모양."
"곰새끼가 뭐냐.호랑이나 뭐. 그림 좋은 거 많은데."
"곰새끼라고 다 똑같은 줄 알아. 요즘은 판다가 갑이야. 둔해 보이긴 하지만"
성원이 백화점에 들어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인아였다. 이 작은 울타리로 돌아 올 아이가 아닌데. 처음에는 아버지 때문에 우울해하는지 알았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성원의 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들 모임에도 나오지 않고, 매장에서 만나도 본둥만둥, 성원이 길게 말하는 것은 회의 시간의 실적발표 때뿐이었다.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죽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성원의 얼굴에 총기가 되살아났다. 심지어 절대 생각도 못한 스카이다이빙을 해볼 생각이라니. 무엇이 성원을 그렇게 바꿔 놓았는지 궁금했다.
"어쩜.내가 알던 반장 성원이는. 아까 그 권팀장 같은 모습일지도 몰라.자신감 뿜뿜. 친절한 미소. 적당한 무례. 전문가의 신뢰.모 그런 거.아 빛나는 의리까지."
"그래. 내가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주제를 잊고. 나는 식민지 백성인데. 그들과 같은 코스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공정하게 평가받고 인정받는 미래. 드림백화점 본사에는 나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텐데. 정상무가 매일 말해. 본사에 가면 서무 직원도 이만큼 일한다고 "
성원은 우울해졌다. 백화점 내에 인력 구조가 변하는데, 모르고 있었다.그들은 자기들끼리 모든 계획을 만들고,애초부터 고용보장 따위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말 안 듣는 자, 걸리 적거리는 직원은 원거리로 발령내면 그만이다. 송안을 떠나본 적 없는, 송안시 유지들의 친인척들은 그렇게 모두 회사를 떠날 것이다. 드림 그룹 공채 직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경쟁시키면, 골드 출신의 직원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모두 정리하는데 몇개월이면 충분하다.
"내가 엄마 때문에 송안에 왔는데. 부산점으로 발령내면 당연히 회사 그만두는 거지."
"이거 왜 이래. 넌 예외야. 넌 이미 정상무를 비롯해서 드림에서 인정 받았잖아. 말이 특채고 낙하산이지
니 실력이면 우리나라 못 갈 회사가 어딨고, 동급 최강 대리지.뭐가 겁나냐."
인아가 계속 펌프질 하고 있지만 성원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 판단해야 한다. 이렇게 앞잡이로 써먹고 연말에 내쳐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휩싸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