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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Nov 22. 2023

그 남자가 있었다.

하늘 정원

  "그래요. 민대리가 내 길을 막았으니 한잔 사요. 저녁을 안 먹었으니 어묵탕 같은 것 먹고 싶은데"

   광장 주변에는  노천에 파라솔을 펼쳐놓고 생맥주를 파는집이 몇 군데 있었다. 야근에 지치거나 부서 회식이 있는 날 몇 번 갔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김 부사장을 인도했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코 끝을 스치고 빠른 속도로 맥주와 안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말은 뚝 끊어지고 맥주만 들이켰다. 맥주 마시기는 성원의 자부심중 하나였다. 맥주에 굶주려 온 사람처럼 벌컥거리며 들이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성원을 김 세안은 싱그러운 미소로 바라봤다.

 "부사장님은 맥주 보다 양주 스타일이시죠. 왠지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진짜 술을 안 좋아하시나요?"

  "아무래도 어릴 때 술에 취해 사고 친 일이 있어서 많이 마시지 않으려 해요."

  "술 먹고 실수 한번 안 한 사람 있나요. 마시고 취하고 후회하고 또 마시고 그러는 거죠"


   스타트업 창업한다고 돌아다니던 시절 술도 많이 마셨다. 같이 일하는 선후배들과  팀워크도 다지고 갈등도 해결하고 때론 영업을 위해 술을 마셨다. 백화점에 입사한 후론 늦은 퇴근에 급하게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사실 공식적인 회식이외에는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았다. 드문드문 대화가 이어졌지만 매끄럽지는 못했다.김세안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성원의 질문에 짧게 답하는게 전부였다.  

 "옥상에서 가든파티를 하려고 해요!"  

 "무슨 말?""

 "백화점 리오픈 행사 중에 우수 고객 초대 리셉션이 있는데, 그것을 옥상에서 한다고요."

 "와우, 뜻밖이네요. 누가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민대리 아이디어요?"

 "아니오. 드림에서 오신 분이. 거길 가든으로 꾸미고, 공연도 한다고. 해본 적이 많은 것 같아요."

 "그거 재미 있겠는데요. 나도 초청해 주면 꼭 갈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권 차장이 말했던 모습대로 바뀐 공간에서 춤추는 김 부사장의 모습이 그려졌다. 빨간 대가리에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가볍게 스텝을 밟아나가는 그의 모습은 노련한 제비 그 자체였다.

 "부사장님은 거기 잘 어울리시지 않을 듯."

 "무슨 소리. 나 미국 있을 때 파티 좀 다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를 부사장님이라 부르지 마세요. 난 망했으니까."  

 "그럼 뭐라 부르죠. 전부사장님? 김 세안 고객님?, 김 선생님, 김 세안 씨!"

 "민 대리, 아니 이제 호칭을 정리해야 군요. 이제 우리 직원이 아니니까. "

 "제가요. 전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계속 민대리라고 하셔도 돼요. 우리 백화점 고객이시잖아요."

 "회사에서 나이 많은 직원 부를 때 성까지 붙여서 김 세안씨 그렇게 부르죠.그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세안

  이라고 불러요. 아니면 형이라고 하든지"

 "3년 만에 처음 웃기셨어요. 형이라고요. 세안이 형!, 형님도 아니고."


   정말 웃기다는 듯이 깔깔거리는 성원을 세안은 계속 바라봤다.그날처럼 투명하게 웃고 있었다.

 맥주를 추가 주문하며 화제는 취미 생활로 전환되었다.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취미가 없어 보였는데 의외로 스카이다이빙을 즐긴다고 했다. 군대라는 억압된 환경에서 처음 낙하산을 타던 날의 더러운 기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야간에 강하하던 날의 끝없는 두려움. 고공에서 자유 낙하하며 처음으로 느꼈던 자유와 상쾌함까지. 세안의 중얼거림을 성원은 열심히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이젠 그것이 강제가 아닌 자유로운 취미가 되기까지.  

 "근데 민대리는  운동 안 해요?"

 "저는 뭐 시간도 없고, 그냥 자전거 타고 동네 한 바퀴 도는 정도. 지금은 엄마가 포구 쪽에서 장사하지만

  어릴 때는 송안 호수 쪽에 살았거든요. 자전거가  제 소중한 교통수단이고 운동이고 그랬죠."

 "그랬었지. 운동 안 해도 키 크고 날씬하고, 건강하고,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세안이 성원의 말투를 흉내 내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근데 진짜 이제 무슨 일 하실 거예요. 백화점도 팔았고, 호텔비도 비쌀 텐데, 돈 버는 일을 하셔야죠."

 "푸하하, 이럴 때 쥐가 고양이 걱정한다고 하는 거죠."

  성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안을 쳐다봤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데 이 반응은  무엇인가. 한 때는  이 사람의 훌륭한 참모가 되어 백화점 사업을 성장시키는 꿈을 꿨다. 한편으로는 한량 같은 이 남자의 미래를 인간적으로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쥐라니. 누굴 쥐에 비유하고 자기는 고양이라고.

 "예전 골드 백화점 모기업 이름 생각나세요?"

 "GT 산업?"

 "거기서 GT가 뭔지 알아요? 골드백화점의 G, 트라이엄프 호텔의 T,  저 호텔 대표 이사가 접니다. 

   그래서 다행히 직업도 있고, 호텔비도 아낄 수 있죠."


   이 남자는 눈에 힘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백화점밖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자괴감. 그렇게 열심히 숫자와 씨름했는데 결국 대리 수준의 업무만 했다는 배신감이 몰려왔다. 시장에서 백화점으로, 건설과 호텔로 확장해 온 GT산업의 구조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니. 앞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는 이 남자는 시장통의  PC방에서 소일하는 한량이 아니라 준재벌의 유일무이 후계자란 것을 자주 까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업도 있나요. 제가 모르는?

  "고릴라 PC방  2대 주주. 거기 대표는 성원 씨도 잘 아는 강 덕추~울 이"

  "덕출 오빠!  사고뭉치 강 덕출. 왜 그런 사람에게 투자를 해요. 사업 수완은 없고 의리만 찾는 사람에게"

  강 덕출은 성원의 6촌쯤 되는 친척이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 성이 강씨고 엄마에게 고모라고 부르니까 엄마가 그렇게 정리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담배 피우고 싸움하고 동네에서  말썽장이로 유명했다. 특이한 것은 항상 정의와 의리를 부르짖으며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해서 어른들이 귀여워했고 지금도 시장 번영회에서 규율 담당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덕출이 PC방 대표라니.


  "그래서 내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가서 감시하잖아요. 돈은 잘 받고 커피는 잘 내리는지, 여성 고객들에게   친절한지."

  "음. 그렇군요. 그래야죠. 잠시라도 한눈 팔면 딴짓하는 사람이니까."

  "성원 씨도 투자할래요. 스타트업 했다면서. IT 기업에 관심 많은 거 아닌가요."

  세안은 농담이라고 말하는데 성원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당황스러웠다.

   "제가 한 건 IT 쪽이 아니고요. 사회적 기업이라고 깡통 재활용하는 기술 연구했어요"

   "어 정말 좋은 일이네요. 나중에 우리 회사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해야겠네요. 근데 우리 김기도

    사장님이 30년은 더 하실 테니 그동안은 사회적 가치 이런 말도 못 꺼내요."

   "후후. 사장님은  송안시 주민들 고용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봉사한다고 생각하시지요. 

    저도 그 마인드 알아요"


    GT 산업의 김기도 사장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슈퍼 사장이던 아버지가 사람들을 모아 시장 재개발을 시작할 때 잽싸게 건설업을 시작해 시장 재개발의 모든 혜택을 가져갔다. 송안혁신도시 같은 택지 개발 사업에도 깊숙이 개입하여 이권을 챙겼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업체에 지역 사람들을 우선 고용하여 우리 시민들의 소득 향상에 공헌한다고 말한다. 고용이 지역 인맥이 되어 그의 사업을 도와주는 순환 고리를 활용했다.

    이번에도 골드백화점에서 집단 퇴사한 간부 사원들을 GT 산업으로 모두 흡수해서  식자재 마트 사업을 준비한단 소문이 퍼졌다. 조건 좋은 다른 제안을 다 거절하고 드림 그룹에 넘긴 이유도 고용승계 조건이라는 것처럼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송안 시민은 어떤 연줄로든 김기도 사장 집안과 연결되었다.

   성원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농장 부지를 시세의 두 배 이상으로 매입해 주고  엄마가 안정적으로 커피하우스를 열 수 있도록 도왔고, 당연하다는 듯 성원을 골드백화점에 입사시켰다. 그리고 그 아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남 얘기처럼 하면서.

  

 "기부나 사회복지 사업 같은 것을 하면 티는 나겠지만, 시민들 골고루 혜택을 줄수 없으니. 사업을 성장시켜

  많은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사업가의 할 일이라는 생각인데 모 그럴듯하죠. 그 덕분에 우리가 같은 시기에

  골드백화점에 낙하산으로 입사하게 되었지요. 나는 혈연으로, 민 성원 씨는 지연으로. 그러니까 다음엔 같이

  낙하산이나 타러 갑시다. 더 쌀살해 지기 전에. 집에 가야죠"

  택시를  불러 성원을 태우고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물론 정중하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그런데 이 남자.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스카이다이빙, 운동 둔재, 민성원이? 도대체 누구랑. 동호회라도 가입한 거야?" 

 "김 세안 부사장, 그 사람이 너네 집을 아는 게 모 그리 대단해. 송안시에 니네집 모르는 사람있냐. 

  정말 추억 돋네, 옛날 일 생각안 나. 진짜 인연이라는 게. 김세안이 니네 집에서 자고 간 날 생각해 봐.

  너희 둘이 사귀는 거야. 모야 이건, 그렇게 시치미 떼더니 사적으로 만나고 있었네. 따로 술도 마시고."

  인아는 제자리에서 펄쩍 뒤고 성원 주변을 한 바퀴 돌며 계속 감탄사를 내뿜고 있었다. 황인아는 vip라운지 매니저이자 성원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아침 출근길에서 만나 지난 저녁 이야기를 듣고 흥분 중이다.  


 "옛날 일이라니?"

 "어쩜 그렇게  태연하게 물어보니. 고1 때 저수지로 소풍 간 날"

 "소풍. 우리 학교가 무슨 소풍을 가. 그것도 저수지로. 수학여행은 제주도로 갔잖아"

 "지금이야 송안 호수라고 부르지. 그땐 저수지였고, 봉사 점수 채운다고 단체로 쓰레기 주으러 갔잖아"

 "아, 생각난다. 너 그때 사복 입고 와서 혼난 날"

 "그건 기억하면서. 그날 봉사점수 채우러 3학년도 몇 명 와서 술만 먹고 갔지"

 "그래 덕출 오빠랑 친구들"

  인아의 말에서 그날의 기억이 났다. 정말 사전에 쓰여 있는 말 그대로 화창한 봄날이었다. 1학년들이 봉사 활동 가는데 3학년 몇 명이 따라와서 저수지 한편의 습지에서 술을 마셨다. 그 술판의 주동자는 강덕출이었고 그중의 한 친구가 너무 많이 마셨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속 토하자 근처에 있는 아버지 농장의 인부 숙소에 데려가 재웠다. 키는 크지만 삐쩍 마르고 머리가 긴 학생이었다. 거기서도 계속 토하고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 숨겨주느라 고생한 기억이 났다.


 "그 치가 김세안이야."

 "뭐라고, 그 오빤 엄청 말랐었는데, 지금은 균형 있는 체형에 어깨도 딱 부러지는데. 전혀 매칭이 안되는데"

 "오빠는 무슨. 쌍욕을 해가면서 약 사러 간다고 자전거 타고 나보고 잘 감시하라고 했었던 거 기억 안 나" 

  어렸을 때 술 먹고 실수한 일 때문에 술을 자제한다고 말한 세안의 사건이 바로 그날의 일일수도 있다 생각했다. 성원이 가져다준 약을 먹고도 한 참을 더 잔 후에 저녁 늦게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로 전학을 갔다는 소문이 있었고. 세안은 그날을 기억하기 때문에 힌트를 준 것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여간 강덕출은 김세안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지."

"그건 무슨 말?' 
"강덕출이 패싸움하고 유급돼서 한해 늦게 다니다가 자퇴한 거 알지?"

"전설의 17대 1.  음. 사고뭉치였지. 하여간 대단했지. 혼자서 다 쓰러뜨렸다고."

"17대 1 같은 소리 하네.그게 김세안하고 포장마차에서 술마시다 동네 양이치들하고 시비붙은건데, 그 놈들 이 고등학생이 술 먹는다고 신고 안 당하려면 돈 내놓으라 그래서 술 취한 아저씨 3명인가 때린 거고.

그때 당시에, 김세안이 엄청 우울했나 봐. 맨날 덕출이라 술 먹고 방황했나 봐. 사건 이후로 김세안은 서울로 전학 가고, 강덕출은 유급되고."

   강덕출의  포장마차 난동 사건은 송안에선 유명했다.포장마차 골목을 돌아다니며 자릿세를 뜯던 조폭들을 때려눕히고 경찰에 자수했다는 전설이었다. 그런데 그 진실을 알고나니 허무했다. 더우기 현장에 김세안이 있었다니. 세안이 그렇게 술을 좋아했었다는 것도 놀랍고 그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져 PC방 동업자가 되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근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그후론 어떻게 된거야. 지금 두 사람이 동업하는 것도 그렇고"

"흐흐, 내가 강덕출이랑 잠깐 만났지"

"잠깐 만난 건  모야. 지금은 아니라는 거?. 모르겠다. 황인아라는 년도 모 하는 년인지."

"강 덕출이 자퇴하고 서울가서 자취하던 김세안이랑 같이 살면서 그들의 역사가 계속된 거래.나머지는 담에"

 

  느물거리며 미소 짓는 황인아를 바라보며 김 승호 부장 이야기가 생각났다.

드림그룹의 권지철 회장과 김승호 부장의 관계. 가난한 승호는 부자 친구의 호위 무사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아직까지 우정을 간직하고 집안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GT 산업의 후계자 김세안에게는 강덕출이라는 친구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니. 30년의 시간 차에도 사람들의 인연과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어쨌든 그 시절 청년 김세안은 무엇이 그렇게 힘들고 괴로워서 밤마다 술을 마셔댄 걸까. 그런 그가 서울로 전학 간 후에 어떤 시절을 거쳐 지금의 빨간 대가리가 된 건지 계속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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