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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r 26. 2024

카타리나 블롬의 잃어버린 명예

봄에서 여름으로

누가 차이퉁의 권력을 만들었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 김 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     


그녀가 블룸에게 가져다준 오려 낸 신문기사 열다섯 장은 카타리나를 전혀 위로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저 이렇게 묻기만 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카타리나 블룸은 평범한 독일인이다. 독일 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부합한다. 규범과 매뉴얼에 충실하고 시간을 잘 지킨다. 가정부로 성실하게 일해서 고용주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아파트와 승용차도 가지고 있다. 원칙에 충실하고 타인의 존중을 원하는 스타일이다. 다정하지 않고 치근덕거리기만 하는 전남편 꼴을 볼 수 없어 이혼했고,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어머니와 사고뭉치 오빠를 가진 아픔이 있다. 

  그런 그녀가 절대 하지 않았을 단 한 번의 일탈, 파티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집에 데려온 행동이 그녀의 인생을 뒤틀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그 남자가 수배자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버려 은신처를 제공하고 도주를 도왔다. 그리고 그날 바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4일 후, 프리랜서로 일하는 가정부가 유명 일간지 《차이퉁》 기자를 살해했다. 나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작가는 시간을 역행하며 《차이퉁》 의 만행과 그녀의 반응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반면 신문은 자사 기자의 살해사건을 대서특필, 1면 보도, 호외 발행하며 유별난 태도를 보였다. 거의 종교 의식적인 살인 사건처럼 특별하게 만든다. 마치 ‘자기 직업의 희생자’라는 숭고한 태도를 보인다. 피살 사건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이 사건만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 3일간 그들이 만들어 낸 카타리나의 모습, 영리하고 냉정하며, 테러조직원이자, 타락한 여자인 그녀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범죄자를 도운 다순 가담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하고 보복 살인하는 그녀의 본 모습이 증명되는 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카타리나 블룸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경찰의 심문을 받거나,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었다. 경찰 수사는 루트비히의 행방이기에 그녀 주변 사람들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반면 퇴트게스 기자는 그녀의 주변을 파고들었다. 체포 당시 찍힌 한 장의 사진에서 이 매력 있는 여성의 뉴스 가치를 본능적으로 파악했다. 그녀의 신원을 알아내고 고향 사람과 전남편, 고용주를 인터뷰한다. 모든 것이 단독이고 특종이라는 이름으로 다음 날 신문부터 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이 그 기사를 읽는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 만 보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은 같은 계층에 있는 동료들이거나 그녀를 고용했던 사회 지도층, 고용주들이었다. 결국, 계층과 나이, 지역 상관없이 모두 한 신문을 읽는 사회. 그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이 작품의 저자, 하인리히 뵐은 1972년 노벨상 수상자이기 이전에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서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냉전 시대, 분단 독일의 우경화 분위기에 희생되는 약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이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리고 여기서 비판하는 거대 언론의 횡포와 여론몰이는 우리 상황에도 전혀 낯설지 않다.


  특정 신문을 읽는 이유를 물으면 대개 3가지 정도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첫째는 신문의 논조, 확고한 관점에 대한 동의. 둘째는 많은 양의 정보, 정치면을 제외하면 진실과 상식을 전달해주는 면에서 압도적인 신문이 있다는 평가. 셋째는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수준, 정보 수집 네트워크와 글솜씨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종합해 영향력이라고 한다. 결국, 발행 부수도 많고 영향력이 큰 신문을 보고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으로 어떤 대화에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안도감도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런 평가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게 된다. 


   《차이퉁》과 퇴트게스 기자의 행태는 대중의 그런 평가뒤에 도사린 먹이 사슬을 보여준다. 반공주의가 휩쓸던 시대, 한 여성의 사생활마저도 공산주의자 아버지, 좌파 지식인, 테러리스트와 연관시키며 색깔론을 부각하며 독자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고, 경찰 내부의 정보망을 이용해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 숙달된 기술로 써 재끼는 모습은 이미 기자로서의 본분보다는 자기 권력에 취한 협잡꾼의 모습이다. 독자의 알 권리라는 미명하에 더 많은 단독, 특종을 만들지만, 사건의 본질을 벗어난 쓰레기뿐이다. 특히 살인 사건 이후에도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한다. 카타리나에게 동정적인 자들에게 선을 긋고, 내 편이 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 그것은 카타리나의 선례에서 보듯 한 편이 되지 않는 자는 명예를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며,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우리끼리 서로 도와가며 잘살아 보자는 은밀한 계약이기도 하다.     

  거대 권력의 횡포에 대한 카타리나의 도발적 반항은 실패했다. 그들은 어떤 손해도 입지 않았으며, 비열한 기자는 순교자가 되었다. 하룻밤의 사랑이 인생을 뒤틀고, 완벽한 복수로 복역하게 된 카타리나는 출소한 이후에 그의 연인과 사랑하며 조용히 사는 것이 해피엔딩일까? 


   한 편의 고발 보고서를 쓴 작가는 독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길 원했을까?

같이 분노하고 모두 그녀의 편에서 거대한 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일까. 

아주 평범한 시민, 우리 중에 누구도 이런 일에 엮일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이야기일까.

겉으로 보이는 것, 언론이 보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항상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언론, 자본 세력을 함께 몰아내자는 걸까?     

“선량한”이라는 단어와 “호의적인”이란 말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든 이야기가 단어나 말이 아닌 영상으로 기록되고 전달되는 시대에 언어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값진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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