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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r 26. 2024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봄에서 여름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파트릭 모디아노 / 김화영 / ㈜문학동네 / 2014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노을이 유난히 붉은 어느 저녁, 신촌을 지나는데 앞에 가는 녀석의 뒤통수가 낯익다. 한껏 후려치고 반갑게 안아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체포될 것이다. 지금 이 앞의 젊은이는 그 시절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 매년 이맘때쯤 이 거리에는 그런 뒤통수를 가진 아이가 하나쯤은 지나갈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뒤통수 하나가 그 시간으로 나를 돌려보낸다. 그렇게 이상한 단서 하나가 잊었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정작 그 뒤통수의 주인도 어디선가 같은 시간을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에게 그들은 아직도 신촌 거리를 떠도는 젊은이들이다.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그렇게 기억의 일면을 찾아가는 한 사내의 이야기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고 흥신소 직원으로 살던 ‘기 롤랑’이 마지막 과제로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건조하게 기술한다. 단서를 찾고 증인들을 만나며 한 사람의 일생을 복원해가는 과정을 의뢰받은 탐정처럼 차분하게 따라간다.     

   실제 그가 과거를 찾아 나선 1965년을 기준으로 볼 때, 20여 년 전인 2차대전 독일군에 점령된 파리로 찾아간 것은 우연이었다. 단서를 찾아 만난 사람들의 증언과 박스 속의 사진 들이 그를 그 시대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러시아 망명 귀족, 영국계 귀족과 고용인들, 미국에서 온 여인과 친구들의 흔적 하나하나가 그 사람들이 혁명과 전쟁의 시대를 어떻게 겪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자신의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 속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모습과 시대가 살아나고 그들이 함께한 공간을 재구성한다. 


    나치의 압박에 불안한 주인공과 친구들이 스위스 국경 도시로 피신하고 그와 여자 친구가 국경을 넘어가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 의존하던 주인공이 이 사건만은 스스로 기억해 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로마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갈 계획을 밝히는 순간까지도 과연 ‘기 롤랑’의 과거가 ‘페드로 맥케부아’ 일지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스위스 탈출에 실패한 후, 그는 어떻게 파리로 돌아오고, 그 여인 ‘드니즈’는 스위스에서 잘 살았는지가 궁금하다. 거기에는 아직 복원되지 않은 10년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여정의 처음에 독자로서 던지는 질문 ‘그는 왜 기억을 잃었는가?’에 대한 답은 끝까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모든 것을 복원하고 자신이 현재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람,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찾은 것이 아닐까. 기록이 아니라 기억 속에 맺힌 감정을 찾아가는 것.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주인공은 전혀 감정을 기술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의 맹세도, 자신을 돌봐준 친구들에게 고마움도, 여러 개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두려움의 기록도 없다. 진정 찾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아닐까.      

   비스킷 상자 속에 박제된 사진 속의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모든 기억은 한순간에 복원될 수 있겠지만, 그 만남은 뒤로 미뤄진 채 이야기는 끝난다. 그 순간을 미루고 있다. 다시 찾은 스위스 국경 마을에서도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물러선다. 기억은 찾고 싶지만, 감정의 복원이 두려울 수도 있다.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간직할 수 없어 지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20년 후에 그 친구를 만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말하지 못한 그다음을 이야기하기보단 모든 이야기의 출발을 찾아 로마로 향한다.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 불확실할 때 어떤 비스킷 상자는 열지 않는 것이 낫다.


  어떤 순간, 어떤 물건, 심지어 그 날처럼 찬란한 봄날이라는 느낌이 잊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그렇게 작은 편린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든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일까?.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나. 그저 형체를 보여주는 실루엣에 지나지 않을까. 

  기억은 흔들리고 변한다. 옛날 사진 속에서 처음 보고 자신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면 친구였고,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에 아무 느낌이 없다가 주변인의 증언에 갑자기 애절해진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그 날의 분위기였고 부여잡고 싶은 것은 사랑했던 마음뿐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나선 길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못이룬 꿈에 대한 미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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