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하나뿐인...... ”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 / 최 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6 (ebook)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 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 방문을 예고하면 그때부터 마음은 분주하지만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 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말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 둔다”
.......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도착하면 그때부터 근심하고 초조해진다. 그 사람이 금방 떠날까 근심하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초조하다. 육체의 욕망에 탐닉하며 ‘인내심’을 버렸고, 지나친 열정으로 ‘의식’을 무시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모든 시간과 생각이 그를 향해 작동했다.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떠났다. 애초부터 연하 유부남인 그 남자는 떠날 운명이었다. 떠난 남자와 함께 했던 시간을 기록하며 완전히 버려졌다고 고백한다. 그가 떠난 이후 질투와 그리움의 감상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소설인지 일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작품은 “내가 경험한 것만 쓴다”는 작가의 소신대로 모든 순간의 감정을 기록한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그 모든 시간에 공감하긴 어렵다. 독자로서의 기대와 다른 전개에 스스로 부끄럽기까지 하다.
어떻게 포장해도 결국 불륜과 실연의 기록이다. 누구든 인생의 한 페이지 정도 가지고 있을 실연의 기록. 그것이 순수한 첫사랑이라면 낭만이고 추억이라 하겠지만, 불꽃 튀는 섹스 뒤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번잡한 불륜이라면 그렇게 유쾌하게 인정할 순 없다. 작가 자신도 맘에 걸린 듯 그 남자와 함께한 시간이 자신과 세상을 더욱 굳게 맺게 해 주었다고 애써 의미 부여한다.
그가 맺어준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작가의 다른 작품 『부끄러움』에는 그녀의 과거 세상이 있다. 프랑스 루앙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부모와 함께하는 구차한 현실, 사립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느낀 계층적 위화감. 계급 차별. 그리고 거기서 그 부끄러움을 뛰어넘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등생, 모범생이 되어야만 했던 시간. 그 과정의 기록인 수많은 작품을 통해 “자전적 글쓰기”라는 현대 문학의 새로운 새 형식을 만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불륜이나 즐기는 한가한 중산층 여성이 되어버린 작가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어렸을 때는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지성적인 삶을 넘어서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 그녀는 성장한 것인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고 이해하면 배신감을 거둘 수 있나. 작가는 이것을 사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치란 자신이 속한 계층에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위험하고 일시적인 만족일 뿐이다.
그 남자와의 시간을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그 남자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집안일에 매달려 육체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처음 낙태했던 장소에 찾아가 본다. 이전의 자기 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그것이 사치였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투쟁하던 계층 문제에 대한 고백이다.
지성적인 삶을 상징하는 작가이자 대학교수로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을 때, 어떤 불안이 그녀를 일탈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새로 편입된 지식인 계층 안에서 느끼는 소외와 두려움이 파리의 문화에 미숙한 젊은 외국인을 열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작가의 깊은 계층 의식에 그놈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욱 집착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을 수도 있겠다.
사랑하고 질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제약이 있어 그 사랑을 시한부로 만들고,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여 자꾸 변명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결핍을 메우고자 하는 단순한 열정이고 사치일 뿐이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그 모든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기에 이 작품은 상실의 기록이 아니고 성장의 기록이다. 찌질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다른 작가는 없다.
세상을 향해 일상의 언어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솔직한 이야기를 펼치는 ‘단 하나뿐인 열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