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으로
“멀리 돌아온 길, 다시 출발점에 서다.”
『황금 물고기』 / 르 클레지오 / 최 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16 (전자책)
어린 시절 납치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도 모른 채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세상을 표류하는 어린 소녀의 성장기. 『황금 물고기』는 새로운 출발을 알리며 마무리한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 소녀 앞에 펼쳐질 삶이 더 찬란할 것이라는 약속은 없다. 소녀의 여정을 계속 응원하고 싶다.
밤에 왔다는 이유로 ‘밤’이라는 뜻을 가진 ‘라일라’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 마님이자 후견인이었던 랄라 아스마의 죽음은 거친 세상으로 그녀를 내몰았다. 후미진 매음굴에서 자신이 속한 세계를 깨닫게 되었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파리로 가는 여정에서 어린 시절은 끝났다. 이제 혼자서 꾸려가야 한다. 마님도 공주들도 없는 세상에서….
파리는 훌륭했다. 자유롭지만 위험했다. 붉은 머리에 검은 피부, 아랍인의 종교를 가진 소녀에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시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같은 아프리카 이민자들이었다. 노노와 하킴같은 친구들. 버려진 차고에서 살면서도 철학과 예술을 공부하고 깨우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들이다.
매력 있는 흑인 소녀의 학습 능력과 당당한 태도에 지원을 해주는 백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원은 대가를 요구했다. 은근한 유혹과 성적 착취를 강하게 거부했다. 그때마다 작은 소망은 좌절되었고, 삶은 궤도를 이탈했다. 하킴의 할아버지가 남긴 프랑스 여권으로 미국으로 갔다. 보스턴과 시카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치며 사랑하는 사람과 소중한 인연,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다. 연주자로 돌아온 니스에서 다시 배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다다른 아프리카의 한 마을….
소녀의 여행은 근원을 찾는 여정이었다.어딘가에 존재할 자기 부족의 마을을 찾아 결국은 돌아온 아이….
예닐곱 살의 유괴부터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우연처럼 방랑해서 도착했지만, 그것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출발점이다.
떠나기 전에 나는 바닷속의 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노파의 손을 만졌다.
단 한 번만, 살짝, 잊지 않기 위하여.
식민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여성이 프랑스나 미국에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연주자의 삶은 신비롭기까지 할 것이다. 그녀의 연주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과 원시의 소리로 새롭게 해석될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비늘을 가진 황금 물고기 같은 생동감으로 추앙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앞날은 더욱 불안하다. 검은 것을 무시하고 공포를 조장하면서 착취하고 학대하는 자들. 자신들의 무지와 몰염치를 우월한 권리로 착각하는 자들은 항상 있다. 랄라 아스마의 며느리처럼 집착하고 빼앗으려 달려드는 무리에게, 베아트리스 의사처럼 은밀한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사람에게, 적당히 굴복하고 타협한다면 어디엔가 정착하여 무난한 이방인의 삶,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살수도 있다. 그녀가 성장할수록 그러나 타협하지 않는 소녀는 다시 한번 세상에 맞설 것을 다짐할 뿐이다.
멜라에서 첫 번째 구속을 당했을 때부터 소녀는 자유의 바다를 향해 헤엄쳤다. 어린 시절 납치된 소녀는 돌아갈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다. 오히려 스페인계 유대인인 마님이 학습시킨 소수자의 생존법이 더 크게 작용했다. 다르지만 자신을 지키면서 사는 법. 그 헤엄의 기술이 바로 부족의 운명이었다. 역사로부터 유전된 DNA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를 지켜줄 토양이다. 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노파의 손처럼…….
험난한 고난의 기록이 미안할 만큼 쉽게 읽힌다. 아프리카 멜라의 뒷골목도, 파리의 지하철역도, 니스의 빈민촌도, 시카고의 화려한 밤도 익숙한 풍경처럼 다가온다. 분명히 비참할 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생활 속으로 편견 없이 들어간다. 더 심각하게 머리로 읽어야 할 장면들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쉽게 넘어간다. 작가의 힘이다. 그림처럼 넘겨 주는 사건과 시간 속에서 소녀의 마음을 따라가며 응원할 뿐, 다른 생각을 할 틈 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다 읽고 생각한다. 많이 배운 사람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불편한 세상에도 자신을 지켜내는 사람이 있고,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를 유산하고 병원앞에 버려진 그녀를 배려했던 인디언 여인처럼,
쇼핑몰에서 연주를 감상해 준 소녀처럼,
언제나 달려와 줄 연인처럼 지켜주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근원을 찾은 소녀는 부족의 시대를 지나 사랑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라는 칭호을 받은 ‘르 클레지오’는 분명히 따뜻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