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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L Mar 26. 2024

개인적인 체험

봄에서 여름으로

“책임은 두려움에서 시작한다."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          


이발소 심부름꾼 아이가 엄청나게 뜨거운 타월을 손님 얼굴에 올린다

너무 뜨거워서 손에 들고 식힐 수가 없으니까 그대로 손님의 얼굴로 옮겨 놓은 것이다.”     

   책을 읽었는데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모른다.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지쳤다. 흐물거리는 상념으로 청춘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버드’라는 청년의 삶이 한 아기의 탄생으로 절박해졌다. 항상 자신 없는 미소로 맞이하던 이발소 타월이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뜨거움으로 그의 얼굴을 덮쳤다.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작고 마른 몸매에 얼굴 생김새가 새와 닮아 열다섯 살 때부터 ‘버드’라는 별명을 갖게 된 청년. 20대의 나이에 40대의 체력을 가진 청년의 꿈은 아프리카 여행, 아프리카 땅을 밟아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아프리카 하늘을 올려다볼 날을 기다렸다.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는 명분 축적용으로 여행 뒤에 ‘아프리카의 하늘’이라는 기행문을 쓸 계획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불가능하다. 아내가 출산했고, 심지어 그 아이는 아프다. 모든 현실에 쐐기를 박듯 그의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찾아온 아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아이의 처절한 전투가 서글퍼서, 그 아이를 전사자로 매장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서러워 울었다.


   다시 술을 마신다. 결혼을 해서 술을 마셨는지, 술을 마시려고 결혼을 했는지 모르지만 술만 마시며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도 아프리카의 꿈을 만들고 성실하게 저축하며 살아가고 있던 그가 절망에 마주친 순간, 장인은 왜 그에게 술을 주었을까? 아이가 생겼음을 축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술인가. 아이의 장애를 위로하기 위한 술인가. 아니면 어렵게 찾아온 사위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싫었던 것일까?. 어쨌든 한병의 술은 다시 도피의 모티브가 된다. 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죄책감으로 달아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편하게 술을 마실 공간으로 찾아낸 히미코의 집까지….     

   히미코는 박복하다. 일찍 결혼한 남편은 자살했고, 삶은 빛을 잃었다. 암실 같은 집안에 웅크리고 밤이면 스포츠카를 내달려 카타르시스를 한 후에도 무서운 악몽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찾아온 ‘버드’를 위로하고 공포심을 없앤다. 함께 술을 마시자면 술을 마시고, 성교를 원하면 그것을 하면서 한 단계 도약시킨다. 적극적인 아기 살해의 공범이 되고, 아프리카 탈주의 동반자가 되기로 한다. 계획이 있는 삶으로 변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아기의 퇴원 계획을 만들고, 아기의 이름을 정하고, 옷을 고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버드’는 자신을 돌아볼 틈새가 생겼다. 마지막 순간 자신을 사로잡았던 공포감의 정체를 알았다. 아기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일조차도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남들에게 의존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건 나를 위해서지내가 도망만 치는 남자이기를 멈추기 위해서

 나는 도망쳐다니며 책임을 회피하는 남자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렇게 마지막 결심을 하고, 그의 올바른 판단에 호응하듯 아이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가 제법 긴 시간을 방황하는 동안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있어 준 아기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버드’는 자신이 뜨거운 타월을 얼굴에 맞은 이발소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느닷없는 뜨거움에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며 자신만의 감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지만 히미코와 다른 사람들 (기쿠히코, 공사관 직원 데프체프)을 보며 알게 되었다. 자신이 타월을 내던진 이발소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자신의 미숙함이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음을, 자신이 모든 죄의 증거임을…….

    시련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지독한 시간을 보낸 스물일곱 살의 청년은 이제 가족과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가장으로 변해 있다. 시련을 통해 성장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우주는 악몽이 될 뿐이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인간은 그가 죽어 버려서 그와는 관계가 없어진 우주와

 그가 여전히 살아 나가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우주라는 두 개의 우주를 앞에 두게 되는 거야.

 그리고 옷을 벗어 버리듯이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에 버려두고

 그가 계속 살아가는 쪽 우주로 찾아오는 거지.“     


    사람들은 확고한 인생의 목표를 갖고 바른 태도와 철저한 자기 계발로 쌓아 올린 것을 성공한 삶이라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만들고 총명한 자녀들과 주말이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을 행복한 삶이라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택과 갈림길에서 몇 개의 우주를 건너왔을까. 삶의 순간마다 닥치는 시련에 힘들어하며, 고뇌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지만,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길어질수록 지친다. 지치지 전에 돌아보고 지울 것은 지우자. 아무리 개인적인 체험이라 해도 내가 지우지 않아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면 곤란하다.내가 누군가에게 모질게 되어 상처가 되었다면 복수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때 술병을 들고 히미코를 찾아가선 안 되는 것이었다. ‘버드’가 치유의 시간을 갖는 동안 히미코는 또 다른 우주에서 헤매야 했다. 아프리카가 꿈이 되고 떠나가는 버드에게 다시 상처받아야 했다. 단순한 도피의 허상일뿐 실재하지 않았던 아프리카가 그녀에게 실존이 되었다. 결국 아프리카로 떠난 히미코도 거기서는 좀 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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