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윌리엄 제럴드 골딩 (1911~1993),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1983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11년 영국 콘월주에서 태어났다. 1930년 옥스퍼드 대학의 브레이스노스 칼리지에 입학해 자연 과학과 영문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 중 서정시 29편을 묶은 첫 책 『시집』을 출간했다. 해군으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4년 발표한 첫 소설 『파리 대왕 』을 발표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소설을 계기로 골딩은 198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20년대 영국 가상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사회 계급의 문제와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를 그린 『피라미드』(1967)를 비롯하여 『상속자들』, 『핀처마틴』, 『자유낙하』, 『첨탑』, 『통과 제의』등 다양한 작품을 남기고 1993년 여름,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아이들의 모험담 또는 생존 게임
핵전쟁의 위험 속에 어디론가 향하던 영국 수송기가 무인도에 추락한다. 생존자는 5살에서 12살의 아이들뿐 어른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모두 남자아이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섬의 생존 환경은 나쁘지 않다. 이제 플레이어가 등장할 차례다. 나중에 ‘돼지’라 부르는 아이 등장. 끝까지 그 아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스스로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아이는 배불뚝이 외모에 천식을 달고 있다. 지독한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아줌마의 지침에 따라 살아왔다. 물에서 건진 소라를 불어 흩어진 아이들을 모을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을 받은 아이는 ‘랠프’라고 자기 소개한다. 금발 머리에 준수한 외모, 물구나무서는 재주가 있는 아이는 해군인 아버지에게 리더의 카리스마 비슷한 것을 배웠다. 소라를 불어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굳이 대장이 될 생각은 없다. 소라를 불어 아이들을 모은 노력과 신뢰 가는 용모 덕에 어린아이들의 표를 많이 얻어 대장이 된다. 작은 사회를 운영할 규칙을 정하고 각자에게 역할을 맡겨야 한다.
제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성가대)가 합류했다. 그들의 리더는 주근깨 많고 못생긴 ‘잭’이다. 샤프 C조 노래도 할 수 있는 ‘잭’은 자기가 대장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지만, 성가대가 아닌 아이들이 더 많았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다수결로 대장을 뽑은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아이들은 ‘랠프’를 대장으로 뽑았다. ‘잭’은 성가대를 사냥부대로 용도 변경할 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한다. 결국 ‘랠프’가 대장이지만 ‘잭’의 힘은 유지되는 불안한 연합 정권의 탄생이다.
재난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들만의 사회를 만든다. 역할과 규칙을 정하고 정찰과 은신처 만들기, 봉화 올리기, 멧돼지 사냥 같은 임무에 돌입한다. 그렇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영국의 어린아이들은 규칙을 어기고 반사회적 활동을 하는 자에 대한 규제와 벌칙을 만들 줄 몰랐다.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리더의 임무와 파워 게임
준비 없이 대장이 된 ‘랠프’가 가진 것은 힘없는 명예와 소라뿐이다. 외부의 전쟁 상황은 모르지만 일단 구조를 첫 번째 임무로 정하고 준비하며 기다린다. 먹을 것과 생존을 우선시하며 사냥만 강조하는 ‘잭’과 대립한다. 거기에 어린아이들 특유의 산만함에 정신없고 구조를 위한 봉화를 피우기도 쉽지 않다. 숲으로 불이 번지며 어린아이 한 명이 실종된다. 어른의 역할을 이해하고 어른의 관점을 투영하고자 노력하는 ‘돼지’는 계속 경계의 목소리를 내지만 ‘랠프’는 듣지 못한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을 감당하기에 벅차다.
인내와 놀이라는 가치가 뒤얽혀 계속 싸운다. ‘랠프’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아이들은 지친다. 재미있는 사냥놀이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기로 유혹하는 ‘잭’이 차라리 낫다. 아이들은 하나둘 떠나고 ‘랠프’ 옆에 남은 것은 ‘돼지’와 ‘사이먼’ 그리고 어린 쌍둥이뿐이다. 바닷가에 오두막을 만들고 봉화를 피우며 구조를 기다렸다. 하필 배가 지나가던 날 봉화를 꺼트린 ‘잭’ 일당은 ‘랠프’의 질책에 반항하며 거처를 옮겨 버린다. ‘랠프’에 대한 탄핵이다.
내부의 지도력이 혼란한 틈에 외부의 위협이 가해진다. 바다에서 나온 검은 괴물 또는 하늘에서 내려온 짐승에 대해 두려움이 아이들을 잠식한다. 대중의 공포를 이용해 장악력을 키우는 잭을 감당하기 어렵다. ‘잭’은 아이들을 멧돼지 사냥에 동원하고 광란의 파티를 벌인다. 얼굴을 가리는 색칠을 하고 사납게 행동하며 불을 피우는 도구인 ‘돼지’의 안경을 빼앗는다. 두려움은 폭력을 키우고 광기는 이성을 이긴다. 공포에 규칙은 무너지고 복종하지 않는 자는 제거한다. ‘잭’조차도 통제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은 ‘랠프’를 잡기 위해 섬에 불을 지르고, 그 불을 보고 달려온 해군에 의해 구조된다.
게임의 결과:두 아이의 죽음
낯설지만 아름다웠던 섬은 불에 타 죽은 나무처럼 시들해졌고 아이들의 게임도 끝났다. 다시 문명 세계의 소년이 되겠지만 그들이 성장했다고 말하기엔 손실이 너무 크다. 한 아이가 실종되었고, 두 아이가 죽었다. 처음에 비행기에서 탈출한 숫자를 모르니, 이 섬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사라졌는지 모른다. 합리적인 ‘돼지’마저도 아이들 숫자를 확인하지 못했다. 대장으로 시작했지만 쫓기는 사냥감 신세로 구조의 순간을 맞은 ‘랠프’는 상실의 아픔에 눈물을 흘렸다.
대장을 찾는 해군 장교 앞에 나서려던 ‘잭’은 마음을 고쳐먹고 물러선다. 다른 아이들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눈물의 의미는 다르다. 멧돼지 사냥과 광란의 춤을 추는 놀이가 끝났다는 안타까움의 눈물, 자신이 만든 왕국을 자랑하지 못하는 분노의 눈물이다. 거기에 죽은 두 아이에 대해 슬픔은 없다.
죽은 아이들은 누구인가?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한 유령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가던 ‘사이먼’. 안경을 빼앗기고 그것을 찾기 위해 끝까지 대화를 시도했던 ‘돼지’, 두 아이는 누구보다도 공동체를 사랑했고 이바지하고자 노력한 아이들이다.
‘사이먼’은 몸집이 작고 수척하며 가끔 기절하기도 하는 아이다. 첫 번째 정찰에 동행하며 꼼꼼히 살피고 오두막을 지을 때도 함께한다. 유령의 정체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조종사의 시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달려온다. 유령을 퇴치하기 위해 멧돼지 머리로 만들어 놓은 제단에서 ‘파리 대왕’과 대화하는 것도 ‘사이먼’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주변을 살펴 일을 찾던 아이다. 뚱뚱하다고 놀림당하지만, 합리적이고 원칙에 충실했던 ‘돼지’와 통하는 면이 있다.
무인도라는 야생의 생존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던 두 아이는 남다른 정신과 통찰력을 가지고 리더를 도와 대중을 인도하고자 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여 공동체가 나은 방향으로 나가길 바라지만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이끌고 나가기엔 힘이 부치는 아이들이다. 좋은 집안 출신도 아니어서 부끄러움이 많고 다른 아이들이 무시하기 일쑤인 아이들이었다. ‘돼지’의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규칙을 지키고 합심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하는 것.-어느 편이 더 좋겠어?”
어른들의 게임
아이들의 게임은 끝났다. 12살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게임이었다. 선과 악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지 않는 시기다. 어느 쪽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아직은 약한 아이들이다. 리더와 공동체에 대한 개념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아이들의 사회를 무너뜨린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말초적 즐거움을 찾아 폭력으로 공포를 잊어야 한다. 과연 어린아이들의 약함을 악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은 다양한 어른들의 모습을 투영한다. 부끄러움과 약함을 악함으로 성장시킨 것은 어른들이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 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
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내 말은…….”
아이들을 구조하러 온 해군 장교 말에서 영국 소년들에 대한 실망. 그렇지만 책망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는 어른들이 만든 세계에 대한 반성은 없다. 고립된 섬의 공포 속에 아이들을 내버려 둔 책임도 없고 아이들을 찾기 위한 노력의 흔적도 없다. 그들은 어른들의 게임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간된 1954년은 어른들에겐 반성의 시간이었다. 하나의 체제를 마감하고 다른 시대로 전환되는 출발점이었다. 불안한 초기의 민주주의 체제가 강력한 선동의 파시즘에 도전받고 전쟁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했고 냉전과 핵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퍼졌다. 국제 사회의 리더십은 흔들렸다.
‘잭’ 일당은 먹을 걱정은 없다고 유혹한다. 확실한 놀이가 있다. 사냥감을 발견하면 모두 달려들어 죽인다. 가까운 친구도 사냥감이 될 수 있다. 방해하면 제거한다. 대륙을 휩쓸고 간 파시즘의 잔영이며, 세력을 키워가는 공산주의 제국의 모습이다. 이런 시대 배경이 낭만적으로 그려질 소년들의 모험담을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과 정치적 함의를 담은 설화로 발전시켰다.
인간은 그런 변화를 반복하며 수천 년을 보냈다. 힘의 지배와 암흑의 시대를 보내다가 각성하고,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큰 희생을 치르고, 다시 회복하는 시간을 지나면 물질문명은 발달할지 모르지만, 언제든 현혹되고 굴복하고 또 한편으로는 군림하는 행태를 반복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상징과 은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을 통해서 하는 말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건 정말 어이없는 짓이야.
저 아래쪽에서도 나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넌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도망치려고 할 거 없어“
구조된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문명 세상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있었던 일은 단지 놀이였을 뿐이라고 아이들은 변명하지만, 그들이 돌아온 세상에서 다시 ‘파리 대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단지 창자를 도려낸 돼지 머리였던 ‘대왕’은 어른의 세계와 만나면서 훨씬 흉악한 몰골로 진화하고 있다. 본질은 사라지고 욕망 덩어리가 되어 온갖 파리가 들끓고 있는 그들은 어떤 아이였을까. 경고하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세대를 거듭하면서 단순한 질문과 대답은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인간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니다. 공포와 탐욕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