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면허 5년 차로 접어들 무렵 결혼과 함께 얼떨결에 유럽으로 넘어갔다. 유럽에서 "운전은 필수"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대중교통이 잘 발달된 도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그 말은 별로 와닿지 않았다.
게다가 난 여행이나 모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닌가! 그런 내가 한국도 아닌 낯선 유럽에서, 심지어 차도 없는 이 상황에서 무리해 운전을 시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독일에서 5개월, 오스트리아에서 3개월을 사는 동안 남편 없이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나갈 때에도 내가 사는 집 골목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방향감각이 없어 낯선 장소, 건물 안에서 곧잘 길을 잃어버리곤 했던 나인데 말도 못 하는 유럽 땅에서 두 달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니며 낯선 도시를 활개 칠 리는 더더욱 만무했으니까!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사과 속에 사는 작은 애벌레 같다며 귀엽다고 놀렸다. 사과 속에서 사각사각 먹기만 반복하다 때때로 빼꼼히 머리만 내미는 사과 벌레.
20대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외국에서 신혼을 즐기는 사이 나보다 어린 사촌 동생들이 하나, 둘 차를 몬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외국에 사는 또래 친구들도 하나, 둘씩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성적과 운전 실력의 관계는 정말이지 양말 한 짝과 강낭콩의 관계만큼이나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수영장 다이빙 대에 일렬로 줄을 서서 순서대로 퐁당퐁당 물속에 뛰어드는 사람들처럼 하나, 둘씩 차도로 뛰어드는 그들이 신기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별 생각이 없었다.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는 남편도 유지비 때문에 차가 필요 없다고 하는데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내가 왜 차에 욕심이 났겠는가! 일상은 대중교통으로 충분했고, 특별한 여행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기차나 비행기를 타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운전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운전에 대한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운전 가능성을 처음 발견한 때는 10개월 난 우리 아기의 붕붕카를 주차하면서였다. 차 안에 앉아 핸들을 돌릴 때에는 핸들의 방향과 바퀴의 움직임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는데 자동차의 축소판인 붕붕카는 핸들 조작에 따른 바퀴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 만에 핸들과 바퀴의 메커니즘을 터득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뒤로도 어렵게 깨우친 기술을 잊어버릴까 수시로 아기의 붕붕카에 앉아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 벽과 장난감 상자 사이에 멋들어지게 후진 주차를 연습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언젠가를 대비하여….
누구에게나 일생일대의 과제가 있다. 누구는 죽기 전에 유우니 소금사막에 가보고 싶고, 누구는 파이어족이 되어 당당히 사표를 집어던지고 싶고, 또 누군가는 이 지긋지긋한 인간과 조만간 반드시 이혼을 하고야 말리라는....
Lebensaufgabe! (인생의 과제, 필생의 과업)
언젠가부터 나에게는 운전, 직업, 영어가 인생의 과제가 되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운전이었다. 직업도, 영어도 어느 정도 노력하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운전은, 답이 안 나왔다.
왜일까? 왜 나는 이다지도 운전이 어려운 걸까? 언젠가부터 속으로 되뇌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꼭 운전하리라!
기필코!
반드시!
어느새 나는 서른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서른 전에 운전이 아니라 이혼을 한 여자가 되었다. 어릴 땐 교복만 벗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면허를 따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고, 그 파란만장하다는 이혼까지 겪어내고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기분이었다.
아니, 어른은 어른인데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반쪽짜리 어른이라고 해야 맞을까?
장롱면허 8년 차, 생전 처음 운전의 공포를 압도하는 다른 공포를 만났다. 바로 결혼 3년 만에 남편에게 이혼당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두려움!
나와 아기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사이 3년 만의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은 것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게 운전 연습이었다. 혹시라도 이혼 뒤에 유럽에서 아기를 혼자 키워야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차를 몰 때를 대비해 이혼 뒤 매년 한국에 올 때마다 운전 연습을 했다. 때로는 엄마가, 때로는 아빠가, 그리고 때로는 동생까지 합세해 나의 운전 연습을 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차를 몰 수 없었다.
면허증을 갱신하고, 국제면허증을 발급받고, 독일 면허증까지 교환했지만, 그래도 나는 운전할 수 없었다. 이따금 남편에 대한 분노로 공격성이 한껏 차오르면 도로로 나가 액셀을 밟을 용기가 났지만, 그것도 누군가 조수석에 앉아 나의 운전을 도와줄 때나 가능했다.
왜 나는
운전을 하지 못하는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와 함께하는 유럽에서의 뚜벅이 생활이 버거워졌지만 여전히 나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운전은 정말이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정확히는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었다.
내 상황을 딱하게 여긴 독일인 친구 한 명이 내 생일을 맞아 갑자기 중고 자전거 한 대를 선물해 준 것이다. 그것도 뒷좌석에 예쁜 유아용 안장까지 장착해서 내가 타지 않을 핑계를 도저히 댈 수 없도록… 하….
마음의 준비랄 것도 없이 그날부터 나는 그렇게 무서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독일의 차도에서 발이 잘 닿지도 않는 자전거에 이제 갓 두 돌을 넘긴 아기를 태운 채 곡예운전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