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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리와날개 May 15. 2021

나는 왜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지 않은걸까

2015.07.31. 금요일

목요일 오후에서야 알았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아이가 화요일부터 아프고 특히 열이 펄펄 끓었는데..

나는 체온계가 없다는 이유로 아이 체온도 체크하지 않았고, 병원은 더더군다나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난 3일간 바쁘기도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을....



왜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면서 아이가 아픈데, 아이를 돌보고 병원을 가는 대신 아픈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볼 일을 보러 밖을 돌아다닌 것일까?



아는 언니가 진작에 병원에 가라고 했고, 체온계를 사서 아이 상태를 체크해보라고 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리고 목요일, 다른 분과 통화를 하며 왜 아이가 아픈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냐고, 왜 이런 상황에서 아픈 애를 데리고 집을 보러 다니느냐고 다그치시는 소리를 듣다가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 맞아.

애가 여태껏 이렇게 아픈데.. 나는 왜 병원을 안 데려가고 집을 보러 다녔지?



나... 왜 그런 거야?

애 엄마 맞아?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원인은 우리의 이상한 결혼생활에 있었다.



결혼이민자들이 보통 그렇듯 나 역시 독일어 한마디 못하는 채로 결혼해서 독일로 넘어왔고, 그로 인해 남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살았다.


 

보통은 결혼을 하고 독일에 살면서 점점 의지하는 부분이 적어지고 나중에는 동등해지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무언가를 스스로 하려고 하면 남편은 불편해했고, 나중에는 급기야 불쾌해하기까지 했다.

내가 뭔가를 하려 하면 할수록 남편과 싸움이 잦아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싸우는 게 싫어 남편이 하라는 대로 하며 사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중 하나가 아이 병원 문제였다.



아이가 처음에 태어났을 때, 조금만 심상치 않아도 나는 병원에 가고 싶어 했고 남편은 그걸 참 불편해했다.

어차피 병원에 가도 해주는 것도 없을뿐더러, 한국 사람들은 너무 오버가 심하다고 했다.

독일은 그렇지 않다며...



아기가 6개월 때 침대에서 떨어졌는데 응급실에 가려는 나를 남편이 못 가게 했었다.

일단 기다려보라고, 토하거나 울지 않는 이상 갈 필요 없다고..

아이는 결국 괜찮았다.



서랍 틈에 손이 끼어서 피가 났을 때도 너무 놀라서 아이를 데리고 약국에 갔는데 약사가 웃으며 이 정도 상처에는 바를 약도 없다며 그냥 돌아가라고 했었다.

호들갑을 떠는 내가 스스로 무안할 정도로 웃었다, 그 약사는...


 

8개월 때 예방접종 차 병원에 갔을 때 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주사를 맞혀도 되냐니 열만 없으면 상관없다고 병원에서는 주사를 놔줬다.

감기에 대한 처방은 전혀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내가 과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주변 아기 엄마들한테 물어봐도 한국 엄마들만큼 섬세하게 아기를 케어하는 독일 엄마들은 없었고, 다들 남편과 비슷한 대답을 했기 때문에 나는 남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기는 실제로도 건강하게 잔병치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병원에 갈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고, 아이 역시도 자가 회복력이 좋아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예방접종 말고는 병원은 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또 나는 어떤 일이든 남편에게 먼저 물어보고 상의를 했었다.

말이 상의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늘 남편의 허락이나 허가를 기다렸던 것 같다.

단독적인 의사결정을 한 적이 없었다.



냄비 하나를 사더라도 주말을 기다렸다가 남편에게 물어보고 인터넷을 통해 남편이 골라준 냄비를 남편이 결제해주면 나는 집에서 받아서 쓰기만 하면 됐다.



남편은 늘 나에게 겁을 줘서 나 스스로 뭔가를 하지 못하게 미리 막았다.

예를 들어 독일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섣불리 뭔가를 결정하거나 시도하면, 돈이 엄청 많이 들 거라던가, 아주 불합리한 대접을 받을 거라던가 하는 식의 과장으로 나를 겁을 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 당시에는 괜찮았다.



내가 아직 독일에 대해서 잘 모르니 남편이 나를 도와주는 건 당연하고,

내 독어 실력이 늘고 독일 사회에 익숙해지면 이런 문제들은 차차 사라질 것이며,

무엇보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우리는 가족인데 내가 남편의 말을 듣고 뜻에 따르는 게 우리에게 해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들이 나도 모르게 몸에 배어있던 것 같다.

남편의 지시를 받고 그가 하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제 더 이상 남편이 없는데도 나는 무의식 중에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렸나 보다.









지난 한 달간 내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산다고 좋아했는데, 나름 자유라고 누리며 좋아한 것들도 많았는데, 아기가 열이 난다는 예상치 못한 응급상황이 발생하자 내 머리는 마비가 되었고, 우왕좌왕하다 결국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게 당장 아픈 아기는 내버려 두고 건너뛰어 집을 구하러 다닌 것이다.



아기가 열이 펄펄 끓는 상황에서 체온계를 사고, 해열제를 사고, 병원을 예약하는 대신 나는 그렇게 엉뚱한 해결책을, 해결책이라 믿고 돌아다닌 것이다.



생각할수록 나 자신이 어이가 없고 한심했다.

아이가 아픈 상황에서 내가 대처한 과정과 왜 그런 대처를 하게 되었는지,

그 생각의 고리를 역추적하다 보니..

이건 마치...

가정학대 피해자와 패턴이 유사했다.



어찌 보면 나는 일종의 심리적인 학대를 받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언어폭력도 아니었고, 육체적 폭력도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스스로 서려고 할 때마다 나를 주저앉히고 스스로 걷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면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나를 그가 미는 휠체어에 앉히고, 말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하면서 결국 돌아보면 늘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나를 밀고 갔다.



그리고 이제 그가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내가 스스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걷긴 걷는데 스스로 걸어본 지 너무 오랜만이라 방향감각이 없어진 것이다.



이가 아프면서 나는 그걸 깨달았다.

아직도 나는 남편이 만들어 놓은 유리알을 깨고 나오려면 멀었다는 것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병원에 가기로 했다.

열은 내렸어도 귀는 멀쩡한 지, 목은 괜찮은 지 다른데 이상은 없는지 체크해보기로.



금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에 전화를 걸어 테아민을 잡았다.

아이 상태가 어떻냐길래 화요일부터 열이 났다고 좀 과장을 했더니 바로 예약을 잡아줬다.



병원에서 가서 검진을 해보니 귀가 살짝 부어있긴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열이 38.5도를 넘을 때에만 먹이라는 비상 해열제와, 오늘부터 당장 하루 세 번씩 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먹이라는 시럽 감기약을 처방받아 약국에 가서 바로 샀다.

그리고 체온계도 같이 샀다.



아이 상태가 엄청 좋아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열을 앓고 난 뒤인데도 큰 이상이 없다는 의사 소견을 듣고 나니 그것 자체로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는 다시 내 상식대로, 내 판단대로 아이를 키울 것이다.



이제는  혼자 이의 보호자이니까.

보호자로서, 엄마로서 의무를 다 할 것이다.





*표지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검색어 "Traurige Frau"

*이 글은 현재 사건이 아니라 2015-2018년 사이에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 원본과 사진은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frechda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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