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와이프로부터 정치 스킬을 배우다
미드 굿와이프 시즌6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 알리샤는 치열한 선거 공방 끝에 주검사장으로 당선되는 데 성공한다. 그녀가 당선되자마자 그녀의 주적이었던 전 검사장, 그녀에게 거액을 후원했던 사업가, 그리고 그 지역을 주름 잡던 마약상이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알리샤가 주 검사장이 됨에 따라 이득을 볼 수도 있고 보복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다. 전 검사장은 자신의 아랫 사람들을 그대로 고용해달라거나 옛 사건을 파헤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사업가는 자신이 지정한 사람을 부검사장으로 앉히라고 요구한며, 마약상은 자신이 수감되지 않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당선이 된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주변에서 정치적인 압박이 들어오는 것이다.
알리샤는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인간관계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뒷공작을 부릴 수 있는 수완조차 없다. 그녀가 주 검사장에 출마하게 된 이유도 정치적 놀음으로 돌아가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환멸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예전의 부패했던 검사장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에게 면전에서 대답한다. "아니요.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결정할 겁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알리샤는 후원자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당신 돈으로 당선된 건 맞지만 내가 하녀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들은 당연히 화가 나서 돌아갔고, 그 후 선거 매니저였던 일라이가 무슨 짓을 한거냐며 씩씩대서 알리샤를 찾아온다. 알리샤는 기존 정치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고 설명하지만 일라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렇게 되지 마세요. 당연히 자신의 결정을 따라야죠. 당연히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안 되죠. 하지만 그렇게 말해선 안 돼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요. 진실을 알잖아요. 마음 속에 있는 진실요. 공주님이 되는 것도 좋지만 그들한테는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들려주라고요."
"그게 거짓말인데도요?" 알리샤는 묻는다.
"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거짓말이 아니니까요. 계속 '네'를 말하지 않으면 '아니요'가 돼요. 그게 규칙이에요. 의심이 들어도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어요. 48시간 안에 결정할게요' 라고 해요."
"48시간이 지나서는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시간을 늘리든지요. 다시는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들은 '네'를 바라는 게 아니라 '듣고 있어요'라는 대답을 바라는 거예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려고요, '주 검사장이랑 말이 통해, 내 말을 잘 들어줘' 이렇게요."
나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의 대부분을 고지식하게 살아왔다. 내가 싫어하는 말을 들으면 바로 표정에서 그게 드러났고, 그걸 그 자리에서 바로 쏘아붙여야 직성이 풀렸다. 앞으로 내가 하지 않을 일에 대해서는 알리샤처럼 거짓말도 하지 못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라는 그 간단한 말을 하지 못하고 대답을 안 하거나 '저는 그렇게 안 할 건데요.' 하며 대화 분위기를 망쳤다. 상대방과 싸우게 되더라도 내 소신과 반대되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척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드라마 속 알리샤에게 더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할아버지댁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다같이 둘러앉아 할머니표 녹두전을 먹는데, 아들이 최고인 줄 아시는 뼛 속까지 K-할아버지인 친할아버지께서 나에게 많이 먹으라며 나를 챙겨주셨다. 순간 기분이 좋았는데 할아버지는 바로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그래서 건강한 증손주 하나 낳아라." 예전의 나였다면 바로 표정이 굳었을 것이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했을 것이다. 대답도 안 하고 속으로 '왜 결혼하면 당연히 애를 낳아야 하는데? 내가 애를 낳고 싶은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왜 할아버지는 꼭 저런 말을 하시지?' 하며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다. 그 사소한 말조차 가볍게 넘기지를 못 한다. 타협하는 방법을 모르고 항상 정공법으로 부딪힌다. 그리고는 이기지도 못한다.
그 대신 그 순간 나는, 얼추 나도 나이를 먹었다고, 이렇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낳아야죠. 결혼했으니까 이제 애 낳아야죠." 인생 매뉴얼이 있다는 농담조로 대화는 흘러갔고, 동생이 '애 다음에는 뭔데?'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럼 이제 둘째'라고 대답해 모두가 그 순간을 웃어넘겼다. 그 때 나는 알리샤와 선거 매니저인 일라이의 대화를 문득 떠올렸다. 일라이가 말한 것이 이런 것이었을까?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나 다시는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제스처를 바라는 것이다.'
예전의 부패한 검사장들과는 다른 검사장이 되고 싶다는 알리샤처럼, 내 소신을 지키며 살고 싶다고 생각한 나는 고지식하게 그리고 무식하게 문제에 정면대결을 한다. '네'라고 하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알리샤처럼 나는 내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하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믿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이런 방법이 항상 내게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 오히려 내가 손해를 보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가 있다. 정의감에 불타 항상 분노를 마음 속에 품고 세상과 정면대결을 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지만 다른 길로 우회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일라이 말처럼 '네'라고 대답했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어떻게 아는가? 그 순간에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다. '당신의 말을 잘 듣고 있습니다'라는 제스처를 주면서 나중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일라이의 정치 공작에 대부분 환멸을 느꼈지만 이 장면 만큼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어요.' 라고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이 글을 적는 지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서툰 고지식하고 딱딱한 나이지만 앞으로는 이 말을 잘 새기고 써 먹는 연습을 해보기로 한다. 덧붙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나도 나이가 들고 이제서야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