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2. 사랑과 결혼
<챕터 12 미리보기>
- 내 인생을 달달함으로 몇시간 채우고 싶다면 허쉬 파크로
- 내친구 앨리의 결혼
- 왜 디지털노마드에게 연애가 어려운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축하한다
***
와 나 빡시게 놀았는데, 또 놀 일정들이 있네? 가자 미국! 필라델피아 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간 상태. 비행기가 이렇게 늦을 걸 알고 있기는 했는데, 막상 너무 늦으니까 웃음이 나오긴 하더라. 도착하자마자 나는 친구 집으로 바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우버가 한참 동안 안 잡혔었다. 이게 도시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데 시간이 많이 늦으면, 기사들이 당연한 거겠지만 안 태우고 싶어 한다.
운 좋게 이제 막 우버 기사 활동을 시작한 친구가 다행히도 내 요청을 수락해서 한 시간 넘게 운전을 해주고 무사히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에 친구 집에 도착했다. 그때도 미안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더 미안하네. 무슨 민폐야, 그 시간에 도착하는 게. 내 친구 개비는 내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일어나서 문을 열어줬다.
“이 방에서 자고 아침에 다시 만나. 굿나잇!”
개비가 출근하는 날이 아니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상큼한 기분으로 시내로 나갔다. 나는 마켓을 유독 좋아하는데, 돌아다니면서 군것질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으면서 뭐 하고 놀지를 고민했다. 우리가 가기로 결정한 곳은 바로 허쉬파크! 허쉬초콜렛을 비롯해서 같은 계열사인 리스와 키세스, 엠앤엠 등 초콜렛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평소에 디지털노마드들은 관광객으로 지내는 것보다 현지인처럼 지내는 것을 선호하는데, 나도 마찬가지고, 이번에는 별 수가 없었다. 아니 관광객이 관광객답게 놀 때는 놀아야지~ 허쉬초콜렛 밀크쉐이크를 한 손에 들고 일주일치 당 충전을 한 번에 끝내버렸다. 초콜렛 기차, 브랜드 티셔츠, 세상에서 가장 큰 초콜렛, 브랜드 별로 다양한 초콜렛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달큰한 초콜렛향이 가득한 곳에서 초콜렛에 취해 몇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그 외의 날들도 개비가 너무 잘 챙겨줘서 노는데 안 피곤해! 아니 이게 어쩐 일이냐고요.
다음 일주일은 드디어 앨리의 결혼 리셉션! 앨리는 호주 이후로는 못 봤기 때문에 8년 만에 보는 거였다. 세월이 어떻게 이렇게 가지. 기차역에 마중 나온 앨리 얼굴을 보는데, 어떻게 넌 하나도 안 변했니, 그렇게 그대로니. 우리 시드니에서 다른 친구의 결혼식을 같이 갔었는데, 이번엔 너의 결혼 리셉션에 내가 와있다.
기차역에서 우리는 바로 리셉션을 할 장소로 향했다. 앨리가 확인할 게 있기도 했고, 아직 리셉션 준비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라서, 내가 지낼 곳에 데려다 주기 전에 들리자고 했다. 내가 뭐든 도울 게 있으면 도울 준비도 되어있으니 말만 해, 하는데 앨리는 웃는다. 시간이 8년이나 흘렀는데 안 흐른 것 같다. 기분이 이상해.
앨리가 나뿐 아니라 리셉션 참석하러 오는 다른 지역 친구들이 모두 함께 지낼 곳을 마련하기 위해 에어비앤비 빌렸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남편 이썬도 실물로는 처음 만나서 인사하고, 이썬의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리셉션이 있을 때까지 나는 앨리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이썬과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너는 뭘 보고 앨리가 남은 인생을 함께 보낼 네 짝인지를 알았어?”
“난 처음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그럼 엄청 어렸을 땐데?”
같은 동네에서 자라 서로를 아주 어릴 때부터 오래 알았지만 데이트를 하기도 전에 이썬은 앨리랑 결혼할 거라고 친구한테 말했단다. 이후에 십 대 때부터 앨리한테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딱지를 맞았다. 결혼할 것이라고 친구한테 말했던 것, 이미 알고 있었다는 그 느낌은 자만, 오만과 같은 그런 종류의 것 하고는 다르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바라는 것이 아니고, 내 깊은 곳에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썬은 그걸 따라갔을 뿐이라고. 배움에서 오지 않는, 이미 내 안에서 나에게 말하는 앎이라는 것을 느끼고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걸 따라가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이썬은 그걸 해냈다. 그리고 앨리와 이썬은 이제 함께다. 영원히.
앨리가 나와 호주에서 여행을 할 때에 앨리와 이썬은 잠시 헤어졌던 상태였다. 너네 헤어졌었잖아. 내가 앨리한테 물어보니까, 앨리가 그러더라. 결국엔 이썬하고 함께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대. 어렸을 때 데이트 신청을 안 받아준 건, 무서워서 그랬다고, 너무 일찍 시작하면 뭔가가 잘못되어서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날까 봐 그랬다고. 앨리 자신은 모험이 필요한 시간이 있었고, 이썬에게도 스스로 성장할, 그렇게 각자가 보내야 할 여정이 있었어서 그래서 앨리는 호주에 갔던 거고 그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이썬에게 돌아온 거라고.
그 둘의 깊은 사랑이 보여. 서로를 아끼고 서로를 돌보고, 내면의 앎이 서로를 향해 있다는 걸, 그 모습을 보니까 나도 사랑에 희망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런 결혼식은 처음인걸, 날 희망으로 채우다니. 디지털노마드로 지내면서 사랑에 대한 기대는 많이 줄어들었는데.
나는 원체 로맨스를 좋아한다. 로맨틱한 것도 좋아하고, 로맨스 소설도 좋아하고, 로맨스 영화도 좋아하고. 살면서 로맨스가 아예 없지도 않았고. 하지만 동시에 꽤나 잘 안다고 생각한다. 로맨스가 달콤하지만도 않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데에 파트너가 있다는 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상대방에게 commit 하는 것이 — 이게 우리말로 전념, 헌신 등으로 해석이 되는데 — 이 commitment 가 어떤 의미인지를. 연애와 사랑은 나도 잘 모르는 내 모습,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도 한 나의 모습도 드러내게끔 하는데, 물론 가장 큰 내면의 성장을 이루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고통이 수반되기도 하는 걸.
“사랑과 결혼을 축하하는 건 인간 밖에 없을 거야. 근데 난 이거 멋있는 것 같아.”
한여름의 펜실베니아에서 친구의 결혼이 나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생각을 모아보니 결국은, 이 자리에 사랑이 있고 내가 그 사랑을 이제는 다르게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목격하는 사랑이 왜 이전과는 다를까. 이전에는 별 감흥이 크지 않았는데, 지금은 결혼한 이 친구들 앞에서 기쁨, 슬픔, 행복, 감사, 희망, 영감 등 감정이 하나로 뭉친 공이 되어서 내 안에 굴러다닌다.
디지털노마드 데이팅 현장은 솔직히 좀 별로다. 쉽지 않아. 누구 하나 진득하게 머무르는 이가 없고, 다들 자신의 여정을 걸어가며 사랑을 위해 여정을 변경할 여유가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겹치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 빠르게 빠지고 빠르게 빠져나가는 이들도 많이 본다. 상대방을 알고 배우는 데에도 추가적인 다양한 한계가 생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의 토양에 씨앗을 뿌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그런데. 그런데도 앨리와 이썬을 보니 지금처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는 생각이 든다. 앨리랑 이썬도 완벽하지 않은데 서로를 선택했다. 앞으로 백만 년을 살아도 모든 게 완벽할 날은 오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 함께 하기로 했고 같이 겪어나가기로 했으니까. 그게 Commitment 지. 그 약속의 무게. 많은 디지털노마드들이 두려워하고 피하는 단어.
디지털노마드들의 데이팅이 왜 별로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많은 디지털노마드들은 대체적으로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건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여러 다른 면에서도 통하는 부분인데, 생각을 해보자. 디지털노마드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자유다. 이 자유는 장소의 자유, 시간의 자유,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자유다. 내가 디지털노마드로 살면서 뭐가 제일 좋냐고 질문을 한 친구들 중에 백이면 백 자유 이야기를 안 하는 애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연애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연애를 하면 못 갈 수도 있다. 항상 나 혼자 쉽게 결정하던 것을 이제는 연인과 조율하게 된다. 이 사람은 나와는 기준이 다를 가능성이 크겠지. 새로운 곳을 가는 걸 좋아하나? 안전에 대한 개념에 차이가 있나?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가 다른 곳에 가고 싶어 하면 떨어져 있다가 만나나? 디지털노마드들은 당장 한 곳에 있는 곳도 싫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인데, 한 사람에게 자신을 맨다는 것은 구속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런데 이 안에서 사랑하고 연애할 사람을 찾는다고? 거 쉽지 않지.
그렇다고 현지인과 연애를 하는 게 대안이 되기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게, 어차피 길어봤자 몇 달 뒤면 떠날 텐데, 마음을 얼마나 줄 수 있겠어? 하고 생각을 하면 관계가 발전이 되지 않는 거다.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상대방을 들여놓을 수 있겠냐고요.
그리고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 빠르게 빠지는 것보다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고 결정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처럼 코리빙에서 생활을 많이 하는 경우에는 같이 살다 보니 천천히가 ... 잘 안된다. 같이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밌지만 나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위해 조금은 떨어져 있고 싶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데 너무 24시간 붙어있게 되니까.
나는 결혼을 필수로 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자녀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 글을 정리하는 시점에서는 아이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 신기하게도 20년 만에 바뀌어있다.) 하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지금의 이 마음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아니면 그대로일지 미래야 나는 모르지만, 내가 그저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감정들을 빼놓지 않고 다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고 온전히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다 보듬을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오는 감정들을 다 환영한다. 반겨줄 거야. 그렇게 살고 있어야지. 나와 함께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 언젠간 나타나겠거니, 그 길이 내 앞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나는 사랑을 해야지.
나를 사랑하고,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 친구를 사랑하고, 지구를 사랑하고, 이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도 사랑하고. 삶도, 삶도 사랑해야지. 사랑을 하자. 사랑을 축하하자.
<챕터 12 에서 빠진 에피소드들>
* 파머스 페스티벌
* 한식대전
* 랭캐스터 마켓
* 앨런타운 맛집탐방
* 필라델피아 메이저리그 경기 - 오타니 최고 짱짱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