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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Oct 22. 2019

비밀이 생기면 나는 조용히 소설을 씁니다

난임 일기. 나의 난임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을 때

내 생에 첫 습작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


돈 넣고 돈 먹기. 돈넣고 돈 먹기. 날이면 날마다 오는게 아니야.
자아 종이컵은 세 개 이 중 진짜는 하나 가짜가 둘.
어때, 어떤 컵에 진짜가 들어 있는지, 너는 맞출 수 있겠니?

*
"나 요새 소설을 하나 쓰고 있어."
따지고보면 뭐 대단히 놀랄만한 사건은 아니었는데도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너는 오후 세시, 하루 중 가장 분주하고 정신 없는 시간에 나를 탕비실에 불러 한참을 아껴왔던 고백을 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오른손에는 커피포트를, 왼손에는 종이컵을 들고 무심해 보이는 얼굴 사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소설의 제목은 야바위. 첫 소설 치고는 나름 대담하게 2인칭으로 서술했다. 소설 속의 '너'는 실제로 내가 12년을 베프로 사귀었는데 5년 전에 나에게 절교를 선언한 친구를 모델로 했다. 무엇이 되었든 일처리를 깔끔하게 했던 나의 소중한 친구는 그 절교 선언 이후로 나와의 인연을 일절 끊었다. 나는 소설 속으로 친구를 불러내었고, 그녀에게 끝까지 말하지 못한 말을 전할 수 있었다. 한글문서 함초롱바탕체 폰트 크기 10으로 문단과 문단 사이 한 줄 띄어쓰기 없이 11페이지를 채웠다. 그 페이지들 속에서 딱 한 문단이 내가 말하고 싶은 진실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허구였다.



내가 위에 언급한 소설 속 문단을 쓴 건 2017년 8월이었다. 평생 글이라고는 일기나 간단한 책 리뷰밖에 쓰지 않았던 때다. 나 혼자 쓰고 기록해둘 글이라 문장보다는 메모에 가까웠다. 책 리뷰는 대부분 '재밌었다'나 '어려웠다'가 등장했다가 발췌를 옮겨 적는 것으로 끝이났다. 독자를 고려한 에세이 한 편 제대로 써보지 못했을 때에 나는 소설부터 시작했다.


내 삶의 부분 부분들이 난임의 과정들로 기억되는 건 참 별로다. 그럼에도 17년 8월을, 내가 난임 병원에서 당시 마지막일거라 생각한 일곱 번째 과배란 시술을 시작했던 시기로 기억하는 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이번에 안되면 진짜 인공 수정이나 시험관을 시작하는 거야,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나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말 없이 앉아서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나를 보니 이젠 내 이름을 외우는 담당 간호사, 대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부부, 나처럼 여러 번 병원에 왔는지 혼자 무심히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그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난임을 겪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들에게는 언제쯤 아기가 찾아오게 될까.


아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붙잡고 말을 걸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었다. 동병상련의 입장이니까, 들어주고 이해해줄 것 같았다. 당시는 나는 내가 난임이라는 사실이 괜히 나에게 흠이 되는 비밀만 같아서, 친구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내가 병원을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던 때였다. 내가 난임 병원을 계속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온 세상에 내 남편과 친정 엄마, 친정 아빠밖에 없었을 때였다.



그래서 무작정 소설을 떠올렸다. 아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리라 다짐했다. 친구들은 모두 육아로 바쁠 때 혼자 비밀스럽게 난임 병원을 다니는 여성의 이야기, 그러니까 나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물론 난임 병원을 다닌다는 설정을 제외하고 인물, 사건, 배경 모두 허구로 채울 예정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이야기를 나는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노트북을 켜고 내 이야기를 적으려니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인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 들었는데, 자꾸만 몰입이 되어 내 진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얼마 쓰지 않은 내용을 모두 지웠다. 화면이 다시 흰 공백으로 가득찼다.


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진짜 마음을 다해 난임을 다룬 소설을 쓰자 다짐했다. 그렇게 처음 생각난 소재가, 5년 전 나와 절교했던 나의 친구와의 이야기였다.


첫 소설 야바위를 쓰고 나서도 나는 몇 편의 습작을 더 시도했다. 알고보니 나에게는 숨겨놓은 비밀이 너무 많았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우리 가족의 어두운 구석,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과 실패 경험들, 결혼을 하고 나서부턴 모두 비밀로 묻혀진 전남자친구들과의 일화들, 언젠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와 어수선을 떨며 헤어졌던 그 때 그 장면. 내 삶에 있어 가장 씁쓸했던 순간들과 치부가 되었던 약점들이 모두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비밀이 깊을수록 소설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았다. 진실을 담은 한 문단을 쓰기 위해 나는 소설을 썼다.



난임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주위의 친구들과 가까운 직장 동료들은 내가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렇게 브런치에 난임 일기도 쓰고 있으니, 더 이상 소설 속에 애써 숨기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 속에 여전히 많은 비밀을 보유하고 있다. 말해서는 안되는 일들과 말하고 싶지 않은 말들, 굳이 드러내지 않고 싶은 비뚫어진 마음들까지.

이 비밀들을 온전히 내 안에서 삭힐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조용히 소설을 써야만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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