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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Nov 15. 2019

속초의 땡볕 아래 냉장보관 시험관 주사 들고 다닌 날

난임 일기. 시험관 신선 3차 에피소드



남편과 나의 삶에서 임신 준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그 증거로 올 해는 결혼 후 일 년에 꼭 한 번 이상은 갔던 해외여행을 포기했다. 작년에는 시험관 신선 2차 직전에 충전하자는 취지로 11박 12일 미국 서부 여행을 다녀왔는데, 올해는 쭉 한국에만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지는 않았다고 여행 자체를 아예 하지 못했다고는 할 수는 없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고 딱 좋은 6월에 우리는 속초에 다녀왔다.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남편 친구 부부와 1박 2일로. 공교롭게도 시험관 3차 신선 시술이 시작했던 첫날에 말이다.


계획적으로 시기를 그렇게 맞춘 건 당연히 아니다.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리조트 할인 혜택을 받아 한 달 전 먼저 숙소를 예약했는데, 공교롭게도 여행 전 주에 생리가 터졌을 뿐이다. 여행 3일 전,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초음파로 몸 상태를 확인해본 후 신선 3차를 시작하기로 했다. 다만 피검사 결과까지 문제가 없다는 확인을 받은 후에 본격적으로 주사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그 결과를 여행 첫날인 토요일 점심시간에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다. 나는 주사를 맞아야 할지 맞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 채 이틀 치 주사를 여행 준비물로 챙겨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전날 짐을 싸며 나와 남편은 난관에 봉착했다. 우선 함께 여행을 가는 친구 부부에게 우리의 시험관 시술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문제 하나, 들고 가야 하는 고날에프 주사가 냉장 보관이 필요하다는 문제 하나, 그리고 숙소가 속초 바다와 30분 정도 떨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속초 여행은 남편 친구네 차를 타고 가기로 했는데, 새벽 일찍 출발해서 정오 전에 도착하면, 바다도 보고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하다가 오후 늦게 숙소에 체크인을 해야 동선이 효율적으로 나왔다. 주사를 빨리 냉장고에 넣어야 하니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30분 거리의 숙소에 먼저 들렀다가 나오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결국 6월의 땡볕을 받은 차 안에서 계속 몰래 주사기를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답이 나왔다. 병원에서 피검사 결과 전화를 받으면 바로 가까운 화장실로 갈 수 있도록.


고날에프 주사와 소독솜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속초 여행 표 시험관 주사 샌드위치다. 제조 방법은 아래와 같았다.

1. 마켓컬리에서 받은 얼음 팩 2개를 밤사이 냉동실에 넣어 꽁꽁 얼린다.

2. 여행 아침 당일, 고날에프 주사를 챙긴다. 위의 사진처럼, 종이 상자 안에 들어있다.

3. 얼음팩 2개 사이에 고날에프 상자를 끼운다.

4. 얼음팩과 고날에프가 분리되지 않게 전체를 씌운다. 다만, 필요할 때 주사는 바로 빼야 하므로,
    위아래는 뚫린 상태에서 몸체만 칭칭 감는다.

5. 얼음팩과 고날에프를 둘러싼 랩 위로 노란 고무줄을 하나 끼운다.

6. 검은색 비닐봉지로 감싼다.

7. 남편이 수영 갈 때 수영 모자와 물안경을 넣고 다니는 방수 가방에 비닐봉지를 담는다.

8. 참 쉽죠? 완성!



시험관 주사 샌드위치를 담은 방수 가방은 다행히 한 여름의 하루를 차갑게 버텨내었다. 점심으로 간 막국수 집에서 나는 병원의 전화를 받았고, 피검사를 통과했으니 바로 주사를 맞으라는 미션을 전달받았다. 곧바로 소중한 방수 가방을 들고, 근처 화장실로 들어가 내 배에 주사를 투여했다. 첫째 날 주사를 무사히 놓은 후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나는 다시 얼음 팩과 상자를 단단히 고정하고 나왔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얼음이 녹을까 신경이 쓰였지만, 그럼에도 속초의 바람에는 서울의 바람과 묘하게 다른 시원함이 있었다. 남편과 오랜만에 본 바다는 역시 넓었고, 함께 바다를 볼 때 나는 주사를 조금은 잊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숙소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나는 샌드위치를 분해해 얼음팩만 빼서 냉동실에 넣었고, 고날에프 주사는 검정 비닐봉지 안에 다시 넣어 냉장실 깊숙이 넣었다. 동행한 친구들에게 속 시원하게 밝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애써 꽁꽁 숨기는 것도 어쩌면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있잖아요, 그때 우리 갔던 속초에서 제가 방수가방 하나 들고 다니던 거 기억나나요? 그걸로 우리가 이 아기를 만들었잖아요, 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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