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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Oct 21. 2019

증상놀이를 대체 누가 놀이라고 했나요

난임 일기. 증상놀이라 쓰고 희망고문이라 읽는다

숨을 고른다. 온 몸의 에너지를 모아서 자궁이 있을거라 추측되는 배 아래쪽에 집중시킨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뭔가 찌릿하는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어쩌면 임신일 수도 있을까.



매 번 남자를 믿고, 매 번 남자에게 배신당하는 순진한 여성을 생각한다.

이번 남자는 분명히 달라. 왜냐하면,

- 이 남자는 술을 즐기지 않으니까 - 이 남자는 주말에 꼭 하루는 나에게 시간을 내주니까 - 이 남자는 데이트 후에 매번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니까 - 이 남자는 나랑 싸워도 항상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주니까 - 이 남자는 나에게 비싼 선물을 줬으니까


이 남자를 믿어도 된다는 증조는 수두룩하다. 그러나 어김없이 기대는 예상을 빗나간다. 다 한 때일 뿐. 남자는 곧 여자를 떠나가고, 홀로 남겨진 여자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끼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계속 진정한 사랑을 기다릴 것을 알고 있다.


이건 내 얘기다. 물론 나는 이미 결혼을 했다. 진정한 사랑 비슷한 남자를 만난 거 같기도 하다(아마도 그렇다). 나를 매 번 가차 없이 배신하는 건 '임신 증상'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믿어도 될 거 같은데, 라고 순진하게 속아본다. 그런데 늘 아니란다.



분명히 네이버 카페에서 그랬다.

 

제 임테기 좀 봐주세요.

(두 눈으로 봐도, 한 눈으로 흘겨 봐도 여지 없는 선명한 두 줄이다.)

이거 임신 맞나요? 이번에 제가 느낀 증상은요,

A. 시도때도 없이 졸렸구요

B. Y존에서 가끔씩 통증이 있었구요 (밑이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C. 배 아래 자궁 있는 쪽이 쿡쿡댔구요.

D. 배에 가스가 차고 방귀가 나왔구요.

E. 가슴 쪽 통증이 있었구요.

F. 기초 체온이 상승했어요.


-

여기서 A~E까지는 비임신이었을 때도 내가 매번 느꼈던 것이다. 특히 A. 임신도 아니었으면서 피검 며칠 전부터는 정말이지 하루종일 어찌나 졸립고 피곤했던지. 어떻게 보면 정신 승리다. 나는 내가 정신력만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스스로를 졸리게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B, C와 E의 경우 내가 내 신경세포까지 제어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케이스였다. 하루종일 해당 부위에 온갖 신경을 쏟고 있으면 된다. 마침 생리 전에다 시험관 시술 이후 호르몬을 조절한다고 매일 아침 슈게스트 주사도 맞고 하루 세 번 프로기노바 약정도 챙겨먹고 있으니 내 몸도 잠시 응해주는 것이다. 임신 증상 한 두 번쯤은 나타내주면서 간절한 나에게 잠시의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고 의미 없다.


유일하게 정량적이고 나름 과학적인 증상은 F이다. 기초 체온을 그래도 체온계에서 분명한 숫자로 표시되니까. 그래서인지 여태껏 단 한 번도 기초 체온이 상승한 적은 없었다. 그럼 내가 진짜 임신하게 되면 기초 체온이 올라가려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은 6차 시험관 시술, 5일 배양 이식 6일차이다. 피검은 4일 후지만, 만약 임신이라면 지금 임테기를 해봐도 흐릿하게나마 결과가 나올 때이다.


이번에 두드러지는 증상은, 민망하게도 D이다. 하루종일 배가 꾸르륵 꾸르륵 한다. 온몸의 신경을 다시 한 번 배꼽 아래 쪽으로 곤두세운다. 아마도 배가 쿡쿡 하는거 같기도, Y존이 살짝 아플락 말락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기초 체온은 되려 35.6. 원래 이렇게 낮은게 정상인가 싶어 헛웃음이 난다.


수 백번 칼같이 한 줄만을 보여준 임테기를 두고서도 늘 믿으면 안되는 증상에 기대고 있다. 이번에 또 속을 걸 알면서도. 가장 피하고 싶은 진실은 일단 외면하고 싶으니까, 이 불안할 마음을 기댈 곳은 믿을 수 없는 이 증상들 뿐이다.


이걸 누가 증상 '놀이'라고 명명한거야. 나는 하나도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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