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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레바람 Oct 21. 2019

피검 날을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

난임 일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아요

1번 시나리오 :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하와이. 12월에 나는 남편과 하와이에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5kg는 더 뺀 몸으로, 치마자락이 길고 찰랑찰랑이는 맥시드레스를 입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허벅지가 살짝 비칠 수 있게 치마는 랩 스타일로 은밀하게 트여있어야겠다. 오전 아홉 시 반쯤, 호텔 조식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일어나 세수도 안 한 상태로 남편과 호텔 로비로 달려가야지. 낮에는 바닷가에서 썬베드 하나 잡고 쨍쨍한 태양 아래에서 온종일 책을 읽을거야. 바닷물의 소금 냄새를 맡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나 [해변의 카프카]를 다시 읽어야지. 어쩌면 이 기회에 그 동안 벼려왔던 [까라마조프 형제들]과 같은 대작을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 점심 시간은 따로 챙기지 않고, 출출할 때 아무때나 햄버거나 피자를 시킬거다. 


아, 물론 알코올 찐한 칵테일도 함께.



2번 시나리오 : 

목요일 오후 점심 시간. 피검 결과를 전화로 안내 받는 시간이다. 이때 나는 회사 사무실에 있겠지.


"축하해요. 임신이시구요. 수치도 100이 넘어 안정적이에요."


그 동안 5번의 시험관의 피검 결과를 얼굴도 모르는 간호사를 통해 전달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담당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축하해요,를 듣기 전부터 나는 내가 임신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2017년 1월부터 나와 함께 했던 원장님의 목소리에서 떨림과 흥분이 느껴졌으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 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흘린다. 팀원들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지만,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운다.



아, 2번 시나리오를 더 나중에 쓰다 보니까 너무 행복해져서 (그러면서 이뤄지지 않을까봐 지레 슬퍼진다)

1번 하와이의 시나리오가 묻혔다. 


다시. 


1번 시나리오 추가 : 하와이 하면 지오반니 새우트럭이지. 버터갈릭이 죄책감 느껴질 정도로 느끼하게 들어간 오동통한 새우. 추릅. 여기에는 시원한 맥주를 곁들일 것이다.

저녁에는 미리 예약해둔 호텔 내 스파를 가서 남편과 커플 마사지를 받을 거야. 두 시간동안 인도 요가 음악 비슷한 이국적인 배경음을 들으면서 잠시 졸기도 해야지. 목과 어깨, 등, 허벅지, 발까지 향이 좋은 오일로 미끈미끈해지면 개운하게 일어나 이름 모를 허브티를 마실거야. 




시험관 이식을 하고 피검까지의 기간. 3일 배양 수정란을 이식했을 경우는 보통 12일, 5일 배양의 경우는 10일 정도의 기다림의 기간이 필요하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의학적인 조치는 모두 받았다 . 이제는 집에서 주사를 놓거나 약을 먹으며 겸허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기다리고 기도한다. 내 배 속에서 수정란이 무사히 착상하기를.


이 기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평상 시처럼 출근을 해서 내 몫의 일을 하나 하나씩 쳐내가는 것도 방법이다.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면, 가만히 누워만 있기 보다는 차근 차근 책을 읽던가, 아니면 아예 [가십걸] 같이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미드를 시즌1부터 정주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그걸 실행하는 건 어려운 법. 기다림이 간절할수록 마음도 초조하다. 마음을 비우라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내가 조언을 해줬을 때는 참 쉬웠는데 내가 그 입장이 되니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임신이 되었을 때의 시나리오를 머리 속에서 작성하고,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에 펼쳐질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머리 속에서 그려본다.


어느 쪽이든, 상상만 해도 즐거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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