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가 좋아
혹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 있는가?
나에게는 '책'이 그중 하나이다.
책을 읽는 것과 별개로 그냥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한다.
특히 여러 권의 책이 착착 쌓여 있거나
책이 모여있는 공간에 들어서면.
그 공간의 분위기가 바뀐다.
왠지 모를 따듯한 느낌으로.
책은 시각적으로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나는 책을 사는 행위도 좋아한다.
역시나 책을 읽는 것과 별개로
"언젠가는 내가 다 읽어주마"
하는 근거 없는 책부심(책을 읽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짜릿한 책 쇼핑을 하기도 한다.
나는 왜 책을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활자가 주는 자유로움과
그 아날로그 함일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매년 독서량이 최저치를 달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프를 보면 위아래, 왔다 갔다 하는 거 없이,
그냥 쭉 아래로 내려만 간다.
나는 그 그래프를 보면서 씁쓸하고도 슬펐다.
이 그래프는 그저 독서량이 줄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서량이 줄어드는 것은 여러 가지 있유가 있을 수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생은 공부하느라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하고,
성인은 일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다 한다.
핑계라면 핑계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지만 분명 틀린 말도 아닐 터.
우리 모두 너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리고 책 읽는 것보다 재미있는 게 너무나 많아졌다.
스마트폰 하나로 여러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그리고 재미있고 중독적인 컨텐츠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뿌려 치기 힘든 마력을 갖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기존의 것은 죽기 마련이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라디오만 있던 시절 비디오가 처음 생겨났을 때 사람들이 하던 말이다.
통계청의 그래프가 언젠가 정말 바닥이 치는 날이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봤다.
정말 이 세상에 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날이 오기도 할까?
격변하는 세상 속에 무엇이든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한다면,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책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목적성 독서의 여정이 끝난 뒤,
나는 방목형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얻으려는 부담감 없이,
그리고 안 읽힌다면 억지로 다 읽으려고 하는 거 없이,
자유롭게 읽었다.
방목형 독서의 첫걸음은 도서관을 가는 것이었다.
읽어보고 싶은 책을 다 사기에는 금액적으로 부담이 있기도 했고,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집에 산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한 번을 가볼 생각을 못했을까.
내가 간 도서관은 '이진아도서관'이라는 곳이다.
큰 시립 도서관에 비하면 정말 아담하다.
서대문공원과 안산 근처에 있어 작은 도서관이지만 가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각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도서관에 와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일 이 시간에 다들 도서관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책이 있는 열람실 문을 열었다.
여긴 더 고요한 공간이었다.
활자들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서만큼은 모두가 휴대폰이 아닌 책을 보고 있다.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책을 필요로 하고 책을 읽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단순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공동체가 된 느낌이었다.
비디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를 틀어 듣는 공동체.
트렌드를 파악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뒤쳐지면 큰일 날 것처럼.
나는 나의 옛것을 좋아하는,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성향이 부질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최근에 뜨고 있는 아이돌이 누구인지
유행하는 챌린지가 무엇인지에
별로 관심 없는 내가 답답했다.
"이러다가 뒤쳐지려고 그러는 거야?"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벌써 그러는 거야?"
그런데 사실 그 보다 더 한 수 위인 것은,
트렌드를 만드는 것이다.
흐름에 따라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흐름을 역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금은 한다.
나에게 시간적 자유가 어쩌면 가장 많이 주어진 시기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아직까지는 부모님과 같이 집에 살고 있고,
나이가 어리진 않지만 그래도 젊다면 젊은 나이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걸 이뤄내고도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젠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것을 취향, 그리고 신념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그런.
이 좋은 것들이 모이면 나의 색깔도 더 짙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아주 잘되면,
흐름을 역행해 나만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P.S. 이 글의 배경화면은 얼마 전 갔던 <슈타이들 북 컬처: 매직 온 페이퍼> 전시에서 찍은 사진이다.
비디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를 듣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추천하는 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