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男) 다른 아빠의 육아 도전기 - 2. 결혼하고 아기가 태어났다.
"엄마는 무슨 일 하는지 알아?"
"엄마는 학교에서 일하지~"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다. 아이들에게 엄마는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니 학교에서 일한다고 대답한다. 아빠는 뭐하는지 물어보니 ‘설거지하고, 가끔 일해’라고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묘했다. 웃었지만 웃어도 되는 건지 헷갈렸다. 두 아이 육아를 전담한 지 3년이 넘었다. 마지막 직장을 쉬면서 본격적으로 애들을 봤다. 그때 첫째가 7살, 둘째가 3살이었다. 2022년 현재, 5년이 흘렀다. 아이들이 많이 크면서 자기 생각도 확고해지고 말도 논리적으로 잘한다.
아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는데, 제일 첫 단어가 ‘설거지’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매일 설거지하는 내가 기억에 박혀있을지도 모르겠다. 삼시 세 끼를 집밥으로 먹으면 설거지거리가 많다. 식기세척기가 없을 때는 하루에 3번, 1~2시간은 설거지 시간이었다. (지금은 식기세척기가 있어서 시간은 많이 줄었다.) 그런 모습을 본 아이들 입에서 ‘설거지’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며칠 후에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물어보니 기억을 못 한다. 큰 의미 없는 대답이었나 보다. 첫째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니 조금 안심됐다.
노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경제활동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건 (아마도) 99%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나도 일을 했다. 지금까지 딱 2개의 회사를 다녔다. ‘석공사’와 ‘재무설계회사’다.
처음으로 취업한 회사는‘석공사’다. 처음에는 건축설계사무소인 줄 알았다. 입사 첫날 알고 보니 석공사였다. 이름만 설계사무소였다. 해외사업부에서 일을 하다가 현장 인원이 필요해 전라도 광주 현장으로 가게 됐다. 현장 근처 모텔에서 숙식을 하면서 일을 배웠다. 그 당시에는 지방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서울에 있는 사무실에서 출퇴근하면서 일을 하고 싶었는데,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였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태도는 비관적이었다. 내가 왜 광주에 있는지, 이 일을 하는 게 맞는지 등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때는 일 끝나면 저녁 먹고 티브이 보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 주말에는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차라리 신나게 놀기라도 했으면 아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 자체를 비관하면서 이 회사에 왜 들어왔을까,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등 후회만 했다. 하루 종일 부정적이다 보니 생활이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라면 상황에 맞는 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발전하는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현장에 약 1년 정도 있었는데,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현장이 마무리될 때쯤 서울 현장에서 일을 했다. 서울로 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결혼한 후에 많이 긍정적이 되고 책임감도 생겼다. 하던 일이 좋아진 건 아니다.
두 번째로 일한 곳은 ‘재무설계회사’다. 석공사를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적성에도 맞고 시간도 자유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적성이 맞는다는 게 어떤 걸까 고민하다가 적성검사를 받았다. 아는 형의 추천을 받아 지문으로 적성을 찾아내는 적성검사를 받았다. 반신반의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다양한 성격에 대한 퍼센트가 나왔고 그것을 토대로 나에 대한 적성이 평가되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특성은 ‘모방성’이다. 여러 성격 중에 최고점이 나왔다. 그걸 보면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내세울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나에게 맞는 다양한 직업이 있었고 그 안에 ‘재무설계사’가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직업이라 어떤 일이지 궁금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시간이 자유롭고 능력만큼 버는’ 직업이라는 말이 제일 많았다. 흥미가 생겼다. 찾아보니 자격증이 필요했다. 관련 학과를 나오거나 공부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을 쉬는 동안 자격증을 땄다. 합격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여러 회사를 찾다가 한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다.
일은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듣고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너무 몰랐기에 회사에서 알려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배웠다. 괴리감에 일에 대한 고민도 많았지만 ‘일단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다. 내가 직접 고객을 만들어야 했고 모든 것이 내가 하기 나름이었다. 내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한 결과만큼 벌었다. 열심히 일을 했다고 생각해도 결과가 없으면 수입은 없었다. 수입이 ‘0’인 달도 있었다. 일하는 건 재밌었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야기도 하고 도움도 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시간 관리를 스스로 하기에 자유로움도 느꼈다. 팀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즐거웠다. 수입이 많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돈을 많이 벌고 다른 사람한테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정말 성실하게 일했다. 회사에서 일정 기간 동안 매일 7시부터 하는 교육이 있었는데 한 번도 지각하지 않고 참석해서 선물을 받기도 했다.
둘째가 태어났고 책임감이 커지면서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졌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생각만큼 결과는 안 나와서 힘들었다. 성실하고 노력은 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과 고민을 얘기하는 것이 어렵다. 그 성향이 일할 때도 나타나서 팀원, 팀장님과 소통이 적었고 피드백도 거의 없었다. 그때는 혼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만심이 강했다. 그것이 독이 되었다는 것은 한참 후에 깨달았다.
둘 다 3년을 조금 넘기고 그만뒀다. 어떤 일이든 3년은 일해봐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3년이면 그 직업에 대해 알거라 생각했다. 3년씩 해보니 기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냐에 따라 내가 얻는 것이 달라짐을 알게 됐다.
생각해보면 서로 관련 없는 일에 도전을 많이 했다. 토목과를 졸업해서 석재회사에 다니다가, 금융일을 했으니 하나도 연관성이 없는 삶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겠다. 지금은 육아를 하면서 (가끔) 인쇄일도 하고 있다. 대부분 육아에 많은 시간을 할애 중이다. 육아는 보수는 없지만 두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 일이니 직업이라 해도 된다면 세 번째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전히 나는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들 기억에 아빠의 어떤 모습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아빠에 대한 기억 속에 ‘설거지’만 있는 모습은 아니기를 바란다. 설거지‘도’ 있고 너희들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것, 지금 보이는 아빠가 전부가 아니란 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