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뿡뿡..."
완행 기차는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철길을 달렸다.
아직도 학교는 축제 기간이다. 어제의 일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에 번쩍번쩍 떠오른다.
뜨거웠던 그 입김. 그의 요동치던 숨소리. 경윤이 내 귓가에 꿈처럼 속삭였던 말. 영석이 달려와 나를 잡았던 순간. 경윤의 팔짱을 끼고 반짝이던 조명을 바라봤던 순간. 그리고 다시 경윤의 입술. 달콤함. 다시 되돌려 합창이 울려 퍼지던 운동장.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여느 20살이라면 아마도 그 첫 키스의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밤잠을 설치고 오늘 남자 친구와 뭐를 할까 고민하거나 잘 들어갔을지 그가 오늘은 어떤 옷을 입고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고 데이트를 할지 고민할지 모른다. 그게 적어도 순수한 20대들의 마음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떠나는 기차에 올라있었다. 불과 하루 만에.
내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축제를 피하려 강원도에서 열리는 야외 설치미술제에 신청을 했었다. 여기를 신청할 때만 해도 아무도 갈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가고 싶었다. 여기는 교수님들이나 되는 사람이나 축제를 즐기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이 오는 곳이니까.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헤어지는 경윤에게 손을 잡고 말했었다. 일주일 동안 연락이 안 될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다고. 전시가 전행되는 동안은 나는 강원도 산골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산골은 전화가 되는지 안 되는 지도 모른다고.
강원도 산골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하신 작가분들과 마을 어른들께서 마중을 나와계셨다.
"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교수님."
" 오랜만이에요. 작가님 그간 평안하셨죠?"
" 먼 길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다른 작가님들도 밤에 도착한다고 연락 오시고 내일 아침에도 오신다고 하니 그동안은 좀 쉬시면서 마을 구경도 하고 하시죠."
이장님께서 반갑게 교수님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자 교수님께서는 곁에 서 짐을 챙기던 조교샘에게
" 조군 미소양 숙소 좀 안내해주고 나랑 좀 걷지. "
그러자 조교샘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 교수님 짐 푸는 것 좀 도와드리고..."
그러자 교수님께서는 손사레를 치시며,
" 아 난 괜찮아. 한 두해 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 우리 별장도 있으니까. 다녀오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며 이내 조교샘의 등을 떠밀었다. 그런 교수님을 뒤로 조교샘과 나는 앞에 보이는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여기야. 여기 짐 풀면 되고. 저녁에는 밖에서 바비큐파티가 있을 거야."
숙소로 안내받은 곳은 펜션인 듯했다. 안내받은 방을 보자 혼자 쓰기에는 제법 큰 10인용은 족히 되어 보이는 공간.
" 여기 제가 혼자 쓰기엔 너무 넓은 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조교샘은 이내 웃으며
" 응? 못 들었어? 밤에 후발대 선배들 오잖아. 4학년들이랑 졸업한 작가선배님들. "
당황한 나는
" 아. 저는 재학생은 저만 신청한 줄 알았어요. "
그러자 조교샘이 머슥해 하는 나를 보며 웃으시고는
" 아 1.2.3학년 중에는 너만 신청했지. 어쩌겠어. 어색해도 졸업한 선배들이니 잘 좀 챙겨드려."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먼저 자리를 떴다.
공식적인 설치 전 시작은 내일이었다.
하지만 일정상 교수님께서 선발대로 하루 먼저 출발하신다는 조교샘의 연락을 받고 나도 기꺼이 같이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나니 오히려 축제로 인해 난감한 자리는 피하겠다 싶어서 나는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다들 교수님과 동행하는 이런 전시는 재학생들이 반드시 가야 하는데 누가 축제 기간을 빠지면서 동행하고 싶으랴. 그래서 내가 간다고 나섰고 모두 나름 안도하며
" 그래. 잘 생각했어. 뭐 너 하나 없다고 학생회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 축제기간에야 1학년은 순번대로 돌아가는 거니까. 잘 있다가 니 순번이 되면 말할게. 네가 1학년 대표로 교수님 따라 설치 전 갔다고. 그럼 선배들도 아무 말 못 하실 거야. "
1학년 과대도, 학생회 기획선배도 흔쾌히 허락을 한 터라 나는 뒷일은 접어둔 상태로 그저 다 잊고 마음을 비우고 다시 고3 때처럼 마음을 다잡고자 계획을 세우고자 마음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어제 터진 것이다. 꾹꾹 눌러 담았던 마음들이 터져 버린 문제.
'이미소 정신 차리자. 지금 네가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숙소를 나와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며 설치 전을 할 장소를 골랐다.
' 자연을 이용한 설치전이다 보니 주변의 풍경도 고려해야 하고 야외다 보니 날씨나 바람도 고려해야 하는데. 산속이라 아침이면 이슬도 내릴 테니 종이같이 젖는 소재는 사용할 수 없고... '
고민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며 어떤 소재를 할지 두리번거리는데 교수님이 다가오셨다.
" 구상은 잘되어나가? 미소양?"
" 아 교수님. 처음 하는 거라 감이 안 와서요. "
나는 한없이 어려운 교수님 앞에서 쩔쩔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흰머리가 희긋한 교수님은 너그러운 웃음으로
" 처음은 누구나 어렵지요. 하지만 뭐든 시도해 보는 건 좋은 거야. 그러면서 커가는 거거든. "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는 다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런 교수님 뒤를 나는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 교수님. 자연과 어울리게 할려니 전기도 그렇고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너무 어려워요."
그러자 교수님이 빙긋 웃으시며,
" 자연이 그렇지? 있는 그대로 두고 보면 있는 듯 없는 듯 표도 안 나는데 말이야. 무엇인가 더 할라고 보면 하기 참 어렵지. 그렇다고 막상 벗어나 잊고 살다 보면 너무 그립거든. 자연의 품이 그래. 늘 곁에 있어도 없는 듯 늘 멀리 있어도 그립고. 그래서 조심하고 또 아껴야 하거든. 사람도 마찬가지고. "
" 아...."
뭔지 모를 교수님의 말씀에 왠지 공감이 되었다.
뒷짐을 쥐고 느리게 걸어가는 교수님의 뒷모습을 보니 그간 교수님의 작가로서의 삶이 녹아나는 것만 같다. 천천히 느리게 묵묵히 쌓아온 그의 길. 그 묵직하고 한마디 한마디 가슴을 울리는 말들이 얼마나 속에서 맺혀서 나온 말들 일지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까.
" 교수님. 새참 드세요. "
교수님을 따라 마을 회관으로 향하자 회관은 전시회에 참석하는 손님 준비로 분주했다. 야외설치전에 미술제이고 전국의 많은 작가들이 참석하는 나름은 큰 행사다 보니 어느새 10여 년 이어진 설치 전은 마을의 전통이자 자랑이고 축제였다.
요즘처럼 젊은 사람들을 보기 힘든 이런 두메산골에 모처럼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자리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음식을 해서 마을 회관에 가져왔고 망개떡이며 수육이며 백숙에 각종산채나물 반찬에 손수 담근 막걸리에 회관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어휴 많이 들 준비해 주셨네요. 이거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않겠어요."
"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 지난번 교수님께서 사주신 김치냉장고 덕분에 마을회관 어르신들께서 아주 잘 쓰고 계십니다. 덕분에 여름도 시원하게 잘 나고 있고요."
" 아휴. 이렇게 좋은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매번 신경 써주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
" 아 맞다. 내일 오신다고 했던 독일작가분들은 저녁에 오시나요?"
" 아 그분들은 내일 여기 조 군이 마중을 나갈 테니 이장님께서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
" 그래도 차편이 있어야 모시고 올 텐데."
"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지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일손이 필요해 보이는 주방으로 가 살며시 끼어 짐을 챙겨 냉장고에 넣었고 열심히 내가 건네주던 짐을 받아 넣으시던 아주머니께서는
" 어이쿠. 내가 정신이 없어서. 어서 와요. 인사가 늦었죠. 아가씨? 환영해요. 이름이?"
" 안녕하세요. 경원대 이미소예요. 편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 어이쿠. 이뻐라. 꼭 우리 딸 같네. 우리 아들도 대학생이거든. 어쩜 이리 싹싹할까."
" 감사합니다."
" 자 여기 수육이랑 김치 좀 담아서 나와요. 부탁해이."
아주머니께 부탁을 받은 수육과 김치를 담아 밖으로 나오자, 마당은 벌써 한바탕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새참이자 술자리이자, 즐거운 마을 축제. 축제를 피해 이곳까지 왔는데 이곳에서도 술이라니. 맨 정신에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오후에 3시부터 차려진 잔치상은 그렇게 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뒷정리를 다하고 보니 9시였다.
이곳 사람들은 9시면 다 불을 끄고 자러 들어간다. 어느새 조용한 산골 마을의 집집마다 불이 꺼졌고 칠흑 같은 어둠이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다행히 펜션입구에 들어가는 길로는 바닥을 따라 조명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나는 이제 막 생긴 자유시간에 물끄러미 휴대폰을 들고 고민하고 있었다.
' 지금 전화하기는 너무 늦었나? '
라고 생각하는데 때마침 경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 잘 도착했어?"
" 아 미안. 도착하고 너무 정신이 없어서 연락 못했어. 미안. 많이 기다렸어?"
" 아냐. 괜찮아. "
"..."
" 많이 바빠?"
" 아 내일부터 전시라서 좀 정신이 없어서 그래. 거기는 축제 즐길 만 해?"
수화기 너머 경윤에게 묻자 경윤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 응. 뭐. 그렇지. "
그때, 조교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소야. 이것 좀 도와줘. "
" 나 조교샘이 불러서 가봐야 하거든? 늦었으니까. 내일 통화해. 들어가."
" 아... 응"
전화를 끊고 보니 어느새 후발대로 출발한다던 학교 선배들이 도착해서 짐을 내리고 있었고 나는 인사를 하고 올라가 다시 짐 푸는 것을 도와드렸다. 그리고 마을 회관으로 가서 낮에 챙겼던 안주거리들을 챙겨 펜션으로 와서 술상을 차렸다. 한상 푸짐히 차린 술상을 본 선배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나를 보며,
" 와 우리 새내기 센스가 보통이 아닌데? 이런 건 어떻게 안 시켜도 알아서 척척 잘하니?"
그러자 곁에 있던 조교샘이
" 새내기라고 부르지 말고 미소라고 불러. 벌써 5월인데."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선배가 나를 한번 힐끗 보고는
" 뭐 1학년이면 새내기지. 야. 저 시절 그립다. 꿈 많고 뭐든 재밌잖아. 신기하고. 안 그래?"
" 네?... 네."
나는 방긋 웃어 보이며 내게 따라진 막걸리는 한 모금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