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설치전-4 04화

4-4. 뮤즈

by moonrightsea

생각의 지우개는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주제를 생각하는 것. 일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 이성적 판단이 드는 것을 먼저 떠올리는 것. 계획을 세우는 것. 그리고 몸을 써서 일을 하는 것.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나는 그냥 일을 한다. 몸이 고대 지면 일에 빠져 점점 생각이 줄어 드니까. 숙소로 올라온 나는 아직 채 끝나지도 않은 술자리 한 귀퉁이에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창 술자리에서 하하 호호 웃어대던 영은선배가 잔을 들고 와 내 앞에 놓인 잔들 위에 올려두며,


" 야. 넌. 아직 멀었다. 무수리도 아니고. 그냥 두면 알아서 다 하는데."

이렇게 말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민혁 선배가 일어나 주섬주섬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 오늘은 그만 정리하고 잠자리 드시죠. 내일 아침부터 움직이면 바쁠 테니."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정리했다. 나는 말없이 남은 음식과 술을 펜션 주방에 가져다 두고 그릇을 모아 놓고는 회관으로 갔다.


회관도 뒷정리가 한창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계신 이장님 사모님 곁으로 다가가

" 고생 많으셨죠?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이제 그만 좀 쉬세요."

" 아휴.. 미소양도 고생했을 건데. "

시간을 보니 1시였다.


" 괜찮아요. 벌써 주무실 시간 한참 지났잖아요. 아침에 일도 하셔야 하는데 여기 일은 제가 마무리 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이것만 마무리하면 되죠?"


" 그래요. 그럼. 설거지 마무리 해주면 저기 안방에 정리는 우리 애 시켜 둘 테니 부탁해요. "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허리를 연신 두드리시고는 연우에게 무언가 말씀하시고는 회관을 나가셨다. 그렇게 어른들이 나가시고 몇몇 분은 회관 위층으로 주무시러 올라가시고 어느새 설거지도 마무리 되어 나는 맥주 한 캔과 소주 한 병을 들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연우가 맥주 한 캔을 들고 따라나섰다.


" 어려 보이는데 보기보다 술이 세네?"

" 아. 안녕하세요. 피식."

" 아 인사가 늦었지? 나 정연우라고 해. "


" 들었어요. 역에서. 독일어 잘하시던데요? 엄청 부럽던데."

" 아 부모님이랑 거기 살았었거든. 어렸을 때. "

" 아 전혀 몰랐어요. 여기서 미술제가 10년이나 되었다고 해서..."


" 아 그건 우리 큰삼촌이 하던 걸 부모님이 여기 들어오시면서 이어서 하시고 계신 거야. 원래는 서울에 살러 오셨었고..."

" 아..."

나는 그러며 연신 맥주를 홀짝 거린 뒤 빈틈을 보며 소주를 부었다. 그러다 맥주캔이 넘치자, 호로록 마셔댔다.

" 아 그러지 말고 꿀꺽꿀꺽. 여기 좀 부어줘. "


그가 맥주를 마신 뒤 내게 캔을 건넸고 나는 거기에 소주를 부어줬다. 그러자, 그는 다시 내게서 맥주캔을 가져간 뒤 꿀꺽꿀꺽 마셔댔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자,


" 아 맥주보다는 소주 먹으려는 거 같아서. "

" 피식. 아 빨리 취하고 자려고요."

" 술이 센게 맞긴 맞네. 그걸로 되겠어? 아까 보니 술도 안 먹던데."


" 먹어봐야죠. "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연우가

" 근데 이 밤에 어디가?"


나는 길을 따라 불빛이 비치는 아래 방향을 가르켰다.




" 아 저기 아래 큰 나무요. 아까 봐뒀던 게 있는데 내일 설치 전 준비 하려면 마저 구상을 해야 해서요."

" 아 그럼 내가 따라가면 방해되는 건 아닌가?"


순간 머리 속에 혹시 영석이 다시 오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차라리 연우와 있음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 아니 괜찮아요. 오히려 도움 될 거 같은데요?"


" 그럼 다행이네. "

이렇게 말하며 연우는 맥주 캔을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 캔에 짠 하고 치고는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걸어 내려갔다.


나무 아래 도착하자 다시 밀려드는 생각들. 멍 해지려 할 때 연우가 말을 했다.

" 궁금해. 이 나무가 어떤 소재가 되어 사랑스러운 설치 작품으로 재탄생 될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불현듯 복잡하던 머릿속에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반짝 반짝 바닥 길을 따라 나무로 이어진 운명.
그 운명이 돌고 돌아 이어지면
나무의 허리즘 그들은 인연으로 만나
너무의 뒤편 사랑이 되고
나무는 높게 자라 사랑이 된다. '

이러면 되겠네.


" 풉."

" 왜? 내가 모르는데 너무 아는 척 했나?"


" 아뇨. 잘 모셔 온 거 같아서요. 저의 뮤즈."




" 뮤즈? 가만 그럼 내가 작품에 영감이라도 줬단 말이야? 이거 영광인데?"

" 그러게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미술용어들을 잘 알아요? "


" 그거야. 서당개 3년이면 풍월도 읊는 다는데 해마다 설치 전을 봐왔으니 이제는 작가로 등록해야 하나 고민할 지경인데 뭐. 아마추어지만. 헤헤."


" 오 대단한데요? 전공이 뭐예요?"

" 전공? 아 나 의대 외과. 좀 늙어 보이지? 본과4학년."


" 네? 그럼 지금 여기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요?"

" 다들 그렇게 말하지. 후훗."

" 와. 간이 큰 거예요? 머리가 미친 듯 좋은 거예요?"


" 그냥 주말이라 부모님 뵈러 온 거라 그렇게 두자. ok?

" 뭐 그렇다고 보기에는 거리도 보통 먼 거리가 아닌데..."

" 1년에 한 두 번 오는데 뭐. 그것도 학교 축제 기간에."


" 아 그럼 할 말은 없네요. "

" 근데 점점 오는 횟수도 그렇고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고 그렇네?"

" 아... "

" 그래서 고민 중이긴 해. 이 길이 맞나 싶어서. 이건 뭐 공부할수록 행복과는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 그래도 전공을 선택할 때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 선택할 때는 그랬지. 적어도. 할아버지께서 암으로 돌아가시고 뭐. 누나도 지병으로 고생하는 거 보고 내가 의대 갈 거라고 우겨서 서울까지 다시 오게 되었으니까. "


" 아... 그럼 그 부담이 장난은 아니었겠네요. "

" 그러고 보니 처음 말하네. 이렇게 부담 없이 말하는 건. 술 때문인가. 분위기 때문인가?"




" 선택의 고민이 들 때라 그렇겠죠. 내 선택이 과연 현명한가 의심이 들 때 그때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 그럴지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연우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 사실 주변에 말하면 괜히 자존심도 있고 체면도 걸리고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하면 부담이 없잖아요. 어차피 안 볼 사인데. 뭐. 편하게 말하고 또 편하게 서로 위로해 주고 헤어지면 되니까. "


"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런 거 같은데?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데 보기와 다르게 말이 통하네?"


" 부모님 뵈러 온 거 보면 그런 거 같아요. 마음 다잡으러 오신 거. 맞죠?"

" 대단한데?"

" 가끔 서울 사는 언니들이 그렇게 해서 알거든요. "


" 아 서울에 연고가 있구나. 그럼 언제 서울에 오면 연락해. 밥 사줄게. "

" 네."

우리는 남은 맥주를 짠하며 부딪힌 후 마시고 다시 되돌아 길을 나섰다.


" 근데 말이야. 아까 그거"

" 뭐요?"


" 내가 영감을 준거. 그거 말 안 해줄 거야?"

" 음. 비밀인데.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잖아요. "


" 뭐야. 뮤즈라며?"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를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 내가 주인공인 거야?"

" 그야 모르죠. 주인공인지 아니면 관람객이 될지 소재가 될지. "


" 뭐지? 기대해도 돼?"

" 뭘 기대해요. 첫 처녀작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한테."

" 하하"


" 나의 뮤즈 잘 자요."

" 알았어. 후훗. 너도 잘 자. 나의 뮤즈. 굿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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