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설치전-4 03화

4-3. 전야제-1

by moonrightsea

그렇게 나는 조교샘과 같이 봉고차에 올라 역으로 갔다.


마을에서 족히 1시간 거리인 이곳에서 차편을 타고 들어오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역에 기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나는 차에서 내려 조교샘과 같이 역 플랫폼으로 향했다.

이장님께 건네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들리는 목소리.


"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저 이미소라고 이장님 부탁받고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 저 보이시죠?"

" 아 네. "


전화를 받고 손을 흔드는 연우.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그는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하얀 꽤나 훈남형이었다. 그런 그가 금세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인사를 채 하기도 전에,


"Hallo, wir sind von der Kyungwon Universität. Vielen Dank fürs Kommen."

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원대에서 나왔습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라며 소개를 하는 조교샘을 바라봤다.


뒤돌아 보니 독일인 6명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어느새 다가와 있었고 그런 그들과 대화를 하는 조교샘을 보며 '와 멋지다.'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곁에 서 있던 연우가,


" Willkommen in unserem Dorf. Ich bin ein Bewohner von Summary.Lange nicht gesehen."

" 저희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수렴리 주민 정연우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Oh mein Gott, wann bist du so groß geworden? Yeon-woo, wie schön, dich zu sehen."

오 이런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연우. 너무 반가워요."


독일에서 오신 부부 작가 내외 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게 아닌가.

그 뒤 일행 분들과 한참을 독일어로 인사를 나누시며 연우를 바라보고 한참을 이야기하셨고 또 조교샘이 같이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차로 이동하였다. 나는 옆에서 아무것도 못 알아들으니 가만히 그냥 앞자리에 앉아 듣고 있었다. 인사도 못했는데...




차를 타고 오는 내도록 난 왜 이리 못나 보였을까.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프랑스어는 그나마 인사정도는 할 줄은 알지만 나머지는 그것마저 제대로 열심히 수업을 듣지 않아 기억에서 가물가물 잊혀 갔는데 말이다.

차에서 내려 입구에 마중 나와 계시던 교수님, 이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신 독일 손님들은 곧 바비큐파티에 합류하셨고 나는 어김없이 분주히 안주를 날랐다.


참 본분에 착실하지.

막내의 설움이란. 얼마나 정신없이 오갔을까. 어느 정도 파티도 끝이 보이고 교수님과 이장님, 조교샘 그리고 몇몇 작가분들께서 자리를 마을회관으로 이동을 하신 다음에야 그렇게 펜션 앞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뭐 정리라고 해봐야 딱딱하고 어색해서 어디도 들어갈 곳 없던 내 위치였지만 이제는 조금 편하게 선배나 다른 작가님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인데 그것마저도 황송할 따름이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낯설고 생소하지만 뭐 교수님 말씀대로 나쁘지 않고 경험이 중요하고 좋은 거니까.


" 미소야. 여기와. 같이 한잔해. "

졸업하신 선배작가님께서 나를 불러 인사를 하고 곁에 가 한잔 받아 들었다.

그렇게 자리를 돌다 보니 제법 취기가 올라왔다. 그러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영은 선배가 말했다.

" 영석아. 이제 그만 니 애인 좀 챙겨."


영은 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나를 바라보는 영석 선배와 눈이 마주쳤고 당황한 나는

" 저 선배님 말씀하신 그런 사이 아닌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영은 선배는 자리에서 술잔을 들고 일어나 내 옆자리로 슬며시 다가와 앉더니 내 귓가에 대고,

" 뭐. 어제 봤는데 밤에 쪽쪽 대더구먼. "




그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얼굴이 빨개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민혁이 일어나 내 곁으로 왔다.

" 미소 술을 급하게 마셨구나. 영석아 산책 좀 시켜줘야겠다. 우리 강아지."


그러자 선배들이 막 웃어댔다.

그런 선배들을 뒤로 영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벗어나 길게 이어진 산책길을 내려왔다.


어두컴컴했던 어제와 달리 길을 따라 나무마다 등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렇게 터덜 터덜 내려오다 손을 빼고는 영석을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미쳐 낮에는 못 봤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가 그림자가 되어 길게 늘어지고 마치 끝은 우산처럼 보이는데 그 아래 달랑 거리며 비치는 빛이 음 뭐랄까.


여기에 뭔가 더하면 될 것 같은데.... 혼자 커다란 나무 아래 손을 턱에 받치고 골똘히 생각에 빠진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영석은 한참을 서 있다 내게 다가와 나를 뒤에서 안았다. 나는 놀라 뒤돌아보려 하자 그는


" 가만히 좀 있어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네가 사라져 버려서. "


쿵. 쿵. 쿵. 쿵. 내 심장 소리가 들린다. 당황한 나는 선배의 손을 풀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뒤로 한발 물러났다.


" 선배. 이건. 아니잖아요. "

" 어제 잠든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순간. 아니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듣는 순간. 난 그냥 아무것도 안 들렸어. 그냥 니 목소리만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어. 그래서 달려온 거야. "


나는 그를 외면한 채 등을 돌렸다.




그가 그렇게 말한 건 아니 그가 들은 그 말은 내가 꿈결에 경윤에게 한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조차 나는 꾹꾹 눌러 담고 경윤에게 하지조차 않은 말이니까. 애초에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으려던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경윤에게 흔들렸고 그런 경윤을 생각에서 떨쳐내려 이틀 동안 무진장 노력해 왔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정말 미친 듯 일을 했었다.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니까.

" 선배 분위기에 많이 취하셨나 봐요. 그거 선배 잘못들은 거예요. 제가 꿈꾼.. 흡"


영석은 그렇게 돌아보는 내게 키스를 했다.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린 채 내 머리를 끌어당겨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뿌리쳤다.


" 그만 선배. 내가 말했죠. 학생회 일 말고는 내게 연락도 내 몸에 손도 대지 말라고. "

" 보이는 걸 어떻게. 네가 흔들리는 눈빛. 네가 내게 보이는 그 다정한 눈빛. 니가 내게 보내는 그 다정한 말들. 나를 걱정하고 아끼고 나를 배려해서 혼자 시간을 두게 하는 것 그 모든 게 보이는데 어떻게."


" 그건. 선배를 위하는 거니까. 선배가 선배 스스로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진심으로 걱정돼서 그런 건데.. 흡."

그는 또다시 내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등을 어루만지며 내 손을 그의 허리에 가져다 댔다. 나는 그를 밀쳐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은 강하게 요동치고 온몸은 파르르 떨려왔다.


" 아닐 거야. 아니야. 선배가 잘못 본 걸 거야. 난 아니었어. "

" 자꾸 부인하며 숨으려 들지 마. 맞아. 내가 본 게 맞다고.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내 마음이 더 중요하지. 내가 미칠 거 같아. 네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말하며 선배는 다시 내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했다.




잠깐 멈칫하는 가 싶던 그의 입술은 거친 숨을 내뿜으며 내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입김을 내뿜으며 입술과 볼 주변을 빙빙 돌았고 그의 두 눈은 이글 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거칠게 숨을 쉰 뒤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팔을 들어 나무사이 내 등을 어루만지며 한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그의 감각. 손가락 끝을 들어 내 가슴선을 타고 흐르는 그의 손가락은 내 가슴을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움켜쥐며 그렇게 키스를 퍼부어댔다. 감각이 온 감각이 이 분위기에 집중되는 그 순간에 나는 머릿속에 문득.


나는 온몸의 떨림이 빠르게 진정이 되고 그의 흥분에 동요되지 않고 온몸이 목석처럼 굳어져 갔다.

그런 내 반응이 느껴져서였을까.

그는 문득 키스를 퍼붓다 내 두 눈과 마주쳤다. 나는 그가 키스를 퍼붓는 그동안 그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내 감정을 읽으려 드는 그 순간 내도록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할게요."

" 무섭다. 너. "


그 나무아래 그를 두고 돌아서는데 그가 물었다.


" 뭔데. 도대체 뭔데! 뭐가 그렇게 너를 꽁꽁 감싸고도는 거야. 네 감정을?"


나는 돌아보며 그를 본 뒤 바닥을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를 봤다. 그 눈빛. 아련한 눈빛 우수에 젖어 그리운 누군가를 애타게 바라보는 그 눈빛.


" 사랑이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돌아서 숙소로 향했다.




사랑.

어떻게 보면 영석이 보인 사랑은 꽤나 지속적이고 내게 열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늘 나를 곁에 두고 끊임없는 스킨십으로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내게 구애를 해왔으니 말이다. 늘 나를 챙기며 나를 데려 다녔고 내게 응원을 보내고 기회를 주고 포기하지 않고 저돌적이고 당당하게 다가왔다.


영석의 룸메이트 명민이 나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영석에게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말할 때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가끔 셋이 마주한 술자리에서 내가 짜증이 날 법한 순간에는 탁자 아래 내 다리를 툭 치거나, 명민에게 더 술을 먹여 먼저 필름이 끊어지도록 만들기도 했고 괜스레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면 술 취한 척 그렇게 내 팔을 붙잡고 한잔만을 외치거나 꼭 내가 바래다주어야 한다며 나만 믿을 수 있다는 말로 내 발목을 잡아 기어이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가와도 내가 그의 자취방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고 일정한 선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야 그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눈치 빠른 사람이니 나보다 더 잘 간파했으리라.


내 동기인 문주가 그렇게 영석을 쫓아다니며 집에 드나들고 상담한다며 밤새 전화를 하고 술을 먹고 난리를 쳐도 그는 그런 내색을 내게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를 바래다주러 간 집 앞에 술에 찌들어 쭈그리고 앉아 있던 동기며, 여자 선배들을 본 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그때마다 그는 친절히 손에 택시비를 쥐어주거나 내게 그런 그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그냥 그의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때는 내가 그렇게 보내려 해도 그들은 끝까지 네가 뭐냐며 선배 애인이라도 되냐며 난리를 치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냥 그들을 두고 택시를 탔다.


그냥 그는 그런 동네 연예인이었다.




기타를 잘 치고 항상 친절하고 언제나 친근하게 먼저 다가가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고.

영석은 연애가 처음이라면 아마도 너무나 현혹되기 쉬운 상대일지 모른다. 그의 손만 닿고 그의 어깨동무 몇 번이면 금방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데 전화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하니까. 거기에 그는 저녁이면 귀에서 전화를 놓지 않을 만큼 후배들의 고민 상담에도 열을 올렸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내 곁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가 나를 사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고 여자로 안 느낄 수 있는 존재라 인식한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착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가끔씩 잠수를 타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와서 그의 안부를 물을 때도 그의 수행비서쯤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도 나름은 노력하고 있었나 보다. 사랑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니.


정작 우리 둘은 몰랐지만 우리는 학생회 일을 했고 내가 만든 규칙안에 있었지만 그 규칙 밖에서 그저 남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연인관계와 별차이가 없었다.


늘 붙어 다녔고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애살스레 둘을 챙기고 언제나 매너 있게 서로를 지켜주는 사이.


정말 잰틀 한 사이 아닌가.


그런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을까.


입학을 하고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이 누구 선배와 누가 사귀고 누가 누구랑 잤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기들과 거리를 뒀었다.


나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던 그녀들이 바라보는 남자들은 누구를 어쨌니 함부로 말하는 위험한 존재들이었고 그런 그녀들에게 자신만을 지켜주기 원하는 남자를 만나기 바라는 여자 입장이라면 그는 탐이 날만한 사람이다.

왜?

그는 나의 말대로 내 남자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그가 짝사랑할 사람처럼은 더더욱 안 보인다고 했으니까. 그는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관계는 내가 그에 대한 마음이 경윤을 향한 나의 마음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깨졌다.


내가 느꼈던 18살 그때 그 설렘과 그와의 느낌은 달랐다.

그래서 그의 마음이 보일 때마다 나는 불안했다. 다시 그런 혼란에 빠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감정의 소용돌이가 휩쓸려 지나가면 내게 주어진 미래가 얼마나 허비되는지 나는 똑똑히 보았다. 희진언니도 그랬고 재민샘도 그랬다. 성현 오빠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정작 내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던 경윤을 그렇게 밀어내 왔는데 잘 다스려 왔다고 생각해 왔는데 영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저돌적인 감정에 그의 솔직함에 그의 노련함에 나는 꽤나 자주 놀아나는 기분이 든다. 왜 나는 그에게 경윤과 사귄다고 말하지 못한 걸까.


순간 생각이 여기서 멈췄다. 영석이 내게 처음 내게 키스를 했을 때, 나는 왜 그 말을 못 했을까.


그저 그를 밀치고 그에게 말하면 되는데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지만 나는 경윤을 떠올리며 경윤과의 그 밤은 기억하지만 사귀자는 말은 아니 그 이후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내 감정과 달리 내 이성은 이미 그에게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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