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전화를 해야 하나? 아냐. 집중해.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해.'
경윤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라,
" 이미소. 이리 와 봐. "
" 미소야. 나 좀 잡아줘."
" 이것 좀 부탁해. "
밀려드는 심부름으로 눈코 뜰 세도 없다. 몸이 열개라도 모잘 판이다. 물론 몸은 몸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아플 지경이다. 이 와중에 자리를 못 잡은 작가분들과 이동하면서 남은 자리를 안내하는데 한 작가분이 내가 봐두었던 자리를 보시고는
" 여기 너무 마음에 드는데 저는 여기로 할게요."
그렇게 어제 밤새 내가 기획했던 공간구상이 날아가 버렸다.
순간 머릿속이 멍하니 비어 버린 것도 잠시 어쨌든 팀의 막내니 나는 다시 내 자리도 찾아야 하고 밀려드는 심부름에 일도 도와야 하고 아 정신이 이리도 미친 듯 없는데 머릿속에 경윤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제는 왜 전화를 안 했는지 왜 전화를 못 받았는지 뭐라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다.
그가 전화를 한 시간은 정확히 영석과 내가 같이 있었던 시간이었고 경윤이 그 시간에 전화한 건 아마도 내 예상이 맞다면 내가 바쁜 일이 끝나기를 한참을 배려한 뒤에 일 텐데 하필 그 시간 영석과 그러고 나서 나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침에는 정신이 있었나.
새벽 2시에 잠들어서 아침 7시에 깨서 오후 4시가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내 자리조차 못 잡았는데 아직도 심부름은 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분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 구상을 시작하고 빠른 분들은 이미 설치에 들어가셨다.
" 하아~"
바쁘게 오가던 길가에 나무 그늘에 그렇게 허탈하게 주저앉아 한 숨을 길게 늘어지게 쉬고 있으니, 누군가 차가운 음료수를 등에 댄다. 뒤돌아 보니 연우였다.
" 잘 돼가? 뮤즈?"
" 아 고마워요. 아까 밭에 가시더니 언제 내려오셨어요?"
" 아 새참 가지러 온 김에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
" 휴~우."
" 왜? "
나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찜 해두었던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내 시선을 따라 바라보던 그가 빵 터졌다.
" 왜 웃어요?"
내가 찜해둔 자리에는 어느새 작가분이 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설치를 하고 있었다.
" 다 큰 줄 알았더니 애기 맞네."
" 힝. 뭐예요. 위로는 못해줄 망정."
" 뭐야. 뺏긴 거야? 말 한마디 못하고?"
" 그럼 어떻게 해요? 명색이 작가신데. 저 같은 새내기와 급이 다른데. "
" 아니 왜 이러세요. 이미소 작가님. 설치 전에 등록하셨으면 이미소작가님이시죠. 작가님께서 이미 자리 잡으셨으면 본인자리라고 말은 하셨어야죠. 그래야 그분도 아시죠. 아 이렇게 어리고 당돌한 신세대 작가도 있구나. 이렇게. 너 말도 안 꺼내봤지?"
" 헐 어떻게 아셨어요?"
" 니 얼굴에 적혀 있는데? 너 선배들한테도 도와달라고 말도 못 꺼냈겠구나?"
" 말은 무슨 오전부터 지금까지 선배들 작품 만드는 재료 나르느라 팔이 빠질 지경이라고요. 막노동 막노동 으."
나는 쭈그려 앉은 팔을 휘휘 저으며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 하하하하하하. 귀여워. "
그런 내가 귀여웠는지 그는 그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자자 힘내시고. 음료 원샷. 소주라 생각하시고. 아자! 어제의 폐기는 어디 간 것이오. 이작가. 그만 가시죠."
이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아 나를 세운 채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는
" 음. 보아하니 큰 나무가 필요한 거야? "
나는 풀이 죽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 마침 내가 이 동네 지리를 잘 알거든? 그러니 이 주변보다 조금만 더 떨어져도 상관이 크게 없다면 마을 끝자락에 이 나무보다는 폭은 조금 더 작지만 키가 더 큰 놈은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리로 안내해도 될까?"
" 네!"
나는 그렇게 그의 손에 이끌려 마을에서 한참을 내려와 거의 도로가 조금 넓게 이어진 길까지 내려왔다. 그러자 곧 다른 나무와 달리 지 혼자 동떨어지게 키가 크게 자란 미루나무가 보였다.
" 저건 어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너무 멀어?"
" 끄덕끄덕"
" 좋아 그럼 여기서부터 찬찬히 돌아가며 찾아보자. "
" 감사합니다. 이렇게 같이 찾아주셔서. 근데 이제부터는 제가 길을 아니까 혼자 찾아볼게요. 힘들게 시간 내신 건데 어서 가보세요. "
" 아냐. 괜찮아. 같이 있다가 가도 돼. 어차피 손님들 맞는 거 도와주러 온 거니까."
" 그래도 집안 일도 돕던 중이신데 기다리시는 거 아니에요? 새참도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 아 맞다. 새참. "
" 헤헤. 어서 올라가세요. "
" 음. 그럼 내가 새참 가져다 드리고 다시 내려올게. 길 헷갈리지 말고 딴 길로 새지 말고 잘 올라와."
" 네. 다녀오세요."
그렇게 연우가 자리를 비우고 나는 천천히 길을 따라 다시 올라가며 작품을 설치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 부는 바람도 상쾌하고 좋고 음. 향기로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유달리 하늘은 푸르고 색이 곱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뻗어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숲 속에 푸드덕하며 새가 날아올랐고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그리고 보니 마을에서 제법 내려온 곳이고 혼자 걷다 보니 불현듯 조금 낯설고 무섭기도 한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두리번 거리며 쳐다보는데... 깜짝 놀라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보면 안 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당황한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떨군 채 발길을 옮겼다.
멍 한 표정으로 번개 맞은 아이 마냥 부들부들 떨며 걸어 올라오는 나를 본 연우는 나를 한참을 불렀다.
그러다 급기야 나를 세우고는 길가 나무 그늘에 앉혔다.
그래도 내가 떨고 있자, 남방을 벗어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리고는 나무에 기댈 수 있도록 하고 하늘을 향해 손을 올리고는 손으로 살랑살랑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이제 좀 정신이 드니? 너 귀신이라도 본거야?"
" 아... 아.. 귀신.. 음... 귀신.. 인가...? 음... "
그는 놀라서 내게 물었고,
" 뭐 귀신?"
" 아... 아니에요. "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 진짜 괜찮은 거야? 말 못 할 일이야?"
" 아.. 음. "
내가 동공이 흔들리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 음. 말 못 할 일이면 그냥 잊어버려. 그게 차라리 속편 하니까. 알았지?"
" 네. "
" 근데 너 나무는 찾았어?"
" 아 맞다 내 나무."
"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떻게 하냐. 좀 있음 해지는데?"
" 어떻게 하지? 오늘 안에 정해야 하는데... "
" 뭘 어떻게 해. 사방이 나무인데 멀리 찾지 말고 어디 보자. 이건 어때?"
연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 등뒤에 기댄 나무를 퉁퉁 쳤다. 나는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봤다.
아 나무네.
지금 내게는 무얼 찾을 정신도 더는 선택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스르르 나무에 기댄 채 일어나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몸에 걸쳤던 남방을 툴툴 털어서는 연우에게 줬다.
" 이걸로 할게요. "
" 정말? 난 그냥 한 말인데?"
" 전 그냥 한 말 아닌데요? 뮤즈 씨?"
" 오 다시 제정신 돌아온 모양이네? 회복력이 좋다. 너?"
" 그러게요. 서둘러야겠어요. 또 정신줄 놓기 전에. "
그렇게 나는 그 자리에 커다란 돌을 주워 두세 개 옮겨둔 뒤 연우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숙소에 도착하자 선배들은 또다시 이리저리 나를 불러댔다.
나는 정신없이 불려 다닌다고 밤이 되자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한참을 다리를 주무른 후 알람을 30분 맞추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11시 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펜션 앞에는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어느새 술자리 중이던 선배가
" 야 넌 자러 들어간 거 아니었어?"
" 아 낮에 자리 봐 둔데 있어서 가보려고요."
그러자 영은 선배가
" 이 밤에 여자애가 겁도 없이 혼자 거길 가려고?"
" 아 잠시 보고만 오려고요. 맛있게 드세요. "
곁에서 그런 영은 선배에게 잔을 채워주던 민혁 선배가 내게 손을 흔들며
" 조심히 다녀와. "
" 네."
이미 술이 곤드레 취한 선배들을 뒤로 나는 종종걸음으로 나무로 향했다. 손에 렌튼을 든 채 나무로 향했는데 내가 찜해둔 나무에 불빛이 보였다.
" 누구세요? 어? 여긴 웬일이에요? 오빠?"
" 아 그런 넌 여기 웬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