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 달러 가는 거야?"
아침부터 분주히 내려가는데 연우가 회관에서 나오다 마주쳤다. 그런 그에게 간단히 목례만 하고 지나치자 내 뒤를 졸졸 뒷따르며 연우는 물었다. 나는 묵묵부답이었다.
" 응? 아직도 기분이 별론가 보네. 우리 작가님?"
" 음. 농담도 안 받아주나요? 뮤즈님?"
연우는 천연덕스럽게 내게서 꼬마조명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러자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 제가 뮤즈는 아니죠. 엄밀히 말하면."
" 네가 뮤즈 맞지."
연우도 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 왜 내가 뮤즈죠?"
" 그건 음 네가 내게 영감을 주니까?"
그와 채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 어떤 영감요?"
" 음 그러니까 차갑게 식어버린 인간에 대한 연민, 감정, 사랑 뭐 이런 거?"
연우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나는 바라봤다.
" 제가요? 왜요? 뭐 때문인데요?"
"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라 설명하기 좀."
" 뭐야. 똑똑한 거 맞아요?"
" 음. 그것도 글쎄."
" 쳇. 재미없어. "
내가 토라진 듯 고개를 돌리며 팔짱을 끼고 걷자, 그가 내게 와서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 이래도? "
" 하지 마요. 저 간지럼 안타거든요. "
내 말에 아랑곳 않고 그는 나를 간지럽힌다.
" 하지 말라고요. 아이참?"
투덜투덜 대며 걷는데 그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고양이 마냥 손을 들어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는데 어이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그 모습에 왠지 간지럽기도 한 것 같고.
" 풉"
" 웃었다. 크하하하하"
" 아 왜 웃어요.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산통 깨지게."
" 음 여기서 말이지. 산통을 깬다는 말은 어원과 맞지 않지. 산통을 깬다는 건 일이 잘 진행되어 가는데 분위기를 망친다는 의미인데 넌 지금 그게 아니잖아. "
그의 어이없는 답변에 할말을 잃은 나는 웃음이 나왔다.
" 헐. 어쭈. 풉."
" 또 웃었다."
" 깔깔깔"
" 푸하하. 또 웃었다. 가자. "
연우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그렇게 내리막을 걸어내려 갔다. 연우와 그렇게 길을 내려오며 어느새 내 기분도 풀려 진정이 되어 있었다.
나무에 도착하자, 어제 해놓은 해작질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연우를 바라봤다. 그는 나름 턱을 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들여다 보고는,
" 흠.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낮에 보니 실감이 나네. 실감이 나. "
그런 연우 옆에서 서서 나도 고대로 자세를 흉내 내며,
" 흠. 오늘 보니 어제는 나름 신났는데 제가 뭔 짓을 했는지 확실히 알겠네요. 어떻게 하죠?"
" 보통 영화에서는 이럴 때 ' 메쓰' 이렇게 외치며 수술하던데. 미대는 그런 거 없어?"
" 흠.... 수술이... 필요하긴 하겠죠?"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문득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 혹시 주변에 풍선 살 수 있는 곳 있을까요?"
" 음? 있긴 한데 주변은 아니고... 조금 멀긴 한데 있긴 있지."
" 얼마나 걸릴까요?"
" 음. 어디 보자. 차로 한 한 시간 반?"
" 아.. 차... 털썩."
그렇게 주저앉아 바닥을 나뭇가지로 바득바득 긁고 있었다. 그러자,
" 말해봐. 뭐가 필요한 건데? 풍선?"
" 음 엄밀히 말하면 하트모양 풍선이 필요해요. "
" 에이 그러건 읍내가도 있을지 장담을 못하지. "
" 뭐야. 완전 촌구석이야. "
" 어쭈? 너 지금 우리 동네. 무시하는 거야?"
" 가만히 좀 있어봐요. 대안을 생각해야 한다고요. "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무를 그리고 나무 위에 무엇인가 달아서 날리는 느낌을 연출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음.... 이렇게 고민을 하며 열심히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가,
" 음? 그거 굳이 풍선이 아니라도 되겠는데?"
" 응? 그럼 어떻게 이 느낌을 연출하죠?"
" 그림 잘 그리잖아. 그려."
" 안 돼요. 종이는 물에 젖잖아요. 달면 내일이면 너덜너덜해져요. "
" 비닐로 싸서 묶어. "
" 아하!"
그 길로 마을회관으로 달려가 A4용지를 얻은 뒤 열심히 하트를 그렸다. 그리고 비닐봉지에 담아 마치 풍선처럼 감싼 뒤 묶고는 다시 나무로 가져왔다.
" 휴~혹시 사다리 있어요?"
" 당연히 있지. 잠시만"
그는 곧 사다리를 가지고 왔고 그렇게 색색의 풍선그림을 나무에 알록달록 내 달았다. 휴. 조금 낫네.
" 이제 조명 설치?"
" ok"
나는 윙크를 하며 그에게 손을 뻣어 올려 보였고 그는 내가 지난번 알려준 대로 열심히 그렇게 조명을 나무에 칭칭 감고 있었다.
" 아 그쪽 말고 조금 더 옆으로요. 조금 더 촘촘하게. "
" 아침부터 열심히군요. 미소양."
어느새 교수님이 뒤에 다가와 계셨다.
" 아 교수님. 안녕하세요. "
" 이제 다 되었나 보네. 어디 보자. 음. 주제가 사랑인가 보네?"
교수님은 나무를 중심으로 한 바퀴 휙 도시더니 한눈에 바로 알아보셨다.
" 어떻게 아셨어요?"
" 나무에 걸려 있네요. 희망이. "
" 우와. "
" 그나마 사랑을 희망적으로 바꿔놔서 다행이네요. 어제까지는 내심 걱정했는데. "
" 어제도 보셨어요?"
" 아니 아침에. 그럼 수고해요. 연우도 고생해라."
" 감사합니다. 교수님. "
" 네 교수님."
그렇게 교수님은 빠른 걸음으로 다시 올라가셨다. 그런 교수님의 뒷모습을 보며,
"우와 신기하다. 어떻게 아셨지?"
" 애기야. 교수님이 괜히 교수님이시겠니?"
" 애기 아니래도요? 칫."
" 그래도 우리 이제 끝?"
" 네. 끄으으으읕!"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고 나는 점프를 해서 그의 손바닥에 손을 맞췄다.
그가 내 손을 잡고 흔들며,
" 그럼 이제 이작가님 작품 감상가시죠. "
이렇게 말하며 팔고리를 만들었고 내 팔을 걸었다.
나는 정중히 인사를 다시 하고 그의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연우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 회관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자, 입구 벽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웅장한 바다가 그려져 있고 멋진 파도도 림프를 켜는 사이렌이 그려진 벽면도. 벽면 한 귀퉁이는 갈매기 머리장식이 있는 곳도 있었고 마을 중앙에 큰 서당 나무에는 알록달록 예쁜 등이 달려 있었다. 그 옆으로 허수아비를 색색의 예쁜 옷을 입혀 세워 놓은 것도 있었고, 조금 더 올라가자 밭으로 이어지면서 밭 가운데 말머리를 토르소로 뜬 동상, 희게 채색한 동상 말의 힘찬 다리만 조각한 동상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교수님의 설치 작품이었다.
우아한 조명 아래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이색적 풍경.
조각에 자연의 생명감이 더해진 느낌이랄까. 작품을 감상하며 연우와 예전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지금 작품과 다른 작품의 차이나 정기적으로 참여한 작가의 작품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생생한 관람객의 목격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 우와. 미술에 대한 소견이 미술 전문 비평가 못지않은 거 같아요. "
" 뭘. 난 단지 내가 본 걸 말해주는 것뿐인데?"
" 그래도 그렇게 설명하며 변화되어 온 과정 속에 느낌을 이야기해 주는데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게 눈에 그려지잖아요. 마치 제가 작년에, 재작년에 여기 있었던 거 같아요. 너무 좋아."
" 진작 봤으면 좋았을걸. 그럼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
" 그러게 말이에요. 아참. 언제 돌아가요?"
" 아. 나 오늘."
" 네? 그렇게 빨리 가요?"
" 응. 오늘이 금요일이니 슬슬 가야지."
" 아.. 그렇구나.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박하고 있었어요. 바쁜 사람인 걸."
" 뭘. 그래도 나름 우리 알찬 시간 보낸 거 같은데?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 아닌데? 완전 저만 다 까발려진 느낌인데요?"
" 그런가? 음. 미소는 우리 집도 알잖아? 우리 부모님도 알고 인사도 다 했고 그럼 다 안 거 아냐? 시집만 오면 되겠네. 이제. "
" 뭐래요. 아직 애기한테. "
" 언제는 애기 아니라며?"
" 어쭈. 왜 이러세요. 아직 꽃다운 연얘도 못해 봤걸랑요?"
" 아니 그 꽃다운 연애도 안 하고 뽀뽀랑 키스는 도대체 어디서 보고 배운 거야?"
"..."
내가 순간 조용해지며 고개를 숙이자, 그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며,
" 시간 많아. 이제 슬슬 배우라고. 그리고 천천히 해보면 되는 거야. 힘내. "
" 아참 근데 오빠는 몇 살이에요?"
" 나? 27살? 왜?"
" 헐 왜 그렇게 늙었어요?"
" 어? 내가? 어딜 봐서 그렇게 늙었어?"
" 아니 본과 4학년이면..."
" 아... 방황 좀 했지. 첫사랑의 아픔이랄까?"
" 캬~~ 방황이 기이~~ 이셨네요. "
" 과연?"
"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빠 나이쯤 되면 뽀뽀는 하고 살아요?"
" 넌 쪼그만 게 뭘 그런 걸 묻냐?"
그는 내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 헐.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고작 7살 응? 그것밖에 안나는 구만."
" 어쭈 좀 전까지 노인 취급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푸닥거리며 웃으며 마을로 돌아와 회관으로 오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되어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나는 눈치껏 달려가 이것저것 챙겨내서 밖으로 열심히 날랐다. 둘이 들어오는 걸 본 건지,
" 미소양. 너무 참하고 애가 곱네. 나도 딱 저런 며느리감 얻으면 좋겠다. 얘."
이장님 사모님이 흐뭇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 어머니 보시기도 마음에 들어요? "
" 내 딸내미 같잖아. 싹싹하고. 이쁘고. 밝고. "
" 어머니 눈 높으시다더니. 웬일이세요?"
" 아휴. 살아보면 별거 있니? 네 마음 편한 게 제일 좋아. 자 이것도 좀 내어가려무나. "
야외환경설치 전은 설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돼서 철수하는 데까지가 그 일정에 포함된다.
자연과 함께 더불어 시작된 전시는 그렇게 함께 어울려 자연에 스며들었다가 일상을 공유하고 어느새 다시 원래의 자연으로 되돌아가며 사람도 자연도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엇그제부터 시작된 전시는 오늘로 모든 전시물이 설치되며 본격적인 대단원의 막을 올리고 밤에는 촛불 걷기 행렬이 열리고 내일은 풍등행사가 열리고 모레는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고 다음날 철수를 함으로써 대단원의 일정이 마무리되는 과정이다. 아침부터 진행된 식행사에 나는 슬며시 빠진 터라 눈치가 보였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표는 나지 않았나 보다. 아무도 찾지 않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작품도 구경하고 연우와 시간도 즐겼다.
오후에는 교수님과 외국 작가분들, 다른 지역 작가분들과 다시 작품을 둘러보는 자리를 가졌는데 연우와 오전에 봐뒀던 효과가 있었는지 가끔씩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우리 만큼 도움이 되었다.
긴 하루 일정이 끝나고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촛불 걷기 행렬이 이어졌다. 각자 종이컵에 촛불을 들고 마을 입구부터 시작해서 전시가 진행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작품을 구경하고 또 소원도 빌고 담소도 나누며 그렇게 지내다 보니 낮에 본 작품들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밤에 지나가는 내 작품은 꼬마조명이 들어와서 더 반짝반짝거렸다.
' 연우오빠는 갔겠네. 제대로 잘 가라고 인사도 못했는데...'
한참을 내가 설치한 작품아래서 조명을 받아 이쁘게 빛이 나는 풍선모양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웍"
깜짝 놀라 돌아보니 연우였다.
" 놀랐잖아요. "
"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야 너 때문에 내 초 꺼졌다. 불 좀. "
그는 나를 놀라게 하다 꺼져 버린 초에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초에서 불을 빌려 붙이고는,
" 됐네. 이제 좀 안심이네. "
" 뭐가 안심이에요?"
" 아 소원 빌려는데 마침 불이 꺼져 버렸거든."
" 도대체 무슨 거창한 소원을 빌려고 했길래. 놀라서 불이 꺼져요?"
" 비밀인데?"
" 칫. 말도 안 해줄 거면서."
" 뭐야. 말해주면 들어줄 거야?"
" 제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 드리죠. 에험."
" 풉 꼬맹이 주제에."
" 언제는 애기라더니 그래도 좀 자라긴 했네요?"
" 어쩌냐? 오늘은 캔이 없는데?"
" 그러게요. 맨 입에 되겠어요?"
내가 장난스레 말하자 그런 나와 달리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연우는
" 그런...가?"
" 아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 음 있어봐. 이것 좀."
그렇게 그는 내게 초를 주고는 사라졌다. 그리고는 한 손에 소주병과 맥주 두 캔을 쥐고 달려왔다.
" 엤다. 이제 맨입 아니지?"
" 오. 센스쟁이."
" 기다려봐. 세팅 좀 하구. "
언제나처럼 그는 맥주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소주를 붙고 내게 줬다. 그에게서 받은 술을 나는
"캬~~ 아."
한 모금 들이켰다. 목안 가득 시원함이 전해지고 빠르게 술기운이 올라온다. 나는 우리가 만들었던 돌담길에 걸터앉아, 목을 쭉 빼고는
" 자 이제 뇌물도 먹었으니 소원 말해봐요."
" 음 내 소원은 말이야. "
" 음..."
잔뜩 뜸을 들이며 얼굴을 붉히는 연우. 그런 연우의 얼굴을 나는 들여다 보며
" 응?"
그러자 연우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 음... 내 소원은... 모르는 사람과..."
" 미소야. "
" 네?"
" 우리 이 술 다 먹을 때까지 요기서 이렇게 있다가 가자. 그게 내 소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