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보세요... 미소야?"
" 흑흑흑.... 경윤아. 미안해. 아무리 생각해도 안될 거 같아. 우리 그냥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자. "
" 자 잠시만. 미소야. 무슨 일 있어?"
" 흑흑 흑흑."
" 난 괜찮으니까. 말을 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그게 나을 거 같아. "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은 가끔 산발적으로 끊어지며 나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은 까마득히 잊게 만들기도 하지만 되려 너무 생생하게 기억을 되살려 내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갔으면 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아마도 이 기차소리가 그릴지도 모르겠다.
" 쉬쉭~~"
" 다음 하차할 역은... 경원역 경원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나의 기억은 연우와 함께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 그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개굴개굴개굴개굴...."
그와 헤어지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유달리 크게 들리는 개구리 소리에 나는 잠을 설쳤다. 차라리 일어나 연우를 배웅이라도 해줄까.
때마침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 휙하니 나를 보호해 주고 휙하니 사라져 버리는 연우가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마음에다 더해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잠이 들려 누었다가 결국에는 기어이 일어나 그에게 전화를 하고는 새벽 첫 기차를 탄다는 그를 배웅하러 기차역으로 갔다.
" 너 서울 오면 꼭 연락해라. 진짜 내가 그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풀코스로 대접할게. 알았지?"
" 아 그래도 이렇게 배웅이라도 하니 그간에 미안함이 좀 가시네요. 잘 가요. 오빠."
"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알았지?"
" 걱정 말래도요."
그렇게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짧은 이별을 하고 다시 긴 이별을 한 그 새벽 밤하늘 별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플랫폼에 서서 콜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 이거였어? 나를 그렇게 밀어낸 이유가?"
영석이었다.
그는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제껏 기다려온 것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 선배 이제는 선배가 무섭네요. 나도 선배가 무서울 때가 있네."
" 이제 알았어? 나도 남자란 걸?"
그는 거칠게 나를 택시에 태웠고 그렇게 그의 손에 이끌려 역 앞 모텔로 갔다. 의외로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들어선 나를 보고 조금은 의아했는지 영석은
" 먼저 씻을래?"
그렇게 말했고 나는 아무 말없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옷을 입은 채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 한참을 울었다.
숱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부모님. 친구들. 선배들. 동기들.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그 손가락질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어느새 변해버린 그의 분노에 찬 눈동자였고 그 눈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짓누르고 있었다.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고 따랐던 그는 그런 눈을, 이글거리며 나를 집어 삼키고자 안달이 난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망가뜨린 것만 같아 가슴이 더 아프고 찢어졌다.
급기야. '이깟 몸뚱이가 뭐라고 그렇게 갖겠다는데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건지 그냥 줘버리자. '라는 마음이 들었다.
샤워기를 끄고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옷에 물기만 닦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런 나를 보고 영석은,
" 내가 그렇게 싫어? 그렇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내 앞에서 눈물을 그렇게 보인 건 처음이었다. 침대에 앉아 나를 끌어안은 그는 그렇게 울었고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었다.
그러자 그는 이내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옷을 벗고 나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눈을 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내 위에 쓰러져 한참을 울었다.
나는 일어나 젖은 옷을 입었다.
" 선배 안되잖아. 선배 그런 사람이잖아요. 왜 그래요. 나한테."
" 그런 넌 왜 그런 건데 도대체. 응?"
" 선배가 변한 거잖아. 선배가 흔들린 거잖아. "
" 내가? 애초에 선을 정한 것도 너였고 룰을 정한 것도 너였잖아. "
" 잘 지켰잖아. 그랬으면 지켜줘야지. 왜 왜 이제 와서 왜...!"
" 엉엉. 말했잖아.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 갖고 싶고 더 곁에 두고 싶고 탐이 나는 걸 날 더러 어쩌란 거야. 나도 이제 나조차도 주체가 안 되는 걸. "
" 그래서 내가 달아나잖아요. 내가 그럴 거라고 경고도 했잖아요. 왜 자꾸 나를 흔들어. 왜. 네가 뭔데 그래. 이 나쁜 놈아. 네가 뭔데. "
나는 그를 주먹을 때리며 흐느꼈고 그런 내 몸부림을 가만히 맞고만 있던 선배는 흐느끼며 나를 안았다.
" 어떻게 그럼. 이렇게 내 심장이 쥐어짜듯 아픈데. 미쳐 버릴 것만 같은데..."
어느새 그의 눈에 가득 찼던 독기는 사라지고 그는 너무나 아련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자 마음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그의 볼을 쓰다듬자, 그는 그 손에 거친 숨을 내쉬며 비벼댔고 이어 내 손에 키스를 했다. 나는 그에게 살며시 다가가 입을 맞추었고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눕혔고 그렇게 나는 그와 첫 관계를 가졌다. 간간히 나는 고통이 전해졌고 그 고통에 신음했다. 그 어떤 좋은 기분도 들지 않았고 떨림도 없었다.
그저 이런 나를 끌어안고 슬퍼하며 또 좋아하며 미안해 하는 그가 한없이 안쓰러운 마음이 가슴 가득 밀려왔다. 이런 내 마음이 전해진 건지 아니면 내 신음에 걱정이 된 건지 그는
" 괜찮아?"
라며 물어보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관계를 치르고 그의 품에 잠시 누었다가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모텔을 빠져나와 다시 기차역 앞에 섰을 때 문득 나는 경윤이 생각이 났다.
미친 듯 눈물이 났고 나는 경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자 선배는 커피를 뽑아서 내게 가져다주었다.
" 나 사귀는 사람 있었어. 방금 헤어졌어. 너 때문에."
영석은 그런 내게 미안해 하며,
" 미안해. 내가 잘할게."
" 아니 나 선배 안 만날 거야. "
" 미소야. "
"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선배. "
그는 방금 뽑아온 커피를 움켜쥐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 선배."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제발 제발 우리 이러지 말자. 응?"
난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에 둘렀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 나 선배 좋아. 하지만 이런 모습은 아냐. 선배가 가졌던 패기, 신념. 그 모든 게 다 사라진 지금 이 모습은 내가 알던 선배가 아니라고. 지금 내 모습도 선배가 알던 내가 더 이상 아니고. 그러니 난 더 이상 이대로는 못 가. 선배가 포기해. 나란 여자 원래 애초부터 이렇게 인정머리 없고 잔인하니까. 그렇게 기억하라고."
" 나 그럼 네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갈래. 그럼 되는 거야? 그럼 내 곁에 있을 거야?"
" 아니 이미 난 변해 버렸어. 이제 선배를 처음 만났던 그 이미소는 더 이상 없어. "
그렇게 말하고 나는 역에서 내려와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왔고 그는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돌아갔다.
"영석선배가 안 보이네? 미소야. 선배 못 봤어?"
" 선배 먼저 내려갔어요."
" 선배는 인사도 없이 먼저 가버리면 어떻게. 칫. 할 말도 있었는데. "
영은선배는 못내 아쉬운 듯 그렇게 마을에 돌아온 나를 뒤로 한채 민혁 선배에게 가서는 팔짱을 끼고 걸어내려 갔다. 마을에 돌아온 나는 여느 때처럼.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일정을 소화했다. 바쁘게 움직이고 심부름을 하며 다시 예전처럼 거짓 웃음을 짓고 그렇게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가슴 한편은 뻥 뚫려 버린 것 마냥 쓰리고 또 쓰려서 밤이면 술이 떡이 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채 몇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역에 다 와갔다.
" 뿡뿡~~~ 쉬이익."
" 다음 하차할 역은... 경원역 경원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기차역에서 내려 멍하니 서 있는데 역 앞에 경윤이 보였다. 경윤은 손을 들어 내게 흔들어 보였지만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흔들지 않았다. 경윤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 그를 지나쳐 갔다. 그러자 그가 나를 돌려세웠다.
" 미소야. 도대체 무슨 일..... 미소야."
나는 울고 있었고. 당황한 그에게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아 줘. 그냥 난 좀 피곤해서... 나 그냥 편하게 친구로 대해주면 안 될까?"
아무말 없이 그와 함께 탄 택시 안에서 나는 그렇게 창 밖을 바라봤다.
창에 비친 그는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나는 이런 따스한 그의 손을 쥘 자격이 있을까.
그의 마음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미친 듯 마음이 아파 왔다. 나는 또다시 한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스윽 내렸다. 그러자 그는 가만히 잡고 있던 내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동네에 도착했을 무렵, 차에서 내리자 그는 따라 내렸고 나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 놀이터로 가서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경윤은 근처에서 물을 사와서는 내게 건넸다.
" 고마워. "
" 밤 공기가 차가워. 들어가야지. 감기 걸릴라."
그는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나는 그 옷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경윤아. "
" 응?"
" 참 오래 걸렸지? 너에게 가는 게. "
" 아. 응. "
" 근데 미안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못갈지도 모르고. "
"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다만 아프면 아픈건 말해야 해. "
" 나.... 아파. 많이. 너무 아파."
" 어디....가?"
" 니가 내 곁에 있어서...차라리 멀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경윤은 내 등을 토닥이며 내 머리를 한쪽 어깨에 기대게 한채 그렇게 한참을 울고 있는 나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