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설치전-4 10화

4-10. 마음 없는 사람

by moonrightsea

" 다음 정차하실 역은 홍대 홍대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귀에 꽂은 이어폰 속으로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 안에서'란 곡을 듣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마도 다시 만난다면 저런 느낌일까. 어떤 느낌일까. '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옆에서 한참을 통화하던 정림이 나를 흔들었다.

" 가자. 애들 기다리겠어."



문득 정신없이 지내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나는 편입을 하여 졸업을 하고 서울에서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 합격 발표를 앞둔 시점이었고 친구들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한 상태였다.

정림은 교사가 되었고 권익은 대학4학년, 재림 선배는 스타트업회사에 입사를 해서 제법 회사가 나날이 성장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모임의 멤버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지방에 대학을 다녔던 친구들은 그리고 그곳에서 졸업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그곳에 있었지만 서울이나 인근 경기도로 온 친구들은 선배나 너나없이 동아리 멤버들이 모여 모임을 같이 이어가고 있었다.

나름 그들은 고등학교 때 공부도 제법 했었고 애초에 그 모임 자체가 논술학원에서 모인 멤버들끼리 만든 모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보내는 세상은 공기가 달랐다.


뭐랄까. 음 답답한 서울공기?


좁다랗게 이어진 골목길 사이를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은 제각각 이름이 특이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 재미가 있으련만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림의 손에 이끌려 가는 이 모임이 나는 그다지 좋지 만은 않았다.


" 미친년아. 네가 그 자리를 왜가? 가서 뭐 좋은 꼴 보려고."

서울에 올라와 희경과 같이 살면서 사흘 넘어 구박을 당하다 보니 이골이 날만도 한데 그날따라 희경의 구박이 너무 귀에 거슬렸다.

" 야. 좀. 그만 좀 해. "

" 가서 헛소리하면 벌떡 일어나 나와버려. 알았어? 정신 똑바로 챙기고."




정림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작은 바였다.

정림이 손을 흔들자, 아 겨우 아는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늘 길에서 마주치는 익숙한 정장차림. 서울시내 조금만 큰 대로변에 나가면 마주치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화이트 칼라들. 그 흔한 화이트 칼라들이 유독 내 주변에는 없었는데도 같은 하늘아래 조금만 벗어나면 이리도 쉽게 만났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진우 선배였다.


" 이야. 미소 오랜만이야. 너 못 알아보겠어. "

" 안녕하세요. 선배."

" 인사해. 여기는 우리 과 출신......"


그가 소개해준 친구들을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며 안면을 텄다. 물론 다 여자들이었다. 여자 나이 26살쯤 되면 대부분 대학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한 상태고 여유가 한창 생길 나이였다. 그래서 모임에 참석도 많이 하고 할 나이였고 반면 남자들은 한참 군대 갔다 와서 취업 준비로 바쁠 나이라 되려 얼굴 보기도 힘든 자리였다.


" 권익아. 여기"

" 이야. 미소 진짜 오랜만이야. 너 온다고 해가지고 내가 한방에 달려왔잖아. 반갑다."


권익이 와서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자 권익은 나를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재림선배가 도착을 하고 속속 모임의 멤버들이 도착했다.


" 응. 응. 어디라고? 아. 다 왔네. 잠시만."

한참 모임이 무르익어 갈 무렵,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권익이 밖으로 나갔고 그리고 다시 들어왔을 때 그의 곁에는 그렇게 경윤이 서 있었다.


" 오랜만이야. 이미소."

" 그렇네. 잘 지냈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그렇게 일행들 틈에 끼여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저 분위기 좋은 술자리.


누구 하나 취해 나가떨어지지 않고 내일을 위해 그냥 적당히 먹고 헤어지는 자리. 사뭇 대학 때와 달리 필름이 끊기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얌전하고 우아한 자리.


마치 누군가의 간택이라도 받기를 바라듯 마치 누군가와 썸이라도 타길 바라듯 그렇게 열심히 서로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그들의 일상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곳에 가려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마치 스캔을 뜨듯 띄엄띄엄 오가는 정보 속에 알 수 없는 싸인만이 오가는 모임.


난 왜 이런 모임이 그렇게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할까.


" 그래서 권익이 친구라고 했나? 대학원생이라고?"

" 네? 아 아니요. 언니 아직...."

" 어머 그럼 지금 한창 바쁠 텐데. 괜찮겠어? 이런 자리."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진우와 같은 과에 다녔던 저 여자 동기는- 사실 이름을 들어도 외우고 싶지조차 않았다만, 맥주잔을 높게 들고 홀짝홀짝 대며 술도 먹는 둥 마는 둔하며 연신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진우선배는 이미 학교 다닐 때부터 정림과 너무나 유명한 커플이었고 그런 정림이 데려온 내가 눈에 거슬린 건지 이 모임에 더 이상 여자는 안된다는 으름장인 건지 왠지 모를 묘한 시비 어린 말을 뒤섞어 농처럼 몇 마디를 더 던졌다.


" 정림아. 나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 "




" 뭐. 다들 막차시간 다돼 가서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면 돼. 조금만 더 있다 같이 가자. 이렇게 얼굴 보기도 힘든데 응?"

" 오늘은 가볼 곳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미안. 전화할게. 다음에 봬요. "


정림은 늘 그랬다.

빼곡한 스케줄을 정해 놓고 사람들을 채워두고 그 많은 약속시간 스케줄 사이사이 틈틈이 시간을 내어 나를 잠깐 만나며 다음 스케줄과 내가 겹치게 해서 나도 본의 아니게 그들의 리그에 들어가게 그렇게 일정을 잡아두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색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와 헤어지기 싫다는 그녀의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한 자리가 한두 번 이어진 게 아니라서 나는 매번 거절을 해왔다. 그러다 결국 정말 오랜만에 권익이와 아는 얼굴들이 많은 편한 자리라는 말에 옛 그리움에 문득 나도 모르게 응한 자리인데 기대와 달리 현실은 너무 가슴에 크게 와닿았다.


자리를 벗어나 골목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 미소야. 잠시만."

경윤이었다.


" 아. 경윤아. 잘 지냈어?"

" 나야. 잘 지내지. 후아. 미친 듯 뛰었네. 잠시만. 숨 좀 고르고. 후아."

" 괜찮아. 숨 쉬어. 기다릴게. "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시계를 보았다. 10시.

" 간다는 곳에 늦는 건 아냐?"

" 아냐. 괜찮아. "

" 그럼 역까지 걸을까?"

" 그래."


그렇게 천천히 역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래봐야 10분 채 안 되는 거리지만 시간은 왜 그렇게 느리게만 느껴질까.

" 아직도 복무 중이야?"

" 그렇지 뭐. "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방위산업체에 근무 중이었다. 군대에 안 가는 대신 방위산업체에서 근무를 하며 지내려 내가 다녔던 지방 대학을 간 그는 내년에 근무를 마치면 서울로 올라온다고 말했다.

" 아. 그렇구나. "

" 사귀는 사람 아직도 없어?"

경윤은 내게 대뜸 물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 있어 만나는 사람."

" 정말?"

" 뭐 하는 사람이야?"


" 백수"

" 응?"


" 너 들어가 봐야겠다. 나 이만 갈게. 담에 또 보자. "

그렇게 경윤을 뒤로 한채 나는 지하철에 올라 희경에게 전화했다.


" 나 오늘 안 들어가."

" 진짜? 진짜지? 너 절대 들어오면 안 된다. 미친년. "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끊고 다시 전화를 들어 연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오늘 방 하루만 빌릴게요. '




"오빠 왔다. "

호기롭게 다리를 꼬고 만화를 들고 늘어지게 누워있던 내 앞에 불현듯 연우가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서는 들어왔다.

" 무슨 짓이에요. 약속과 틀리잖아. "


" 무슨 약속? 난 약속한 적 없는데? 네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거지. "

" 뭐야. 또 여자 친구랑 싸운 거야?"


" 싸우긴 무슨 헤어졌어. 헤어져 버려."

" 웬일이래. 술이라고는 입에도 안 댄다고 했던 사람이. "

그는 술이 어느새 걸죽히 올라 있었고 상황을 보니 오늘도 여자 친구와 싸우고 온 모양이었다.


" 이러다 언니 알면 진짜 화내요. "

" 화내라고 해. 그까짓. 치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나서 어?"

" 오빠답지 않게 왜 그래?"


" 말하지 마. 아. 진짜 나 진짜 헤어졌어. "

" 헤어지긴 뭘 헤어져요. 얼마 전까지 없으면 죽내사내 하던 사이에..."

그는 내게 책상 위에 있던 청첩장을 집어 보여주고는 던져 버렸다.


" 시집간대. 나만 몰랐던 거지. 바보천치처럼. "

" 오빠..."


" 아니 오빠처럼 멋진 사람을 두고 그 언니 안 되겠네. 나쁘네. "

" 미래가 없대. 내가. 훗. 살다 살다 이런 이야기도 다 듣고. 휴우."




20살이 이후 간간히 서울 언니네 올라오거나 전화를 하며 안부를 전해 왔던 사이고 워낙 서로 비밀을 공유해 왔던 터라 간간히 듣기는 했지만 어쨌든 올해 초에 아마도 강원도에 데려간 그때가 결정적이었나 보다.


그 이후 둘이 싸움이 잦아졌고 제법 잘 사는 집에 시립단원이던 언니는 그냥 말로만 그런 줄 알았지 결국 그가 평생 페이닥터 생활하는 게 싫다고 헤어지자고 했다는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사람 일이 어쩌 될지 알고.


오빠는 늘 입버릇처럼 고향에 가고 싶어 했고 그곳에 개원을 하길 바랐다. 그게 본인의 꿈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소망과 현실은 너무 큰 괴리였을까.

그가 숙소를 두고 자취방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도 그녀가 굳이 그런 그의 자취방을 두고 오피스텔을 구해 나와있었던 이유도 알기에 나는 두 사람이 잘될 줄만 알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술이 취해 뻗어버린 그를 침대에 눕히고 그렇게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그의 코 고는 소리 때문인지. 간간이 들리는 그의 흐느낌 때문인지 밤이 깊어 가는데 눈은 말똥말똥 해졌다.


" 으음. 미란아.. 가지 마. 흑흑흑."

그는 흐느끼며 울다 코를 골다 반복했고 그런 그의 소리를 귀 기울이다 잠깐 잠이 들었나.

" 아얏."


" 아 깜짝이야. 뭐.. 뭐야. 어 "

그는 불을 밝히고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아 미안. 자 잠시만 급해서. "


화장실을 다녀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신 그가 이내 컵을 탁자에 탁 내려놓더니,

" 아 잠시만... 너 온다고 했었지. 내가 깜박했다. 미안. "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를 빼서는 그렇게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댔다.

" 어쭈. 내가 있는데 어디서 담배를..."

" 어쭈. 너 다 컸잖아. 인마."


" 오 이제야 제가 어른으로 보이시나 봐요?"

그의 힌티와 운동복을 갈아입고 머리를 글적이고 자다 깬 나를 본 그는

" 한잔 할래?"

" 콜"


그렇게 말하자 마치 준비된 듯 그는 냉장고에서 소주와 맥주를 꺼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거기에 소주 반을 채워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 같이 냉장고를 두리번거리다 비엔나를 발견하고는,


" 기다려봐요. 잠시만."

그렇게 말하고는 계란말이와 비엔나볶음을 후다닥 해서는 안주로 꺼냈다. 그렇게 차려진 안주상 앞에 우리는 '짠'하며 잔을 부딪혔다.


" 근데 내일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나 내일 오프야."


" 응? 왜?"

" 결혼식 가야 하거든. "


" 동기들이 빨리 결혼하는구나. "

" 아닌데?"


" 그럼? "

" 미란이"




" 미쳤어요? 거길 가게?"

" 응 가서 난장 피울라고. "

" 미쳤어. 미쳤어. 자자 술이나 더 퍼 마셔. 으 이 인간아."


그는 껄껄껄 웃었다.

" 농담이죠? "

" 고민 중이야. "

" 뭔 그런 걸로 고민해요. 포기해요. "


그는 내 말에 미동도 않고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어느새 캔을 하나를 더 따서는 다시 소주를 왕창 붙고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그런 그의 캔을 뺏어 마시고는

" 포기해요. 오빠. 오빠 망가지는 거 싫어. 제발. 이렇게 빌게. 제발 가지 마요. 소원이에요."


" 포기가 안돼. "

" 소원 이래도?"


" 소원? 흠. 네가 소원이라니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풋."


나는 연우의 말에 옛 추억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 아 그때? 풉. 그때도 봐 내가 오빠 소원 들어줬잖아요. 날 새서 같이 있기. 소원이 그거였죠? 마음 없는 사람과 날 밤새서 이야기하기?"

" 야. 너는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감이 안 오냐?"


" 에이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빠의 전적인 착각인 거지. 암."

" 아냐 아냐. 모르는 거 맞는 거 같은데?"

그는 강하게 부인을 하며 젓가락을 휘저었고 나는 그런 그의 젓가락을 방어하며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살짝 때렸다.


" 아직도 애 취급이네. 내가 왜 몰라. 마음 없는 사람과 키스하기 맞잖아."

" 어 어떻게 알았어? 쪼오금 비슷했어."


" 응? "

" 너 애 맞대도. 훗."

그는 이내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능청스레 맥주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 야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려서 내가 불현듯 머리에 스치는 생각을 나도 그냥 속으로 소원을 빈 건데 하도 네가 난리 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고. "


그렇게 수줍어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살며시

" 난 왜 그 전날 내가 오빠 덮쳤을 때.."

" 훗. 기억은 나냐? 네가 나 덮쳤다?"


" 이 오빠가 진짜.."

나는 주먹으로 그를 마구마구 때렸고 그는 그런 내게 등을 보이다 결국 내 손을 잡았다. 두근두근.

순간 얼굴이 빨개진 내가 그의 손을 바라보고 있자,


" 봐. 너 애 맞대도. 그때 내 소원."

그는 내게 입술을 가져다 볼에 가까이 대었다. 그리고 연이어 그의 입김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옅은 음성으로 '하아'하고 소리를 내자, 그는 이내 내게 입술을 가져와 키스를 했다. 부드러운 그의 키스. 그는 몇 년이 지나도 그때처럼 그렇게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을 가진 입술을 지녔고 입김을 머금은 남자였다.


그렇게 키스를 하고 조금 어색한 공기가 흘러, 나도 모르게 술을 쭉 들이켰다.


" 역시 선수는 달라. 솜씨가 여전하네. 여자 꼬시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야. 훅 갈 뻔했어. "


나도 모르게 손부채질을 하면서 마구 뱉어낸 말에 그는 갑자기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 요즘도 그렇게 남자가 싫어?"

나는 다시 술을 몇 모금 더 마시며,


" 만나봤어야 알지. 맨날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내가 투명인간이 잖아요. 헤헤."

" 네가? 어딜 봐서? 내 눈에는 이렇게 잘만 보이는데."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연우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당황하며

" 응 이 오빠 오늘따라 왜 이럼? 혹하게."


" 혹? 유혹?"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목에 손가락을 가져와서 세우고는 몸을 따라 쭉 천천히 내려갔다.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느낌.


" 으으으 소름."

" 싫어? 이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운동복 사이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살살 긁어댔다.


" 흐음. "

나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며 의자를 잡고 앉아서는 다리를 살짝 벌리고는 눈을 감았다. 뭔가 모를 나쁘지 않은 이 느낌은 뭘까. 묘한 느낌이 들려고 할 찰나, 그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서는 술을 마셨다.


" 야. 안 되겠다. 더 하다가는 내가 못 견디겠다."

그의 손길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나는 그에게 야릇한 눈빛을 보내며

" 응? 방금 그건 뭐죠? "

그러자 그가 술을 먹다 왈칵 쏟으며 벌헉 화를 내며,

" 야 너 자꾸 놀릴래?"


" 내가 뭘요."

" 야. 너는 정말.. 휴. 아니다. 됐다. 사람 정말 애간장 녺이는데 선수다. 선수. "

나는 그런 그를 턱에 손을 받친 채 물끄러미 바라보며

" 안 갈 거죠?"


그는 토라진 표정으로 안주를 휘이휘이 저으며 뒤적거리다 냅다 집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며

" 갈 건데. 나 잡지 마. 위험해. "


" 아 왜 좀 전까지만 해도 안 갈 것처럼 굴더니."

나는 그의 팔을 휘저으며 졸랐고,


무심한 듯 술잔을 들이켜던 그가 나를 보며

" 내가 안 가면 그럼 예전에 내가 너랑 날 밤 샜을 때 그때 내 소원 네가 들어줄 거야?"




잠깐은 망설였을까.

생각이란 걸 했을까. 아니면 그렇게 정해진 답이었을까.


떠올리면 그때 우리는 각자 답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경윤을 그렇게 거짓말로 다시 외면한 뒤였고 그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낸 뒤였다. 어쩌면 이런 각자 마음에 서로에 대한 마음은 정말 '마음이 없던 사람'이란 그 말처럼 공통된 화두로 떠오르며 서로에게 그렇게 불꽃처럼 마음속에서 일렁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더는 말도 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그 순간은 적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했다.


마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 나는 굳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다가와 키스를 하며 천천히 내 흰 티를 들어 올리고 그런 그와 키스를 하며 나는 두 팔을 들어 올렸고 그는 내 등 뒤의 훅을 풀었다. 그가 지나가는 손끝마다 곤두서듯 쭈뼛거리며 짜릿해 오던 감각들은 적어도 내가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온 신경이 그의 손에 집중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나와 키스를 하며 그녀와의 키스 장면을 떠올리는지 그가 어떤 상상을 하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그가 거친 숨을 내 쉬며 연신 간간히 떨리는 손으로 나를 안타까운 듯 때로는 아끼듯 그렇게 천천히 내 몸을 타고 더듬을 때마다 나는 적어도 그에게서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의 두터운 입술이 연신 내 입술에 덮쳐와서 몇 번을 나를 밀치고 내가 탁자에 올라 그에게 다리를 벌렸어도 그는 급하지 않았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가끔씩 호흡을 가다듬고 가끔은 눈이 맞은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관계를 이어 갔다.

그의 방 침대 위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그가 탐닉하는 내 몸을 내려다보며 문득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였나 의문이 들정도로 그는 애타게 나를 갈구했고 그 마음이 온몸에 전율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가 더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어 나는 내 마음에는 안중에 두지 않고 내 신경에 내 감각에 더 집중했는지 모른다. 그가 탐하는 내 가슴에 내 몸에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파르르 떨리는 내 몸짓에 조금은 거칠었다 조금은 과감했다 그가 내뱉는 신음에 탄성에 나는 어느새 도취되어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그렇게 관계를 끝내고 그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키스를 하였고 스르르 잠이 들어 아침 새소리에 깼을 때 나는 그의 품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었다. 눈을 뜨자 그가 한팔로 머리를 받치고 팔을 가지런히 몸에 붙인채 쭈그리듯 이불을 움켜쥔 채 부끄럽게 올려다보는 나를 따스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아침 안 먹을래? 뭐 해줄까? 게란 프라이?"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제야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눈만 내밀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훗. 귀여운.. 기다려봐. "

그제야 그는 일어나 옷을 입고 화장실로 갔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 어디 가요?"

" 너 맛있는 거 사 먹이러. 오늘은 나랑 아침 먹고 점심까지 먹고 헤어져야 해.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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