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만남.
정림의 전화를 받고 나는 버스에서 내려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걸려온 전화.
" 그래 가지고... 근데 너 오고 있는거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늘 붙어 다녔던 정림이 내가 화실을 가고 한동안 얼굴을 못보고 한 통에 오랜만에 온 전화라 나는 눈물을 훔치고 환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고 내게 전화를 한 그녀는 지금 동아리 모임에 가는 길이며 내게 꼭 오라고 했다.
이유인 즉슨, 오늘 가면 정림이 평소 내게 전화로 들려주던 그녀의 이상형을 볼 수 있고 또 그런 그의 앞에 혼자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고 무엇보다 동아리 맴버가 우리학교는 우리 둘뿐이라는 이유였다.
나는 동아리에 든다고 한적은 없지만 정림의 용기에 힘을 보태고자 선뜻 울적한 기분도 달래고자 그렇게 화실로 향하지 않고 그녀가 알려준 그곳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흩날리는 어여쁜 꽃잎. 도로 위는 어느새 꽃길로 변해 있었고 창가로 전해지는 산뜻한 바람은 어느새 내 머리결을 흩날리며 그렇게 내 기분을 한층 달래 줬다.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는데 뒤늦게 누군가 내 어깨를 밀쳐 앞으로 내렸고 나는 그를 보자
" 아 죄송합니다. 늦어서요. "
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신 바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천천히 이어진 꽃잎이 떨어진 길을 따라 정문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정림이 나를 불렀다.
정림이 부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운동장 가 등나무 벤치 앞에 고교생 20여명 가까이가 서 있었다. 제법 멋을 낸 듯 남방에 머리는 무스로 세운 남학생들부터 멀리 서 있는 내 눈에 확 들어오는 얼굴이 희고 뽀얀 이목구비가 선명한 예쁜 여학생. 그리고 그 곁에 또 한무리의 여고생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 질러 정림의 곁으로 향했다.
나를 빤히 보던 한 남학생이 달려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반갑다. 정림이 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정림이 짝이었다고? 나 이우진. 경원고3학년 학생회장이야. 반가워. "
" 안녕하세요. 청림여고 2학년 이미소에요."
" 그럼 소개는 이쯤에서 하고 저기 가서 마저 할까? "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잡고는 무리가 모인 곳으로 안내했다. 그런 그의 손을 살며시 빼고 나는 정림의 곁에 다가가자,
" 자 그럼 다 모인 것 같은데 우리 뒤에 등나무 아래로 이동해서 마저 이야기 하자. "
우진의 말에 모두 일사분란하게 일어나 등나무로 이동했고 등나무 벤치에 여고생들이 앉자 그 뒤를 남학생들이 쭈욱 애워쌓다.
" 자 그럼 하던 이야기 마저 하지. 다 왔으니. 우선 아까 말한대로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고 다음주에 발표할 시를 말하면 돼. 우선 우리 동아리가 한글동호회이니 만큼 한글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자는 의미에서 의미있는 시간으로 시를 먼저 알아보고 그다음은 소설, 그다음은..."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정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더니 '왜'란 입모양을 한 채 짓꿎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 저 사람이야? 우진? 니가 전화로 말했던?"
" 크큭. 완전 멋지지 않아? 아 내 이상형이야."
" 조용히 좀 하시죠. 으음. "
어느새 내 뒤에 서 있던 남학생이 눈치를 주며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 정림과 나는 연신 크큭 댔다.
우진이 간략하게 동아리에 대해 설명을 이어 하고 난 뒤 연락처를 어느새 다가와 우리 뒤에 서 있는 남학생에게 넘겼다. 그리고 우진은
" 난 이쯤에서 먼저 일어 날게. 과외가 있어서. "
아쉬워 하는 정림의 뒤. 연락처를 건네 받은 남학생은 이내 모두의 시선이 몰린 게 어색했는지 머리를 한번 쓱 쓸어 넘기고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 안녕. 난 김권익이라고 해. 경원고 2학년 부회장. 반가워. 내가 발표할 주제는 만남이야. 그럼 선배가 하던 진행을 이어서 할게. "
" 우선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음 경원고 부터 하고 무학여고 2학년 하지. 경윤이부터."
권익의 소개로 고개를 돌려보니 내 뒤에 서 있던 또 한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버스정류장에서 부딪혔던 사람.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훨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미. 뚜렷하고 큰 눈망울. 깊게 파인 눈메에 우수에 젖은 눈빛. 그리고 짙은 쌍커풀, 짧게 자른 스포츠형 머리. 한눈에 봐도 얌전해 보이는 첫인상.
그의 두 볼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고 그런 얼굴을 두 손으로 한번 스윽 만진 그는 자연 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 보며 어깨를 흔들자, 나를 슬며시 내려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당황하는 가 싶던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 안녕. 나는 김경윤 경원고 2학년. 잘부탁해. 내가 발표할 주제는 ..."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떨어뜨려 경윤을 바라보던 내 눈과 마주치자 그는 이내 눈을 허공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음, 음 이렇게 목소리를 가다듬어 가며 약간의 떨린 음성을 진정시켜가며 설명을 마무리 했다.
" 그럼 다음은 무학여고 아린이 할까?"
모두의 시선은 일순간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던 그 여학생으로 향했다.
얼굴이 희고 자그마한 계란 형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약한 갈색빛을 도는 긴 머릿결.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에 좁은 어깨. 가녀린 아린의 목선이 길게 내려온 곳에 하얀 블라우스가 돋보이는 예쁜 짧은 미니 청치마.
모두 감탄을 하며 아린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안녕 난 무학여고 2학년 강아린이라고 해. 내가 발표할 주제는 이별이야. 다들 아는 얼굴도 있지만 잘 부탁해."
그 순간 남학생들이 '와'하며 박수를 쳤고 그런 그들의 함성에 가까운 외침을 뒤로 무학여고 여학생들이 발표를 이어갔다. 어느새 경원고 남학생들도 발표를 마치고 정림의 차례를 지나 내 차례가 되었다.
" 안녕? 난 청림여고 2학년 이미소라고 해. 동아리는 정림의 소개로 오게 되었고. 이렇게 만나 반가워. 내가 발표할 시는 이상의 오감도이고 한글을 알아가는 동아리라고 하니까 나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볼게.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해. "
'와' 남학생들의 박수 뒤로 권익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내게 다가와
" 오 말 잘하는데? 좀 한다?"
" 내가 괜히 데려 왔겠어? 내친구거든?"
정림이 어깨를 으슥하며 나를 바라봤다.
" 안녕? 이미소야. 앞으로 잘 부탁해. "
" 아 인사가 늦었지? 나 김권익. 야. 반갑다. 전화번호 좀 알려줘. 동아리 관련해서 상의도 할겸. "
" 나?"
그렇게 말하며 그를 올려다 보자, 권익은 어느새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내가 그에게 번호를 적어주자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고 내 폰이 울리는 걸 확인하고서는 손모양으로 전화를 건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다시 앞으로 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 그럼 우리 모임은 여기서 마무리 하고 학교 아래 떡복이집이 있는데 거기 말해 뒀으니까 이제 그리로 이동할까? "
팔짱을 끼고 천천히 무리 뒤를 따르며 정림이 말했다.
" 난 걱정했는데 그래도 네가 와줘서 너무 좋아. "
" 넌 좀 아쉽기는 하겠다. 우진선배 그렇게 가버려서. "
" 아냐. 우진 선배 과외 끝나고 바로 온다고 했어."
" 그래? 언제 연락했는데? "
그러자 그녀는 후훗 웃어 보이며 내게 V표시를 했다.
" 뭐야. 무슨 사이라도 벌써 된거야? 그런거야?"
" 아냐. 아직은 아직은 서로 공부에만 집중하는 거니... 그냥 뭐 과외샘이 같다 보니 소식을 알고 지내는 정도?"
" 아 난 또... 암튼 진전 생기면 연락해. 난 가야해서 "
" 뭐야? 벌써 가게? 그럼 떡복이는?"
" 난 괜찮아. 안먹어도 충분해.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좀 그래서... 그냥 그림이나 그리러 갈려고."
" 뭐야. 화실에 보물이라도 숨겨 둔거야?"
" 아냐. 그런거. 후훗. "
" 수상한데? 너?"
" 나 간다."
흩날리는 꽃잎을 차창을 열어 살며시 받았다. 그리고 책 사이에 꽂았다. 아름다운 꽃잎. 이 봄이 유난히 설레이는 이유는 뭘까?
화실에 도착하자 마자 나는 단숨에 달려서 올라갔고 계단 입구에서 헉헉거리고 있는데 어느새 희경이 다가왔다.
" 야 너... 아까 동아리 있다며 여길 왜 와?"
" 아 그냥. 기분이 좀 그래서 그냥 그림이나 그리고 갈려고."
" 미친년. 내가 그런다고 니맘 모를줄 알아?"
" 뭐? 내가 뭘"
" 칫 안봐도 다보여. 이년아. 후훗. 좋을 때다. 딱 그때가. "
" 뭐래. 괜한 상상 말고. 니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냐. 오늘은 아침부터 좀 그래 할머니때문에. "
" 쳇. 난 또 너랑 나랑 어쩜 이리 똑같냐. 나도 마찬 가지거든. 어떤 재수없는 인간이 아침부터 지랄을 떨어서... 아 밥맛 떨어질려고 그래. 너 밥은 먹었어?"
" 음. 난 별 생각없어. 밥먹으려고?"
" 아 나도 그닥. 그냥 바람이나 쐐러 가야겠다. "
" 간다고? 어딜? 나를 두고?"
" 뭐래. 미친년. 칫. 가긴 어딜가겠냐? 가봐야 장원고 앞이지. 비켜봐. 늦었어. 또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난 간다."
희경은 나만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데생 실기실로 들어갔다.
사각사각 연필소리.
그림을 보고 있어도 영 집중이 안되었다. 머리는 그저 혼란 스럽고 귓가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연신 들리는 것만 같아 마음이 상해 있었다. 마치 억지로 먹은 고구마가 목구멍에 탁 기분.
" 휴우. 아직 안갔네? 오늘은 왠일로 늦게까지 있구나?"
고개를 돌려 보니 성현이었다.
" 선배가 이시간엔 어쩐 일로. 3학년 실기 끝나지 않았어요?"
" 응. 아까 끝났지. 넌?"
" 아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림이나 그리려구요."
" 근데 왜 아까부터 자꾸 선배 선배 그래?"
" 아 죄송해요. 제가 또 그랬어요?"
성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는 그렇게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 아 미안. 미안해요. 정말. 성현오빠. "
" 훗. 미안하면 밥 사던가."
" 네? 식사 안하셨어요? "
성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게 나가자고 신호를 보낸뒤 내손에 잡혀 있던 연필을 내려 놓은 뒤 근처 김밥 집으로 향했다.
" 뭐 먹을래? 뭐 좋아하지?"
" 음... 전 그다지.. 성현 오빠는 뭐 드실거에요?"
" 여기는 콩나물 김치 라면이지. 넌?"
" 음. 저도... 같은 거 먹을게요. "
" 여기 콩나물 2개랑, 김밥 1줄요. "
아까부터 주문한 요리가 나와도 젓가락을 쿡쿡 쑤셔 가며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나를 본 성현은
" 왜 입맛이 없어?"
" 아...오늘따라 그렇네요. 어서 드세요. "
" 훗. 계산은 신경쓰지마. 내가 이미했어. "
" 아 오늘은 제가 살건데... 미안해요. 제가 잠시 딴 생각 하느라. "
" 그래 임마. 너 얼마나 혼자 멍하니 있었는지 라면이... 아주 퉁퉁 불었어."
그의 말을 듣고 보자 내 라면은 이미 퉁퉁 불어 있었다.
" 훗. 라면이 안넘어가? 그럼 내가 먹을게. 괜찮지?"
" 아 드세요. 전 괜찮아요.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내 입에 김밥 하나를 밀어넣었다.
얼결에 문 김밥을 오물 거리며 천천히 씹기 시작하자,
" 잘 먹네. 후루룩. 캬아. 맛있다. "
그렇게 맛있게 라면을 먹는 그를 보며 내가 방긋 웃자
" 이야. 이런 취향이구나? 후훗. 알았어. 후루룩."
그는 연신 면을 칼치듯 먹어 대더니 어느새 금방 라면을 비워 버렸다.
" 우와. 진짜 잘드시네요?"
" 뭘 이런 걸 다..."
그가 말하려는 찰라, 나도 김밥을 들어 그의 입에 넣었다.
얼결에 내가 넣어준 김밥을 한입 먹은 그는 크큭 대며 웃었고 그런 그를 보고 나도 푸훕 하며 웃었다.
그렇게 둘이 마주보고 한참을 웃고 난 뒤,
" 웃으니 이쁘기만 하네. 그리 인상 안써도 되는데..."
" 자 가위바위보."
얼결에 내민 그의 손에 나는 보를 내었고 그는 가위를 내었다.
" 후훗. 니가 졌다? 자 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고 넣을동 말동하며 애간장을 녹이더니 그는 한입 먹는 척 하더니 내입에 쏙 밀어넣었다. 오물오물 열심히 씹으며 그를 보며 방긋 웃자,
" 아이고. 밥 먹이기 힘들다? 다시? 가위바위보."
그렇게 그와 김밥 한줄을 나눠 먹고 다시 화실로 향해 가서 짐을 챙겨 내려왔다. 그는 맞은 편에서 버스를 타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내 곁에 서서 있었다.
" 저기서 타셔야 하는거 아니에요?"
" 응 오늘은 너 바래다 주려고. "
" 아. 안그래도 되요. 저 버스 타면 진짜 금방이에요. 저 데려다 주심 막차도 없어요. "
" 후훗. 알았어. 그럼 너 버스 타는 동안만. 있을게. "
혹여 성현이 따라 올까봐 안절 부절하다 집에 간다는 말에 휴우 하고 한숨을 쉬자, 그가 푸훕 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 너 너 말야? 네 이름이 왜 미소인줄 알아?"
" 네? "
" 넌 묘하게 사람을 웃게 만들어. 아주 편한해 지게 말야. 널보면 미소짓게 만들고 즐거워 지거든. 그런 네가 그렇게 온 종일 뚱해 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데... 이제야 기분이 풀린 거 같아. 안심이 돼."
" 훗. 성현오빠 오빠는 은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어요"
" 내가? 어떻게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곁에 바짝 다가 서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 바로 이거. 괜히 사람 설레이게 하고... 안그런 척 하면서 말도 잘하고. "
당황한 그는
" 크하하하. 와 이 타이밍을 ... 이렇게 넘기는 구나. 너는?"
" 응? 무슨 ... 타이밍요? "
" 후훗. 아냐 아무것도 오늘 너때문에 내가 몇달치 말을 한거 같은데?"
" 칫. 말만 잘하면서 왜 제 핑계를 대요? "
" 그러게. 나 그리 말도 많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참 신기해. "
" 뭐 말만 잘하시는 구만. "
" 후훗. 귀여워. 이제 말도 막 놓고?"
순간 당황한 나는
" 엇 제가 언제 말을 놨다고 그래요? 성현오빠는..."
그러자 성현은 내게 더 얼굴을 가까이 대고 귀에 소근댔다.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 음 다음에는 말이야. 오빠랑 말할때는 편하게 말을 놓고 해봐. 그럼 더 가깝게 이렇게 느껴질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게 손짓을 하며,
" 저기 니네 집 가는 버스 맞지? 잘가. 내일보자."
그렇게 말하고는 횡단보도로 달려가 길을 건넜다. 그리고 내게 다시 손을 흔들었고 나는 후다닥 버스에 올랐다.
' 와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왜 이리 사람을 들었다 놨다해. 안그래도 정신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