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르르릉"
" 여보세요?"
전화가 울려 받으니 낯선 남자 목소리. 나는 무심결에 끊으려는데.
" 너는 내가 전화번호를 준지가 언젠데 전화를 안 해. 내가 전화해야 받냐?"
" 누구세요?"
"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나야 권익이. "
" 아... 김권익? 네가 웬일이야?"
" 아니 다른 애들은 다들 나한테 발표주제 다 알려주고 먼저 연락도 하는데 너는 왜 연락을 먼저 안 하고 내가 먼저 연락하게 만드냐?"
" 뭐 발표 주제야 정림이 너한테 미리 알려준다고 말했고 정림이한테 연락 안 받았어?"
" 응 받았어."
" 그럼 내가 굳이 너한테 연락해야 해?"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너 혹시 나한테 마음 있는 거야?"
" 아 아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아니 그게 아니면 무슨 믿고 끝도 없이 대뜸 전화해서는 화를 내고 말이야. "
내 거침없는 말에 조금 당황한 듯한 권익이
" 그거야 네가 하도 연락이 없으니까. 그렇지. "
" 고등학생이 한가한가 보네? 나 평일에 화실 가느라 늦게 들어오고 주말이면 독서실 갔다가 화실 가는데 친한 친구랑도 통화하기 힘든데 친하지도 않은 너한테 전화할 일이 뭐 있냐? 안 그래?"
" 그렇기는 하지. "
" 그래. 그럼 되써. 용무는 끝났지? 끊을게."
" 야야. 잠깐만. 그 그렇다고 이렇게 끊는 게 어딨냐? 나 참 어이없어서..."
조금은 토라진 듯한 권익의 목소리.
나는 그제야 긴장감을 푼 채 조금은 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야. 전화는 좀. 매너 있게 시작을 해. 처음 전화를 하면 응? "
" 뭐 내가 매너 없이 한 건 어딨다고."
" 어쭈? 다짜고짜 화낼 때는 언제고."
" 내가 그랬어?"
" 응. 아주 황당하게. "
" 아... 미안해. 근데 너 진짜 말 잘하네. 순간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어떻게 할지 몰랐어. "
" 이제야 말을 좀 편하게 하네. 어쩐 일이야?"
" 그게..."
그렇게 권익은 느닷없이 수요일 밤 10시가 넘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리고는 한참을 통화했다.
모임에서도 이내 자리를 떠 버렸던 내가 궁금했던 권익은 내가 그만 두면 정림도 그만둘까 봐 노심초사였고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모임에 나오게 할 목적으로 전화를 한 것이 어느새 하루 이틀 통화를 지속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미주알고주알 온갖 이야기를 내게 스스럼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권익과 친해지고 보니 권익은 꽤나 반듯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재미있는 말솜씨를 지닌 남학생이었다.
화실로 가니 희경이 내 팔을 끌어 비상구로 향했다.
" 야. 어떡하냐. "
" 왜? 무슨 일이야?"
" 그게... 우혁이 나한테 쪽지를 줬는데 내가 버렸어."
" 무슨 말이야. 그게. 자세히 좀 말해봐. "
" 아니 내가 버스를 탔는데... 그날 왜 나 새아빠가 전화 와서 간 날. 거기 버스에 우혁이 버스에 타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가서 대뜸 전화 왜 안 받았냐고 따졌거든?"
" 그랬더니?"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이내 성현과 형식의 무리가 들어왔다.
" 오 이게 누구야. 미소 아니야? 요즘 우리 성현이 미소한테 다정스레 미주알고주알 온갖 이야기 다 한다며? 꽤나 친해진 모양이던데"
형식은 그렇게 말하며 음흉한 눈빛으로 성현의 목에 헤드락을 걸며 바라보았고 그러더니 이내 나와 성현 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 벌써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희경이 한테 이야기한 거야?"
형식이 그렇게 말하자 당황한 성현이 형식의 입을 막으며
"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런 거 아니야. "
그렇게 말하며 당황해했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 괜한 오해 말아요. 그냥 우리끼리 비밀 이야기 한 것뿐이니까. "
그렇게 말하며 희경을 바라보는데, 형식의 곁에 있던 눈치 없는 민식이
" 뭐 미소가 오지랖이 넓긴 하지. 미소가 사람을 좀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어서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잖아?"
그렇게 말하며 성현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희경이 이내 못마땅한 얼굴로
" 오빠들은 별 걸로 다 시비네. 그냥 내 이야기한 것뿐이거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자. "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이끌고는 비상구를 나왔다.
비상구를 나온 희경이 내게 조용히
" 야 너 성현이랑 벌써 그런 사이인 거야?"
" 아냐. 무슨 말도 안 돼. 그런 거 아니거든?"
내가 희경에게 그렇게 말하자 희경은 이내 가느다란 의심의 눈초리로
" 오 너... 수상해."
화실 수업이 끝나 계단을 따라 2층으로 내려오는데 누군가 시끄러운 노래방복도로 내 팔을 급히 이끌어 바라보니 성현이었다. 시계를 보니 9시 55분.
성현의 팔에 이끌려 노래방 복도 제일 끝으로 갔다. 평일이라 복도 제일 안쪽 방하나가 비어 있자 방하나에 문을 빼꼼 열어본 성현은 급히 나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 아까 미안해. 희경이랑 이야기 중인데 불쑥 들어가서..."
" 아니 괜찮아요. "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자 성현은 나를 바라보더니
" 아니 내 말은... "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노래 사이로 성현은 이내 뭐라고 말을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 잘 안 들려요. "
" 내 말은 그러니까. 너한테 먼저 말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그러자 성현은 답답한 듯
" 내가 형식에게 상의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어쩌다 보니 먼저 말을 하게 된 바람에 형식이 알게 돼서..."
노래방 노랫소리는 더 커지며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고 성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안 들렸다.
나는 귀를 한번 후벼 판 뒤
" 성현오빠. 잘 안 들려요. 차 시간 늦어서 가봐야 해요.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성현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후~ 우 하고 쉬더니
" 암튼 오해 안 했으면 좋겠어."
내 팔을 잡고 있던 성현의 손을 살며시 푼 채
" 저 그만 가볼게요. "
" 그래 그럼 일요일에 봐. "
" 저 일요일은 화실 못 와요. 일이 있어서. 월요일 봬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데 성현이 내 팔을 다시 잡았다. 그런 성현의 손을 살며시 풀며 그를 바라보자 성현은 이내 아쉬운 듯 무엇인가 말하려더니 이내 입을 닫았다.
나는 그런 성현을 뒤로하고 급히 그 방을 나왔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성현이 한 말이 메아리치듯 계속 울려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성현의 말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오해 안 했으면 좋겠다는 말. 그리고 성현이 보였던 그간의 행동들.
그의 말과 행동은 내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는데 그는 도대체 뭘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지?
이내 울리는 전화. 권익이었다. 권익은 아침에 여동생과 있었던 실랑이에 대해 열을 올리며 내게 토로했다.
" 야. 너는 여동생이 있는데 너무 한 거 아냐? 옷은 입구 다녀. 아무리 집이라도."
" 뭐 어때? 말만 여동생이지. 그 애도 어려서부터 워낙 내가 팬티만 입구 집에서 돌아다녀서 신경도 안 써. "
" 그래도 그렇지. 아침마다 남자들이 그러면 나 같은 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럽다고."
" 야 아침부터 변태 소리 들은 나는 얼마나 당황스러운 줄 아냐?"
권익은 흥분을 해서는 난리였다.
" 그런 당황스러움은 여자와 틀리다니까. 자고 있는데 이불을 막 들추고 말이야. 당황스럽기는 남자인 우리가 더 당황스럽지. 안 그러냐? 니들도 다 배우잖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여자들이 더 뻔뻔한 거지. 그렇게 당황하는 우리를 놀리는 거잖아. "
" 칫 암튼 남자들이란. 불리할 때만 그렇게 말하지. 늘."
권익은 처음 나와 통화한 이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 시간에 전화를 했고 그렇게 전화가 오면 우리는 잠들기 전까지 꽤나 길게 수다를 떨다 잠이 들고는 했다.
오늘따라 유독 남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권익의 전화에 나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던 성현의 행동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졌다.
" 근데 말이야. 남자들이 관심 있는 여자들에게 행동할 때 고백도 안 했는데 말도 막 편하게 하고 스킨십도 자주 하고 그래?"
내가 그렇게 묻자 갑자가 권익이 당황하며,
"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좋아하는데 어떻게 말을 막 편하게 하고 스킨십... 어? 아니. 어떤 놈이 스킨십을 막 하고 그래?"
"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네가 상상하는 그런 스킨십 말고 막 손을 덥석 잡고..."
권익이 이내 흥분한 채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 뭐? 손을 덥석 잡아? 어떤 놈이 함부로 손을 덥석 잡아? 뭐 하는 놈인데?"
" 음.. 그러니까.. 아 어떻게 된 거냐면... "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으면 충분히 오해를 할 수 있는 내용이라 나는 그간 있었던 성현과의 이야기를 권익에게 설명했고 권익이 열심히 듣더니 이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 야. 오해하지 마. 뭐. 남자들은 관심 있는 여자들한테는 고백부터 하지. 암. "
" 그래? 그렇지? 그 선배... 그냥 나랑 친해서 그런 거 맞지?"
내가 권익에게 그렇게 물어보자
" 당연하지. 암. 아니 그냥 네가 편하게 말도 잘 들어주고 하니까 너한테 그렇게 말도 편하게 하고 하는 거지. 뭐 고백도 안 했는데 신경 쓰지 마. 그 자식... 아니 그니까 그 형은 너한테 관심 전혀 없어."
" 관심 있으면 어떻게 행동하는데?"
" 보통은 관심 있으면 남자들은 막 멋있어 보이려고 말도 적게 하고 근엄한 척. 막 여자를 보호해주려 하고 음 그러니까. 매너 있게 응? 그렇게 대하잖아."
" 그니까. 그 선배도 그렇게 대하는 건 맞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내 권익은 더 흥분한 채
" 아냐. 아냐. 절대 아냐.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래도. 그냥 네가 여동생 같아서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 뭐 멋있어 보이려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 뭐 그러냐? 너한테 말도 편하게 하고. 고백도 안 하고 자세가 틀렸어. 아니 아니지. 그 자식.. 아니 그 형 너한테 전혀 관심 없다니까. 전혀 신경 쓰지 마. 고3이 공부는 안 하고 말이야. "
권익의 말에 나는 문득 그가 고3인 것이 기억이 났다. 맞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야 우리도 이제 그만 전화 끊어야겠다. 우리도 이럴 때가 아니네. "
" 응? 왜 벌써? 아직 잘려면 멀었는데?"
" 늦었어. 벌써 12시 반이야."
" 아니 나 잠도 안 오는데..."
" 어서 자. "
" 아 알았어. 잘 자. 그럼 모래 전화할게. "
" 아냐. 주말에 보잖아. 주말에 보면 되지. 그때 봐. "
" 응.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