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실 문이 다릅니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꽤나 시간이 걸렸다. 15분 넘게 남짓 한참을 달린 듯 오른 오토바이가 멈춰 자취방이 늘어선 곳에 들어서자, 이미 경원여고 명숙이과 지영이 도착해 있었다.
" 들어가자. "
" 어서 와. 멀어서 고생했겠네?"
" 아냐. 빨리 왔네?"
내가 명숙을 바라보며 말하자 명숙은 씩 웃으며
" 뭐 자주 오던 곳이라 괜찮아. 그죠. 오빠... 아니 샘?"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자 당황한 재민샘이
" 집이 남자들만 사는 곳이라 별 볼 것은 없어. 앉아. 떡볶이 가져올게. "
샘이 그렇게 말하자 어느새 곁에 다가온 명숙이 내 팔짱을 끼고는 샘 방을 한 바퀴 돌며 보여주었다.
" 남자들 사는 곳 치고는 깔끔하지? 우리 엄마가 시간 날 때마다 와서 맨날 청소하고 빨래 치우고 일도 아냐. "
" 아... 어머니도 자주 오시는구나. 샘이랑 다들 친하게 지내시나 봐?"
나는 천천히 집안을 둘러봤다.
한쪽 벽면에는 옷걸이에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 모자걸이에 야구모자와 점퍼들이 걸려 있었다. 다른 쪽 벽면은 책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 위에 모니터와 컴퓨터. 그리고 그 뒤로 벽면에 붙은 각종 공모전 포스터. 그 옆으로 놓인 탁상 선반. 시계. 그리고 책상 위에는 액자가 놓여 있었는데 웬 남자 셋이 오토바이 위에서 한껏 멋을 내며 찍은 사진. 사진에서 시선이 멈추자 명숙이
" 여기 이 사람. 이 사람이 우리 오빠야. 명욱. "
" 오빠랑 샘이랑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야. 우리 오빠가 방황할 때 재민샘이 정신 차리게 해 줘서 엄마가 고맙다고 맨날 재민샘 집에다 반찬이며 먹을 거 가져다 놓고 우리 오빠도 여기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거지 뭐.
웬 미친년 하나가 들러붙어서는 재민샘 괴롭히는 바람에 지들은 맨날 서로 지켜준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맨날 모여 술만 쳐 마시고. 대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 재민샘 말고는 아직 다들 인간이 덜 되었어. "
" 아 그래서 너랑 샘이랑 잘 아는구나."
" 응. 그래서 내가 거기까지 화실 다니는 거잖아. 맨날 엄마 심부름으로 여기다 반찬 가져다 나르고 "
그렇게 말하며 명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내 욕 그만하고 이제 그만 좀 이리 와서 앉지? 떡볶이도 다 되었는데."
방과 구조가 같은 듯 보이는 거실로 나가자 어느새 지영이 부지런히 신문지를 깔고 떡볶이와 순대를 준비해 뒀다. 나는 곁으로 다가가 나무젓가락과 숟가락을 자리에 두었고 그 옆으로 음료를 명숙이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부산스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들어왔다.
" 샘 뭐가 이리 멀어요. 한참을 걸어 올라왔잖아요. 어 벌써 경원여고 애들이 와 있었네?"
고개를 들어 보니 진아여고 애들이었다. 손에는 과자를 한 봉지씩 사들고 와 있었고 이내 안으로 들어와 둘러앉았다.
" 와 차리고 보니 진수성찬이네. "
아이들이 저마다 감탄을 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 진수성찬은 무슨 이렇게 부실해서야 되겠어? 이 자식 이 아리따운 여학생들 틈에 있으려고 그렇게 나보고 못 오게 한 거였구먼."
웬 남자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 위 사진에서 보았던 명숙의 오빠가 서 있었다. 그 곁에 다른 친구 몇명과 함께.
당황한 명숙이
" 오빠 여기 왜 와? 여기 우리 송별회 자리인데!"
그러자 능청스레 명욱이 명숙을 한번 쓱 바라보고는 윙크를 날리고 웃었다.
" 왜 오긴. 내 동생 지키러 왔지. 응?"
황당한 듯 바라보던 재민샘이
" 야 오늘은 내가 방 하루만 빌려 달라고 했잖아. 손님 온다고. 이 시간에 왜 왔어?"
" 니 방인데 뭘 빌려주냐? 빌려주긴. 어차피 내가 빈대 붙어사는 건데. 내가 이리 부실한 자리가 될 줄 알았어. 이렇게 먹을 게 없어서 되겠어? 한창 자랄 여고생들을 두고 말이야. "
그렇게 말한 명욱이 두 손 가득 치킨봉지를 들어 보였다.
" 와 치... 킨이다. 오빠 최고!"
이내 명숙은 달려가 오빠의 손에 들려 있던 봉지를 잽싸게 낚아채서는 가져와 바닥에 풀었고 아이들은 감탄을 하며 너나없이 달려들었다.
" 자 그럼 이제 한번 달려 볼까?"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음료수를 돌려가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게임도 하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흐르며 어느새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으며 다들 신이 났다.
어색하기만 했던 처음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편하게 오빠 동생하며 서로를 대했고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 주변은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깨기 싫었던 명욱이 슈퍼에서 사 온 맥주를 가져 나올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는 이만 가볼게요. 늦어서. 재밌게 놀아 애들아."
내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이내 재민샘이 나를 따라 나와 내 옷을 붙잡았다.
" 벌써 가려고?"
" 저 집이 멀기도 하고 저녁에 언니들이 오기로 해서요. 이만 가봐야 해요. "
" 잠시만. "
재민샘은 급히 안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입고 나를 따라나섰다. 깜짝 놀란 내가 재민샘을 보며
" 샘 이렇게 나오시면 어떻게 해요. 애들도 있는데 들어가 보세요. 저는 잘 갈 수 있어요. "
" 아냐. 괜찮아. 안에 명욱이한테 이야기해뒀어. 너 바래다주고 온다고. 걱정 안 해도 돼. "
내가 서둘러 종종걸음으로 내리막길을 급히 내려가자 재민샘이 나를 돌려세웠다.
" 이렇게 가면 너무 오래 걸려. 위험하기도 하고 내가 차로 바래다줄게. "
" 네? "
내가 뭐라 물을 세도 없이 재민샘은 나를 곁에 세워져 있던 지프차 보조석으로 밀어넣어고는 급히 운전석에 올랐다.
" 샘 차가 있었어요? 오토바이도 있으시면서... 근데 샘 통학버스 타고 다니셨잖아요?"
" 아 내가 폭주 좀 뛰었거든. 차는 제대하면서 선물로 받은 거야. 부모님께."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재민샘이 내게 뭐라고 하려는 듯 계속 입을 달싹였다. 나는 그런 샘을 흘깃 보고는 언덕 아래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 저기 세워주시면 돼요. 애들 기다려요. "
" 저 미소야. 잠시만. 나 할 말이 있어. 네가 희경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다 오해야. 별일 아니야. "
" 네? 오해라뇨?"
내가 불길한 기분이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나를 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 희경이 언니 일 말이야. 그게..."
갑자기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희경이 언니 일이 떠올랐다. 언니의 죽음. 그 일과 재민샘이 관련 있다는 말인가.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러자 그가 당황하며
" 아니 아까 본 그 친구. 명욱이. 내가 말했듯이 우리가 방황하며 오토바이 폭주 뛸 때 그 희진이 그러니까 희경이 언니가 명욱이 오토바이에 뛰어드는 바람에 우연히 알게 된 사이 정도야. 뭐 덕분에 명욱이는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이렇게 대학도 오게 돼서 고맙다고 말하지만 말이야. 사실 희진이 그렇게 우리 집에 찾아와 난리만 치지 않았어도 일이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
" 하지만 희진 언니는 결국 죽었잖아요. "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자 재민샘은 내 눈물을 닦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러더니
" 아냐. 그게 내 잘못이 아니잖아. 죽으려고 명욱이 오토바이에 뛰어든 건 희진이라고. 그걸 내 오토바이를 던져 구한 거고. 그것 때문에 희진이 나한테 미친 듯 매달린 건데... 나는 희진이에게 정말 마음이 하나도 없었어. 내가 마음이 있었던 건... 너뿐이었어. 오로지 너만 생각했었다고."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리고 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생각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희진이 언니가 죽은 것도 그런데 왜 재민샘은 나를 좋아해 왔다는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 저는 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모르겠어요. "
" 아니 그러니까. 희진이를 만나기도 전에 나 정말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해 왔었다고.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나를 보며 웃어주고 캔커피를 건네줬던 그 순간말이야."
" 제가요? 샘께 캔커피를 건네었다고요?"
" 그 독서실 기억 안 나?"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다 불현듯 기억이 났다.
중3 여름 방학 무렵. 한참 육상을 하다 포기하고 진로를 바꾸며 독서실에서 미친 듯 공부에 빠져 있을 때였던가.
" 똑똑."
누군가 내 독서대를 두드려 보니 독서실장. 내게 밖으로 나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 이거. 받아. 누가 너 주래. 이것도 ."
그가 내민 것은 초콜렛과 커피.
" 아 ... 이거 그냥 드세요. 저는 필요없어요. "
" 왜? 여기 포스트 잇도 주던데? "
그가 내민 쪽지에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름답네요. 화이팅!'
나는 그 종이를 구긴 뒤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그러자 독서실장이
" 그래도 너 응원하는 글 같던데... 그 사람이 실망하지 않을까?"
" 상관없어요. 나이도 어린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정신 못차리는 애들 장난. 전 관심없어요."
하지만 쪽지는 거의 매일 그렇게 한달을 내 책상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참다 참다 독서실장에게 갔다.
" 저 죄송한데 다음에는 이거 저한테 전해주지 마세요. "
" 왜? "
" 이런 거 더는 안받을래요. 전해주시느라 고생하는거 아는데... 그분께 좀 전해주세요. 다시는 어린 여중생한테 장난질 치지 말라구요. 이건 제가 드리는 뇌물. 괜히 이런거 전해 준다고 고생 많으세요. 공부하시는데 방해 되게 해서... 죄송합니다. 힘내세요. 화이팅!"
그렇게 그곳을 나온 나는 다시 내 메모지를 꺼내
' 공부나 하시죠. 내게는 관심 끄고. 적어도 이런거 붙일때는 내가 20살이나 넘고 당신이 당신 인생 책임 질 수 있을 때나 하시죠. 사랑이나 연애.'
라고 적어서는 내 책상 위에 붙이고 독서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독서실을 다시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내게 캔커피를 건넨 사람이 재민샘이었다고?
" 너무 늦어서 저는 그만 가봐야겠어요.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
내가 급히 차에서 내리자 재민샘이 따라 내렸다. 그리고는
" 이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아직 이야기도 다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재민샘은 나를 당겨 끌어안았다. 나는 놀라 뒤로 물러나며
" 샘 이러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요. 지금은 혼란스러워서 어떤 말도 더 듣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그만 가볼게요. "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급히 버스에 올랐다. 그런 나를 재민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다음날.
화실에 가서 비상구로 향하자 희경이 있었다.
"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왜 안 온 거야? 재민샘이랑 어떤 이야기를 한 거야? 너희 언니일 재민샘도 알고 있었던 거야?"
잔뜩 흥분한 내가 다그쳐 묻자 희경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무심히
" 재민샘이 너한테 뭐라고 그래?"
" 듣기는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어대자 희경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 뭐 미친년이 재민샘한테 내가 수업 듣는다니까 미친 듯 따라다니더니 갔다가 뒈진 거지. 재민샘도 그걸 본 거고. 그게 다야. "
" 그걸 말이라고 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잖아. "
" 그냥 안 넘기면 뭐가 달라져? 죽은 년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아서라. 지아비 보는데서 보란 듯 죽은 년인데 무슨 짓을 못해."
" 희경아. 그래도 언니 일인데... 말을 좀..."
" 뭐 어때? 그렇게 죽어 버린 게 죄인 거지. 그리고 그년 다시는 내 언니라고 말하지 마. 재수 없어. 퉤."
희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비상구를 나가 버렸다.
희경과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끝나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 금요일 밤 수업이 끝나고 화실을 나오는데 웬일인지 현욱이
" 오늘은 너 먼저 가. 나는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갔다가 가야 해. 저기 희경이 기다려. "
" 응? 희경이?"
현욱의 말에 돌아보자 1층 입구에서 희경이와 재민샘이 같이 이야기를 하며 서 있었다.
나를 본 희경은 다정스레 내 팔짱을 끼더니 다가와
" 재민샘이 차 태워준대. 같이 타고 가자. 와 재민샘 차 진짜 멋지다. "
" 응? 난 그냥 버스 타고 갈래."
그러자 옆에 있던 재민샘이 다가와 내 팔을 끌었다.
" 내가 태워줄게. 둘이 같은 방향이라며? 어서 타. "
" 어머 너 덕분에 내가 재민샘 차도 다 타보네. 히히. "
도대체 희경은 무슨 생각인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앞 좌석에 밀어 넣더니 이내 뒷좌석으로 가서는 차에 타버렸다.
차에 탄 희경은 한참을 재민샘과 이야기를 나눴고 이윽고 희경의 집 앞에 도착하자
" 저는 여기서 내릴게요. 미소는 저 길로 더 내려가야 해요. 미소 잘 부탁해요. 나 간다?"
" ..."
그렇게 말하며 희경은 내려버렸다.
" 재민샘 저도 여기서 내릴게요. "
내가 안전벨트를 풀자 재민샘이 다가와 내게 안전벨트를 다시 채웠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꼭 잡고
" 안돼 오늘은 네게 꼭 이야기를 들어야 해서... 내가 희경이에게 부탁했어. 타고 가. "
재민샘의 말에 나는 말없이 창문을 바라봤다. 이윽고 차가 움직이나 싶더니 길가 버스주차장 뒤편에 비상등을 누른 채 재민샘은 차를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 계속 이렇게 말 안 할 거야?"
" 제가 뭐라 말해도 희진언니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
"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건 오해라니까. 희진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미친 듯 두드려 대는 바람에 나간 거고 거기서 그 애 아빠가 와서 내 멱살을 잡아서 내가 경찰에 신고한 게 다야. 그리고 바로 그 사람들은 가버렸다고."
" 재민샘.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저 샘 마음을 알겠지만...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자
" 난 정말 네가 더 어른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곁에서 보니까 더는 안 되겠어. 미칠 것 만 같아. 이렇게 오해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더욱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그를 애써 밀어내며 말했다.
" 재민샘 이러지 마세요. 저는 샘 마음 받아 줄 수 없어요. 희진 언니 일도 그렇고. 그 상황에 이건 더욱더."
" 여기서 희진이가 왜 나와. 정말 희진이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희진가 그냥 나를 일방적으로 따라다닌 것뿐이라고. "
"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요. 언니가 죽었어요. 어떻게 저랑 제일 친한 희경이 언니 일인데 제가 어떻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재민이 잔뜩 화를 내며
" 아냐. 그러니 네가 오해한다고 말하는 거잖아. 희진이는 마치 내가 그 애를 구원이라도 해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고. 그 애가 아버지한테 안 좋은 일을 겪었건 그건 내 알바 아니야. 난 단지 그 애가 내 친구 오토바이에 치어 죽지 않게 한 것뿐이었어. 근데 그 애 마음대로 오해한 거야. 그리고 나한테 자기 아빠한테서 구해달라고 매달려 온 거라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차를 몰아 다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그냥 난 내가 복학준비하며 독서실에서 있을 때 내게 네가 보여준 그 웃음이 희망이었어. 부모님도 포기하고 아무것도 되는 일 없던 시절에 그때 그렇게 어린 네가 열심히 꿈을 위해 나아가는 모습이. 그리고 그 당돌함이 내게는 너란 사람이... 난 그냥 그 빛을 보고 이제까지 버틴 거야. 하지만 희진은 아냐. 난 그 아이 사랑한 적도 없었고 한 번도 바라본 적도 없었어. 단지 내가 그 아이를 한번 구해준 것만으로 그 아이가 그렇게 내게 목을 매고 수시로 달려와 내 곁에 있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난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도 너를 보는 낙으로 이제껏 버틴 건데... 이런 내 마음 받아주면 안 되겠어?"
재민샘의 간절한 마음이 그의 음성에 담겨 느껴졌다. 어느새 후드득 쏟아지는 비사이로 우리 동네가 다 와갔다.
" 여기서 그만! 멈춰 주세요. "
내 말에 재민샘은 급히 차를 세웠다. 그러더니 나를 바라봤다.
" 저 여기서 내릴게요. "
내가 내리려고 하자 그는 내 팔을 잡으며
" 비도 오는데 그냥 가려고?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 아뇨. 괜찮아요. 샘. 샘 마음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샘은 어른이시잖아요. 제 입장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시고 샘 마음도 잘 정리하시리라 생각해요. 전 아직 할 일이 많은 여고생이에요. 사랑놀음 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그러니 그만 놓아주세요.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재민샘의 팔을 스르륵 빼서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 속을 바라보며 공손히 인사를 건넨 뒤 뒤돌아 건널목을 건너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