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되는 과정
" 굿모닝"
" 아 피곤하다. 어제 술을 마셨더니 머리가 아파 죽겠어. 이놈의 접대 접대..."
나는 투덜대는 한팀장의 어깨를 한번 툭 치며,
" 잘 나가는 한 부장이 그런 소리하면 다들 질투해. 수고해."
그렇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사내인데도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실내에 온기가 돌지 않아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짐을 챙겨 로비에서 사원증을 반납하고 지하 4층으로 향했다. 오늘로 이곳을 퇴사.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올일이 없다.
주차장에는 이미 태호가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 그냥 가도 되는데 왜 왔어요?"
" 어떻게 혼자 오게 둬?"
" 그럴 필요 없대도요. "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그는 기어이 내 짐을 들어 차에 실었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을 했다.
" 그렇게 좋아요?"
" 당연하지. 이제는 정말 온전히 내 차지잖아. "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한강도로변. 그리고 어느새 접어든 주택가. 그의 집.
짐을 차고에 내려놓자 그는 바로 나를 안더니 내게 입을 맞추고는
" 저녁에 봐."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차를 몰아 회사로 향했다.
나는 익숙하게 집으로 들어가 가져온 짐을 내 방에 풀었다.
텅 비어 있던 방하나.
그의 게스트 룸 정도로 여겼던 방.
그 방은 그가 애초에 나를 생각하며 비워둔 방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무 짐도 들이지 않았다고. 내가 원하는 것을 골라 채우도록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비워뒀다는 그 방에 내가 고른 소파에 가구와 커튼을 세팅을 하고 색감은 파스텔 톤의 연보라로 장식을 한 은은한 색감들. 어느새 하우스 키퍼가 청소를 마치고 내게 다가와
" 사모님. 짐 다 정리하셨으면 저기 저 박스는 버릴까요?"
" 아뇨. 그냥 두세요. "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대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여기 말고도 건물이 뒤에 두동이 더 있었다. 한동은 집과 관련되거나 회사에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 용이었고 한 동은 그의 말로는 가족용이라고 했다. 혼자 지내기 너무 커서 거기를 거의 비워둔 채 그나마 아늑한 느낌이 들고 바로 엘리베이터랑 연결된 이 건물에서 생활을 해왔다고.
내가 여기로 이사를 들어왔을 때 그는 가족동으로 가자고 우겼지만 나는 한사코 마다했다.
익숙한 공간이 좋다는 이유로. 가족동은 전면이 유리창으로 잔디밭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조금 더 아늑한 느낌이 들기에 채광도 좋았지만 2층도 있어서 너무 넓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건물은 구조 자체가 조금 더 높게 올라가 있어서 그나마 멀리라도 한강이 보였다.
앞에 가리는 것이 없기도 하고 바로 도로라서 가리는 건물도 크게 없기도 하고.
이 집에 들어온 지도 벌써 4년 8개월. 하지만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어서 결정을 해야 한다. 이사를 할지 말지.
" 아빠~~"
그가 들어오자 태영이 달려가 안겼고 그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는 이내 내려놓으며,
" 선생님께 가서 책 읽어 주세요. 그래야지."
" 아빠~"
나는 그런 태영을 안아서 선생님께 건넸다. 그러자 가정교사는 이내 목례를 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자 태호가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았다.
"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
" 왜? 회사에 안 나오니 좋다고 난리일 때는 언제고?"
그는 내게 키스를 하며,
" 그거야. 당신이 회사일로 바쁜 게 싫기도 하고 태영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으니까 그런 것도 있었는데 막상 못 보니 미치겠잖아."
" 곧 익숙해질 거야. "
내가 그렇게 말하며 주방으로 가서 밥을 뜨자 이내 그가 내게 다가와 나를 뒤에서 안으며 내 볼에 또다시 입을 맞췄다. 나는 그런 그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대었다 떼고는 이내 부드럽게 비비고
" 가서 씻고 어서 와요."
그렇게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화장실로 향했다.
한참을 회사에서 일로 바쁠 나이. 하지만 그는 이제 어였던 회장의 직위에 있는 상황이다 보니 누구보다 여유롭게 가정이 있는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라는 보금자리를 통해.
그가 내게 보인 틈은 아주 작았다. 사냥꾼이 다 잡은 먹잇감에게 베풀 수 있는 아량이라고는 그저 잡아다 놓고 언제 먹을지 고민하는 정도.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가 보인 틈이 신의 한 수였다. 그가 몰랐을 뿐이지.
씻고 나온 그는 이내 내 곁에 나가와 내 허리를 한번 감싸 안아서 다시 내게 입을 맞추고는 이내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먹는 둥 마는 둥.
" 오늘은 국이 맛이 없어요? "
나는 하우스 키퍼가 해놓은 감성돔을 넣고 끓인 생선국을 한입 떠먹었다. 새벽 산지에서 바로 보낸 신선한 생선으로 끓인 국인데도 그는 그 좋아하던 국을 영 시원찮게 대했고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 음. 오늘은 그것보다."
그렇게 그는 말하더니 나를 덥석 안아서 무릎에 올리고는 내 치마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 이게 더 궁금해서 말이지. "
" 후훗. 신혼이라기에는 너무 한참 지났는데 전혀 줄지가 않네?"
" 한창인데 벌써 그럼 되나?"
그런 그에게 나는 목에 팔을 두르고는 진하게 키스를 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덥석 안아서 들고는 침실로 향했다.
그가 나를 침대에 눕히자 나는 천천히 스웨터를 벗었다. 선명히 드러나는 가슴. 모유수유를 했던 터라 가슴은 오히려 처녀 때보다 더 커졌고 그런 내 가슴을 오히려 그는 더 좋아했다. 그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나는 그를 돌려 그의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가 이내 위에 걸쳤던 실크 가운을 벗었다. 그의 가슴 사이 드러난 가슴골 사이로 손을 세워 타고 내리자 그가 목을 위로 치켜들었다.
익숙해지는 것. 그것은 습관이 되는 것.
때로 인간은 습관처럼 몸에 베인 많은 것들로 생활은 편해지지만 그만큼 긴장감은 떨어지고 경계도 허물어진다. 그리고 항상 위기는 그 틈을 타고 파고든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원하는 것 욕망을 보는 눈.
하지만 그가 내게서 찾을 수 없는 것. 욕망을 갈구하는 마음.
그렇기에 그가 나를 갖고자 한다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그가 내게 심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그가 원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를 갖는 것.
내 입으로 그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그는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내가 그의 집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이를 낳고 두 달이 지나고 바로 회사로 출근을 했고 그는 너무나 당황해서 한동안은 내게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뒤로 방을 보러 다닌 뒤 방을 구해서는 대학원 학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아이는 돌을 앞두고 있었고 그는 그제야 내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구태여 그에게 묻지 않았다. 임신을 했던 기간에 그가 어떤 여자를 만났고 내가 없는 동안 어떤 여자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태영을 돌보거나 태영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으니 그는 당연히 더 내가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여느 여자들과 달랐으니.
하지만 태영의 곁에 있을 때는 달랐다.
부성애도 모성애도 잃어본 그의 눈에도 내 모성애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태영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정영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정영을 그리워하며 찾고 돌아가려 들면 그만큼 그는 그들을 괴롭히려 들 테고 그걸 아는 내가 애써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내가 그들에게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부단히도 노력했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그런 그의 마음에 그의 욕망을 더 해 그가 나를 습관처럼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 유부녀가 왜 위험한 줄 알아?"
" 유부녀야 다 잡아둔 물고기인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 그러니 넌 안된다는 거야. 그러니 집사람한테 잘해. 도망가기 전에. "
결혼한 지 2년 차인 한 팀장에게 그렇게 말하자 한팀장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 임신한 와이프 먹을 것도 잘 챙겨 먹이고 살뜰히 보살펴. 내가 충고할 때 새겨 들어. "
" 네 사모님~"
" 또 그 사모님 소리. 아 정말 싫다. 그냥 정대리라 부르라니까."
" 보고한다?"
" 그럼 하던지. 예전처럼."
한부장이 그러니까 한팀장이 내가 다니던 회사에 파견을 왔을 때부터 그는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었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한 덕분에 부도 위기였던 그의 아버지 사업도 태호의 지원을 받아 나날이 성장해 갔다.
그런 한팀장에게 나는 거의 로또 같은 존재였고 내 일거수일투족 특히 내가 정우나 정영과 연락하는 지를 알아보는 게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최대한 나와 가까워져야 했고 그런 그의 임무는 애당초 그가 내게 친구를 하자고 했을 때부터 간파되었다.
적재적소에 좋은 시스템으로 사람을 잘 부려 먹는 그의 지략적인 행동이었기에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태영에게 입힐 옷을 사러 나온 김에 만난 한부장이 그렇게 소원해진 부부사이를 내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충고를 했다.
그가 보기에 식도 올리지 않고 아이까지 낳고도 그렇게 나를 못 봐서 안달이 난 태호를 붙잡아두는 내가 이내 신기한 듯 한부장은 나를 떠보듯 그렇게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속의 말을 빈말인 듯 툭툭 내뱉고는 했다. 야망을 위해서는 가족을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런 그의 야망이 그의 가족을 지킨다는 것도 알고 있는 터라.
나는 못 이긴 척 그렇게 그의 말에 가끔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태호가 모르는 비밀을 툭툭 던져 주고는 했다. 오로지 그가 태호에게 줄 수 있는 나의 소스들.
" 언니 집 앞인데 잠깐 볼 수 있어?"
" 나 밖인데... 네가 이리로 올래?"
이태원 카페거리에서 만난 우리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태영을 품에 안고 그런 나를 세희는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슨 일 있어?"
" 요즘 머리가 너무 아파. "
" 왜 다시 소리가 들려?"
" 아니. 아직도 소리는 안 들려. 그 병원을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 회사일로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냐?"
그녀가 M&A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며 회사에 복귀하고 본부장 자리를 꿰찼을 때 이미 그녀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첫째 언니와 둘째 오빠 사이에 각종 비리며 사건 사고로 인하여 회사에 엄청난 위기가 왔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중대한 키를 그녀가 쥐고 있었다. 그 해결책은 바로 태호. 그녀가 태호의 도움으로 거뜬히 해결했기에 그때만 해도 그녀는 이미 야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했던 그들.
앞으로 그들이 그녀의 앞길을 막을 것이란 사실을.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차 사고로 돌아가시고 그녀가 태호의 집에 과외를 하러 가면서 그들은 내심 그녀의 존재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애초에 제일 영민했던 그녀를 무척 아꼈고 사업 수환이 뛰어나신 아버지는 그의 아들도 아닌 그녀에게 사업을 물려주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적어도 자신이 대를 이어 몸 받쳐 이뤄 놓은 기업을 풍비박산을 만들 사람은 아님을 그의 아버지는 애당초에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 법.
세희의 큰 엄마 그러니까 본처는 별거 중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회사의 지분을 쥐고 수시 때때로 회사를 압박해 왔고 그런 그 지분을 세희는 꽤나 오랜 기간 조용히 여러 채널을 통해 매입해 왔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쓰러지고 부회장 자리에 있던 오빠가 회장대행이 되고 세희가 부회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열사 사장이던 큰 언니가 부회장 자리를 노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공시를 통해 지분이 세희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외가 측에서 전방위로 압박을 넣고 있었다. 이미 계열사 중 돈 되는 것을 태호에게 넘겨 버린 세희 입장에서는 여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면 분명 태호에게 넘기기 전만 해도 그 계열사들은 적자를 면치 못했었고 투자금 대비 세게 정세의 흐름 때문에 빛을 못 보던 상황이라 반전이 필요한 것이었는데 막상 사업에는 관심도 없던 큰 언니가 계열사 사장이 되면서 여기저기 주워들은 정보로 팔고 난 회사가 태호회사가 되고 대박이 나고 보니 이만저만 배가 아픈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회사 분위기에 편승해 회사를 적자 늪에서 겨우 기사회생하여 흑자 반열에 올린 세희의 공적은 사라지고 어느새 돈 되는 계열사를 팔아치운 파렴치한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그녀.
하지만 애초에 세계정세를 심하게 타는 회사를 팔고자 했던 것도 아버지였고 그녀는 아버지와 의논한 대로 M&A를 통해 회사의 미래에 투자를 하면서 썩은 둔부를 잘라내고 모기업에 자금을 대서 살리고자 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던 대로 이제 고지가 바로 눈앞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아버지가 쓰러지시면서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비밀. 세희는 아이를 낳치 못하는 몸.
그때의 교통사고로 그녀는 자궁에 문제가 생겨 임신이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의 상황을 모르는 그녀의 아버지 큰 그림에 태호가 있었다는 것.
오래전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눈여겨봤던 이유 중 결정적인 이유도 그녀가 태호와 그렇고 그런 관계임을 알고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놓고 태호네 집에 들어가 살다 바로 나왔을 때 세희는 그의 집에 드나들며 마치 태영이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행동했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도 미쳐 주변에 말은 못 해도 마지못해 오래된 둘의 관계를 알아서 암암리에 허락을 한 터였고 그래서 그 계열사를 넘겼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태호의 집에 들어가면서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되신 세희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이 사실을 세희 아버지와 세희 그리고 태호만 알고 있는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어떠한 가. 찌라시라는 것은 무섭게 퍼졌고 결국에는 주변에서도 다들 쉬쉬거리며 알게 되었지만 타격은 오로지 여자의 몫.
태호의 회사는 그런 상황과 무관하게 잘만 나갔다.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기에 세계적인 기업가 반열에 오른 이상 더는 그에게 국내에 적수는 없을 만큼 그의 회사는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며 가파르게 세계로 뻣어나가고 있었다. 결국 정권조차 비호하고 도는 마당에 어찌 감히 그를 손댈 수 있겠나.
연일 TV며 인터넷에 그의 아내 사진이 도배가 되고 아기 사진이 도배가 되었지만 사실은 그 사진은 가짜였다. 모두 언론에 미리 뿌려진 사진. 물론 사진 속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세희였다.
세희는 사랑을 위해 친정을 버린 비련의 여주인공. 사랑을 찾아 도피유학을 간 유학생. 사랑을 위해 아버지가 일군 회사를 단숨에 위기로 몰아넣은 나쁜 딸로 연일 언론플레이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태호를 버리고 다시 친정으로 들어간 것으로 묘사되어 나왔고 그런 상황이 마치 실제처럼 여기저기서 목격담까지 나오면서 사람들 사이에 어느새 찌라시는 진실이 되어 돌고 있었다.
머리가 아플 수밖에.
" 우리 태영이 많이 컸네? 못본 사이. 이리와 이모가 안아줄게."
" 태영아. 이모한테 가볼래?"
그 어린 피덩이 때부터 세희를 엄마로 알고 지낸 태영이지만 좀처럼 세희에게 가려 들지 않았다. 아이는 마치 본능적으로 지 어미가 나인줄 아는 것 마냥. 그렇게 내 품에서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 태영아. 이모가 안아보고 싶어하는데. 우리 태영이 얼마나 사랑스런 아인지 보여줘야지?"
내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영을 바닥에 내려놓자 세희에게 달려가 와락 안기며,
" 세희 이모. 안녕. 이모 이뻐요. 헤헤"
그렇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볼에 입을 맞추고 세희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세희는 애틋하게 태영을 안아 무릎에 앉히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바라봤다. 손에 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태영이 바닥에 떨어뜨리자 얼른 집어 물티슈로 닦아주며 태영이 마음이라도 상할까 눈치를 보며 애지중지 하는 그녀.
그런 그녀에게서 나는 모성애가 보인다.
비록 그녀가 배를 아파 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태영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태영이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되는 것 같아. "
" 아이가 있으면 그렇지. 우리 태영이 또 사랑스런 아이기도 하고. "
나는 그렇게 말하며 태영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자 태영이 내게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이내 울리는 전화.
" 어디 밖이야? 소란 스럽네?"
" 아 세희씨 만나러 잠시 나왔어요. "
" 세희? 아... 박부회장. 잘 지내지? 안부 전해줘. 너무 늦지 말고 들어와.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갈거야. "
" 바쁜 사람이 자꾸 집에 일찍 들어오려 하지 말아요. 직원들 눈치 보여."
내가 그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는 이내 토라진 듯.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하잖아. 당신도 알면서. 사랑해. 조금 있다 봐. "
태호는 그래도 다정스레 내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 우리의 통화를 세희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 태호씨 인가봐? 많이 바쁜 가 보더니 언니에게는 전화를 자주하네?"
" 뭐. 가정에는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이니까. "
" 아... 다정이라... 그런면도 있었구나. 후훗. "
" 요즘 내가 집에서 있으니 부쩍 신경쓰이나봐. 계속 일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겠지."
" 늘 붙어 지냈으니 궁금할 만도 하지. 요즘 회사 안나가니 조금 여유있겠네?"
" 그래서 이렇게 모처럼 태영이랑 쇼핑도 나왔잖아. 너도 만날 수 있는 거고. 근데 너 시간 바쁘지 않아?"
" 안그래도 오후에 또 회의도 잡혀 있어서 바로 들어가봐야해. 그래도 이렇게 얼굴봤으니 된거지 뭐.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태영을 꼬옥 안고는 태영의 볼에 입을 맞추고 눈을 한번 지긋이 바라봤다. 그리고 아련한 눈빛으로 태영을 한번더 꼭 안더니
" 언니 나중에 또 찾아갈게. 난 이제 그만 가봐야 겠어. "
" 그래. 조심히 들어가. 태영아. 이리와. 이모 가야해. 인사해야지. "
태영이 한참 공감능력과 감성적 안정감이 자리잡아야 할 시기 그 중요한 시기에 태영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 어린 것이 엄마라고 알고 있었던 세희는 태호와 같이 지내는 사이 늘 싸웠고 태호는 늦게 들어왔다. 세희는 언제나 불안해 했고 그런 세희를 곁에서 보며 태호는 마음이 많이 불안해 했다. 그러다 내가 들어오자 태호도 많이 편안해 하고 태영도 마음이 꽤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 태영은 나를 그림자 처럼 졸졸 따라 다니며 애착을 형성하고자 했다. 언제나 그렇듯 내 자식들은 마음의 교감을 나누며 자랐기에 영민한 태영은 오히려 정영보다 더 빨랐다.
차이는 태영은 원하는 것을 분명히 내게 말했다. 적어도 내가 떠나지 않는 선에서. 정영은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한 불안은 없었다. 하지만 태영은 애초에 내가 없는 삶에서 나를 가져 본 삶이 시작되었기에 누구보다 내 존재에 대한 불안이 컸다.
하지만 태호는 단호했다. 잠은 무조건 아무리 어려도 따로 자게 키웠고 절대 잘때는 우리 곁에 오지 못하게 했다. 회사 일로 늦게 들어오거나 하면 태영은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며 졸린 눈을 비비며 그렇게 앉아 있었고 그런 태영을 안아다 방에 재우고 다시 내 방에 가려 들면 태영은 말없이 내 손을 잡으며,
" 엄마..."
말도 배우기 전에 보채면 안되고 투정을 부리면 안된다는 것을 먼저 배운 아이. 투정을 부리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가정교사가 와서 자신을 달리기에 태영은 말없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그런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러면 이내 태영은 스르륵 눈을 감으며 잠이 들고는 했다.
태영을 가졌을 때부터 항상 들려주던 노랫소리.
뱃속에서 그렇게 발길질을 하고 태동을 할 때도 이 노래 소리에 태영은 한결 편안해 하며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