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가 창문을 내리고 자꾸 타라며 난리였다.
나는 하도 퉁퉁 거리며 걸은 발 때문인지 아니면 뭔지 모를 이 화 때문인지 잔뜩 뿔이난 내 마음 때문인지.
한참을 그렇게 서서 연우를 노려보다 결국 뒤차의 경적소리에 못 이긴 척 차에 올랐다. 나는 차에 오르자마자 다짜고짜 연우에게 따져 물었다.
" 아니 오빠는 왜 그래요?
사람이? 왜 말도 미리 안 해주고 어디를 가면 어디를 간다. 무얼 한다. 누굴 만난다. 말이라도 해주던가. 아니면 어떤 상황이 생기면 어떤 일이다 말이라도 하던가. 왜 맨날 사람이 골탕을 먹고 나면 그제야 상황을 설명하고 이야기도 하는 둥 마는 둥. 내가 오빠 인형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래요?"
내가 이렇게 화를 내며 씩씩 대자 그제야 그는 뭔가 이해가 간다는 듯 운전을 하다 말고는 나를 한번 쓱 보더니 갓길에 차를 세우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 너 경윤이 가서 화난 거 아냐?"
" 그게 왜 화가 나는데? 두발 달린 짐승이 지 갈길 가는 거지."
" 으하하하하하하하"
" 나는 열받아 죽겠는데 웃음이 나와요?"
그는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이윽고 다시 웃음을 참으며 운전을 했다. 나는 미칠 것같이 열받게 만들어 놓고 도대체 연우는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 또 봐. 어디 가는데요? 이 밤에. 배고파 죽겠는데."
" 그러게 그 비싼 밥은 왜 먹지도 않고 깨작대 깨작대길. "
" 도대체 누가 비싼 밥 사달라고 했어요? 그냥 밥 먹자고 한 거지. 그리고 그거 오빠가 사준다고 한 거잖아요. 나한테. 무슨 의학전문시험에 웬 미술전공서를 들고 공부를 하고 난리고. 나참 어이없어서."
그렇게 그에게 퍼붓고 나니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 이제 1절 끝?"
" 어쭈 어딜 얼렁뚱땅 그냥 넘어 가려 들어요. 사람 열받게 해 놓고."
" 자자 1절 끝이라니까. 내려."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자 밤조경이 은은하게 펼쳐진 수목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길게 나지막하게 이어진 길 사이로 연인들 가족들이 띄엄띄엄 걷고 있었다. 차 조수석 문을 연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며,
" 산책?"
그의 손에 이끌려 그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시원한 밤공기가 두 뺨을 스친다.
풀내음. 풀벌레 소리.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어두워진 산속 밤하늘에 유독 별빛은 더 선명하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조명 사이사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은 느릿느릿 걸음의 속도를 멈출 듯 머물듯 하며 내 말목을 잡았고 그 발길을 하나 둘 옮기다 보니 그림자도 눈에 들어온다. 바닥은 잘 다듬어진 보행로지만 색색이 예쁜 색들이 밤 조명을 받아 군데군데 박힌 조명과 어울렸고 산책로 따라 어둑하게 보이는 호수가에는 달빛이 비쳐 반짝반짝 빛이 났다.
" 와 좋다. "
" 좋지? 그러게 왜 씩씩대. 이리 좋아할 거면서."
" 그럼 이런 좋은 곳 온다고 미리 말해주면 안돼요? 그럼 이렇게 높은 구두도 안 신고 왔잖아요. 발 아프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힐을 벗어서 손에 들었고 그러자 그는 내게 손을 내밀어 힐을 받아 들고는
" 난 안돼. 손이 없거든. "
이렇게 말하며 한 손은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들어 보이고 한 손은 힐을 든 손을 보여주더니 뒷짐을 지며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깔깔깔 웃으며 옛이야기를 한동안 나눴고 그렇게 또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멋진 가로등이 보이는 조명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우는 바지에 먼지를 털며 어느새 벤치에 앉아 한쪽 다리를 옆으로 올린채 주무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내 발목을 당겨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여자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든 거구나?"
연우는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내가 '훗'하고 웃으며,
" 이제 이해돼요? "
" 음. 아직은... 그런데 조금? 예전에 네가 내게 여자가 더 복잡하고 했던 말? 적어도 그때보다는 조금 더 알게된 느낌이랄까?"
" 어떤 점이요?"
" 음. 그냥 예전에 나는 단순한 게 좋다고 했잖아. 부족하면 채우면 되고 답이 있는 건 구하면 되고. 근데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 정도?"
" 예를 들면요?"
" 음 예를 들면 음.... 변수?"
" 변수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딘가 답이 있다는 거잖아요. 여러 경우의 수 중에. "
" 그렇지. 예를 들면 오늘만 해도 너는 경윤이 나오는 자리인 줄 알았음 진작에 도망갔을 거고 그럼 난 또 온갖 궁리를 해서 경윤한테 핑계를 대든 아니면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든 답을 찾아 해결했겠지?"
" 아니 내 말은 그런다고 그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보기 싫은데 내가 경윤이가 보고 싶지 않은데 왜 사람 의견도 안 물어보고 마음대로 그런 자리를 만드느냐고요. "
" 그러니 그런 자리를 어색한 또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중재할 수 있도록 내가 간 거잖아."
" 이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야. 멀 이상하게 갔다 붙여요. "
" 뭐가 이상해. 이상한 거 너였지."
" 아니 내가 왜요?"
" 보통은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거나 오늘 같이 경윤이를 만난 자리면 보통 다른 사람이라면 만나서 잘 지냈냐 근황을 묻고 또 무얼 하냐 어떻게 나왔냐 그 자리의 목적과 성격을 묻고 그렇게 그 자리 분위기에 맞춰서 이야기에 같이 어울리고 대화를 하는데 너는 믿도 끝도 없이 혼자 뚱하니 앉아 있다가 혼자 생각하다 혼자 화를 내고 혼자 나가버렸잖아."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앉아 있는 내도록 그들의 말을, 대화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나와 그들의 사적인 관계에만 집중한 나머지 세 명이 모였을 때 아니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공통된 주제로 대화 한번 같이 한 적이 없었다.
" 오빠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인정. "
" 그런 면에서 너는 너무 엉뚱한 면이 없지 않지. 꼭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쪽 발을 내린 뒤 나를 번쩍 들어 의자 반대편으로 돌려 앉혔다.
두근두근.
내가 깜짝 놀라자, 그는 피식 웃더니 아랑곳 않고는 다시 앉아 맞은편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그리고 더 엉뚱한 건 혼자 꾹꾹 눌러 담다 혼자 뻥~~ 하고 폭발해. 어떤 징조나 조짐도 잘 안 보여. 잘 참나 싶어 그냥 내버려두면 뿅 하고 사라지고 없어. 보통 말이야."
" 그건 좀 저도 안 좋은 습관이라 생각은 해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뭔가 원해서 때로는 갖고자 해서 말하거나 요구를 하면 번번이 거절을 당해오고 좌절을 당해와서 뭐든 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생각했거든요. "
"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경우 고민 될 때 상의라는 걸 해. 가족이나 친구나 하다 못해 친한 사람들에게, 때로는 직장 선후배에게. 그리고 여러 조언을 얻은 다음 가장 합리적이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결론에 도달해서 판단하고 행동하거든. 근데 너는 아예 그런 게 없지. "
" 그것도 워낙 사람관계가 좁다 보니 또 서로 깊게 알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걸 알고 그게 내가 원인이 될 수도 있어서 쉽사리 안되더라고요. "
" 근데 다 그렇지만은 않아. 때로는 네가 연결고리가 돼서 어떤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답이 되기도 하니까. 그냥 네 존재 자체만으로도. "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그를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아마도 내 20살이 후 그를 이렇게 들여다본 적은 없었던 거 같다. 그저 멀리 보이는 그의 모습이 키가 크고 훈남형이구나 정도만 생각했지 그의 이목구비가 어떤 지 그가 어떤 얼굴선을 지녔는지 나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 왔었던 거 같다.
하지만 분위기에 취해서 인지 유독 밝은 달빛 때문인지 내게 조곤 조곤 말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두 눈썹은 짙고 불빛에 반짝이는 눈에 렌즈는 이제야 그가 안경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될 정도로 나는 그의 외모에는 관심조차 주지를 않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여태껏 나를 들여다보려 하고 내 곁에서 그렇게 수많은 말을 해왔는지 나는 미처 예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오늘 내게 해주는 이런 나와 관련된 말들이 그 말속에 그가 얼마나 오랜 기간 나를 생각하고 분석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나름 고민해 왔는지 내 행동, 말투, 그 모든 것에 그가 얼마나 세심히 배려해왔는지를 오늘애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긴 사각 턱에 각진 얼굴형, 굵은 목선 다부진 어깨, 그의 이마는 여느 사람과 달리 둥근 형이 아닌 각이 진 형태고 미간은 좁지만 주름은 없으며 눈썹은 짙으나 굵지 않고 적당한 크기에 일자로 곧게 뻗었으며 그사이 내려오는 콧날은 제법 오똑하고 날렵하며 폭은 넓었다.
그래서 인상이 강해 보일 수 있음에도 그가 여태 그렇게 강한 인상을 주지 않은 이유는 그는 선한 눈매를 지니고 눈가에는 항상 웃음으로 생긴 옅은 반달 눈모양과 웃을 때마다 보이는 눈 주름. 호방하게 웃을 때마다 벌어지는 큰입술을 애워싼 굵고 다부진 입술때문이었다.
입주위 근육은 자주 생각할때마다 입꼬리를 당겨 위로 올린 말린 입꼬리 그 입꼬리 옆에 살짝 생기는 보조개. 습관처럼 올라가는 둥근 입술. 그가 항상 웃으려 노력하는 사람임을 나타내는 얼굴상.
그런 그의 선한 얼굴이 그의 강한 선을 부드럽게 잠재우고 그의 예리한 반달 눈매는 지금처럼 반짝이며 나를 응시할때는 옅은 속눈썹사이 짙은 숱을 지닌 눈꺼풀로 그의 눈위에 길게 드리워져 눈이 항상 우수진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연우의 눈은 더 초롱초롱한 반짝임을 만들고 상대를 응시할 때 그 말에 집중하도록 하는 마력을 지녔다.
" 야? 자냐? 이미소 자?"
나는 순간 그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나 도대체 뭘보고 있었지?
" 애 또 조냐? 뭘 보냐고. 멍하니. 무슨 생각해?"
" 음..."
" 눈동자요?"
" 무슨 눈동자?"
" 변수요."
" 허어."
그는 내 다리를 의자에서 내려 놓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한대 핀다.
" 넌 이 분위기에 잠이 오니?"
" 아뇨?"
" 근데 왜 그래?"
" 네? "
" 봐. 애가 멍하네. "
" 너무 멋지잖아요?"
" 뭐가?"
" 변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