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부탁할 게 있어서. 대신에 내가 저녁에 맛있는 밥 살 테니. 오늘은 예전에 내가 사준 그 옷 입고 나와. 알았지?"
'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
통화를 끝내고 나는 문득. 약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매우 잠시 스쳤다.
하지만 더 생각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바빴다. 급하게 옷을 다시 갈아입고 보니 등 뒤로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눈에 거슬렸다. 나는 머리를 동동 동여서 정수리에 둥글게 말아 올리고는 비녀를 꽂았고 그러고 보니 얼굴이 옷과 너무 안 어울린다.
" 희경아."
그렇게 바쁜 아침시간에 손 빠른 희경의 손을 빌려 겨우 옷과 메이크업의 구색을 어느 정도 맞춰서 그렇게 나왔다. 풀세팅은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2년 여의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원을 조기 졸업하고 어느새 미술관 인턴과정을 신청해서 6개월째 근무 중이었다.
'지금 쯤 학교는 여름방학이겠네.'
아침부터 느닷없이 걸려온 연우의 전화는 점심때 잠깐 들려 나를 픽업해서는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는 것이었다.
뭔 생뚱맞게 의학서적도 아니고 미술해부학 책이 왜 필요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전공의 시험준비하는 데 급히 필요한 거라고 점심도 못 먹고 온다니 같이 길을 나설 수밖에. 그렇게 급하게 온 연우의 차를 타고 나는 학교로 향해 가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니 늘 다녔던 곳이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 오랜만에 오니 좋지?"
" 무슨 불과 작년까지 미친 듯 저기 저 도서관에서 처박혀 있었는데."
" 오 그래도 오늘 드레스 코드 멋지네? 얼굴에 그림도 그리고. 그러고 보니 인제 네가 미대출신 같다."
" 이게 다 희경님의 작품이라고 전해 달랍니다. "
" 푸핫. 희경 씨 잘 있지? 언제 밥 한 끼 먹자고 해."
" 밥은 무슨 우리도 얼마 만에 보는데."
" 뭐야 삐진 거야? 이 귀여운... "
그렇게 말하며 연우가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는 힐긋 나를 보며 방긋 웃고는 다시 힐긋 나를 보고 내 볼을 집어 흔드려 들었다. 나는 그런 그의 손을 탁 치며,
" 어허. 어딜 만져. 만지길. 화장지워지게. 대 희경님의 작품이 훼손되는 구만. 깔깔."
" 어쭈~ 너 이리와. "
그는 이내 손가락을 혓바닥으로 찌익 핥아서는 내 얼굴에 바르려고 했다. 아니 내 얼굴의 희경님 작품을 훼손하려 들었다.
" 미쳤어요? 운전하면서? "
그렇게 장난을 치며 학교에 도착, 도서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게 연우는 고개를 휙휙 저어 보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황당하고 어이 없던 나는
" 지금 이 더위에 나보고 올라갔다 오라고? 그것도 나 혼자?"
" 야. 내가 얼마나 미친 듯 병원을 서서 돌아다니는데 밖에서도 계단을 타냐. 딱 질색이다. 다녀와. 이 오라버니를 위해 어서."
" 와 뻔뻔함은 정말 끝이 없으세요. 오라버니. "
그렇게 토라져 휙 돌자, 그는 얼른 내려 보조석 차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숙이고는 팔을 옆으로 안내하듯,
" 다녀오세요~~ 어서."
" 와... 가끔씩 오빠는 나를 아주 아주... 으음. 일단 참자. 바쁘니."
나는 연우의 놀림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참으며 힐을 꾹꾹 누르며 도서관 계단을 올라 예술분야로 가서 미술 해부학 책을 골랐다. 그리고 대여를 하려 섰는데,
" 미.... 정?"
고개를 드니 재우였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헐.'
손에 보니
'아직도 공무원 7급 준비 중이시군. 여전히 여기서 삐대고 계시고. 후암. '
" 누구시죠?"
" 아. 제가 잘못 봤네요. "
" 미정인 줄 아셨겠죠. 죄송해요. 저는 이미소라서요. 그럼 바빠서 이만. "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쫘악 펴고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사뿐사뿐하게 그렇게 내려왔다.
와 이 10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는 이 기분은 뭐랄까.
아 이 날아갈 거 같은 이 기분.
'너무 좋은데?'
누가 말했던가 제일 좋은 복수는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 짜릿해.'
비록 인턴 신분이었지만 백수가 아니고 더 이상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란 이유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음? 그러고 보니 오늘 드레스코드 너무 마음에 들어. 생각해 보니 오늘 이렇게 여기 안 왔다면 저 인간을 내가 만날 수 있었으랴. 그것도 여기서 이렇게. 나름 나 잘 나가는 모양으로 한껏 뽐냈는데. 힛. 내가 연우 덕분에 아주 호강을...
'그러고 보니 연우는 항상 내 곁에서 말없이 나를 묵묵히 응원해 주고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같이 고민해 주면서 마치 신이 구원을 하듯 그렇게 나를 지켜왔구나. 난 왜 몰랐지. 그런 그가 바로 저기 있었는데 왜 말도 안 되게 저런 양아치 같은 자식에 그때 꼽혀서 그 여름 그 고생을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현관에 도착해 차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연우와 눈이 마주쳤고 팔짱을 끼고 있다 나를 보며 팔을 들어 올리는 그를 보자 문득 그의 웃음이 한없이 빛나 보였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팔을 잡아끌었고 나는 뒤로 돌며 휘청거렸고 마치 슬로 모션처럼 힐 때문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할 때 내 머리카락의 비녀는 바닥에 떨어지며 내 머리는 바람에 나부꼈다. 그런 나를 돌려세우며 한 팔로 안은 건 재우였다.
" 미안. "
내가 잃어버렸던 중심을 바로 세우며 그를 바라보자 재우는 말했다.
" 미안했다고. 그때. "
" 사과..."
바닥에 떨어진 내 비녀를 주어 내게 건네준 연우가 말했다.
" 사과 안 해도 됩니다. 덕분에 멋진 미소씨는 제 여자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재우에게서 나를 잡아채서 내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은채 차로 데려와 매너 좋게 차문을 연 뒤 나를 차에 태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후진을 멋지게 한 후, 교내 규정 속도를 위반하며 미친 듯 달리며 말했다.
" 와. 연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연기자들은 이런 닭살스런 멘트 어떻게 하냐?"
" 헐. 오빠 진짜 아까 나 정말."
" 왜 심쿵했냐?"
" 응."
" 응?"
" 응. "
" 왜?
" 단속카메라... 이러다 면허 정지 먹겠다. 벌점 누적으로."
어느새 연우의 두 볼은 붉어져 있었다.
'오늘은 내가 그래도 복수의 종지부를 찍은 날이니 밥은 내가 사야 하나? 아님 오빠가 산다고 했으니 얻어먹어야 하나?'
화장실에 들러 화장상태를 확인하고 나름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먼저 자리를 잡은 연우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윤이었다.
돌아서 나갈까. 난 경윤만 보면 아직도 불편한데. 왜 연우는 내 허락도 없이 경윤을 부른 거지?
" 미소야. 여기."
" 응."
그렇게 셋이 모여 밥을 먹는 것도 셋이 같이 모여 얼굴을 본 것도 오빠 자취방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경윤이 그때 오빠의 방에서 나가며 잘 부탁한다고 말한 게 이런 의미였나.
도통 저 둘이 그날 새벽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주고받았길래 이런 자리가 만들어졌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갔다.
그렇게 뚱 한 표정으로 칼질을 빈 접시에 해대고 있으니 곁에 있던 경윤이 연우의 이야기를 듣다 잠깐 손을 들어 연우의 이야기를 멈춘 후,
" 잘 안 잘라져?"
그렇게 말하며 내 스테이크 접시를 가져가 막 자른다.
원래라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가 멋져 보여야 하는데 왜 오늘따라 그가 이렇게 싫을까.
옆에 와인을 먹으려 들자,
" 야 옷 버려. 흰 옷에 먹지 마."
그러며 연우는 내 와인도 뺏어든다.
' 와 이 남자들 오늘따라 왜 이리 꼴 보기 싫지?'
" 미소야 듣고 있어?"
순간 나도 모르게 뭔지 모르겠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들이 나눈 대화 내용은 애초에 나는 관심이 1도 없었다. 내가 애써 지워뒀던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그것도 모질라 나만 모르고 자기들만 아는 그때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는 그저 머릿속에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욕망만 들끓고 있었다. 급기야,
" 나... 속이 안 좋아서 그만 가볼게. 둘이 잘 놀다가. "
그러고 돌아서는데 연우가 내 팔을 잡았다.
" 야. 너 왜 그래? 오늘따라? 경윤이 이대로 보낼 거야?"
" 왜? 지발로 왔으면 알아서 가겠지. 못 가면 오빠가 업어가면 되겠네. 두 분 잘 놀다 가세요. "
그렇게 말하고 레스토랑을 나오는데 경윤이 내 뒤를 따라 달려 나왔다. 내 팔을 잡고는
" 미소야. 오늘이 마지막인데 얼굴 보고 인사는 해주고 갈 수 있잖아."
마지막?
게산을 급히 마치고 달려 나온 연우는 휴우... 한숨을 쉬고는 경윤에게 말했다.
" 네가 이해해라. 오늘 미소 기분이 영 별로라. 옛 애인 만나서 그래. 미소야. 너도 내일 출국한다는데 그렇게 가면 어떻게 애 기분 찝찝하게. "
" 내가 뭘. 뭘 어쨌다고."
그러자 경윤이 웃으며,
" 미안. 네 기분이 안 좋았는지 미쳐 몰랐네. 미리 너한테 전화라도 할걸. 하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 연락하면 또 피할까 봐. 형한테 부탁했는데. 내가 실수했었어. 미안. "
그러자 연우가 되려,
" 아냐 아냐. 미안해 안 해도 돼. 얼마든지 부탁해. 다 들어줄게. 미소야 어서 사과해. 왜 그래?"
나는 경윤을 보고 퉁명스레 말했다.
" 뭐. 어딜 가든 잘살겠지. 잘 다녀오든지. 잘 가든지. 만나서 반가웠어."
" 야. 이미소.."
연우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1층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 역으로 씩씩 거리며 걸어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