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어머니께서는 어느새 반찬을 잔뜩 싸 놓으셨다. 그러며,
" 이건 미소양 가져가서 먹고 이건 너... 넌 집에서 밥 안 먹지? 병원에다 가져다 주렴. 넉넉히 담았어."
" 저 이제 집에서 밥 먹어요. 어머니. 잘 먹을게요. "
이렇게 말하며 반찬을 받아 주섬주섬 차에 실었다. 내가 곁에 다가가 소곤대며,
' 집에 물밖에 없는 사람이... 어머니께 거짓말을...'
그러자 그가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고는
" 어머니 저희 올라갈게요. 또 전화드릴게요. "
그렇게 말하며 바로 집을 나섰다.
차에 타서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운전을 하다 휙 하고 돌아보더니,
" 뭐. 걱정돼서 걱정돼서 어쭤봤었어. 혹시나 혹시나 거기 왔었는지."
내가 사라져서 너무 놀란 그가 하도 연락이 안 돼서 희경에게 전화를 걸자 내가 강원도 찜질방에 있다고 들었다고만 알려줬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일대 찜질방 큰 곳을 돌다 어머니께 여쭤봤고 어머니께서 걱정을 해서 통화를 하면서 자연히 내가 가출해 여기 오게 된 것도 알게 되신 거였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나는 분명 학비를 벌러 최대한 서울에서 멀면서 돈을 많이 주고 숙박을 제공하는 고급 알바를 그것도 나름 주야간을 도맡아 세탁도 돕고 카운터도 보고 그렇게 주인내외의 손발이 되어 미친 듯 일을 하며 제법 쏠쏠한 아르바이트비를 받는 일자리를 구한 거였지만 그저 연우의 눈에는 집 나간 여동생이었던 것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남양주 나들목에 접어들 때 그가 물었다.
" 이제 진짜 며칠 안 남았어. 개학.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 시간 채워야지."
" 무슨 시간?"
" 1시간 20분"
휴우. 연우는 한숨을 쉬며 또 한숨을 쉬며 그렇게 차창을 내리고는 팔을 들어 올려 볼을 받쳤다. 그리고 내게,
" 원래라면 이대로 집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가자. "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데리고 백화점을 갔다. 그리고는 옷가게 들러 이것저것 옷을 고르고 내게 막 대어 보고는,
" 입어봐."
내가 아무 말 않고 미동도 않고 그 자리 그대로 있자,
" 아 얼른 입어봐. 예쁜지 좀 보게. 탐이 나야 더 애간장 녹을 거 아냐."
마치 내 복수에 동참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는 그렇게 내게 옷을 골라 주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집어준 옷을 내려두고, 무릎 위 허벅지 중간아래로 내려오는 목이 V형으로 깊게 파진 흰색 원피스를 들고는 탈의실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자,
" 통과. "
그리고 그가 이끈 곳은 가방점. 산 뜻한 핑크빛이 도는 작은 핸드백 기본 스타일의 명품백을 내게 대어보고는
" 이걸로 하자. "
그리고 계산을 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신발 가게. 제법 힐 라인이 잘빠진 흰색 샌들을 골라 내게 신어보라 말한 뒤
" 뭐야. 입히면 다 맞네. 편해서 좋아. 가자."
그렇게 계산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반찬을 냉장고까지 넣어주고 그는 식탁에 앉아 물을 한잔 달라고 해서 마시고는 내게 앉아보라고 말했다.
" 이 오빠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진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 너 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어서 부득이 동참은 했는데 오늘 사준 거 물건 하나도 내 허락 없이는 입지 마. 알았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 아 글쎄. 그 새끼 만날 때도 학교 갈 때도 절대 입지 마. 알았지? 내가 말하면 딱 그때 입어. 알았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의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자꾸 궁금해졌다.
개학을 하고 나는 또다시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생각해 봤다.
이 나머지 1시간 20분을 어떻게 활용해서 써먹을까?
연우에게 말했던 2시간 중 40분은 재우와 마지막 만난 날을 기준으로 그러니까 방학 한 사흘 전쯤으로 거슬러 가서 마지막이었다.
여느 때와 변함없이 재우가 도서관에 나를 찾아와서 옆자리에 앉았을 때 10분.
그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귀를 간지럽히듯 말하는 척하며 그의 귓불을 핥았고 그런 간지러움에 그가 몸서리치며 내 손을 이끌고 나가려 할 때 나는 짐을 챙겨 알바를 간다고 나와 집으로 향했었다.
그리고 30분은 그 다음 날 재우가 새벽같이 도서관에 있는 내게 찾아와 내 손을 이끌고 자취방으로 가서 막 관계를 시작하려고 할 때 내가 수업에 늦는다며 벌떡 일어나 나오며 사용했다.
그렇게 방학동안 찜질방에서 재우와 떨어져 보내며 어떻게 남은 시간을 재우에게 되돌려 줄지 고민하며 남겨둔 시간.
1시간 20분.
' 이 시간 동안 어떻게 너의 간을 빼먹어 줄까. '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복귀한 뒤 도서관에 앉아 고민하던 찰나, 휴대폰 진동이 울려 급히 전화를 받으려 도서관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 오빠 누가 들어와요. 보면 어떻게."
" 괜찮아. 신경도 안 써."
재우 목소리였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나를 본 재우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그녀와 키스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전 여자 친구였다.
나는 손에 들었던 핸드폰을 보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우였다.
" 응. 오빠 왜?"
" 아 학교 잘 갔나 해서. 점심시간이잖아. 너 또 쫄쫄 굶고 있냐?"
" 아 아니. 아직 밥 안 먹었어. "
" 뭐? 왜 밥을 안 먹어? 지금이 몇 신데? 혹시 그 자식..."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연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잠시만 미소야. 일단 끊어봐. 다시 전화할게."
" 응 알았어. 오빠 밑에서 기다려. 짐 챙겨서 내려갈게. "
그렇게 다 들으라는 듯 나는 말하며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1층까지 내려와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미친 듯 중앙 현관으로 달려 올라가 짐을 챙겨 돌아서 다시 중앙 현관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 와 연기 잘하네."
재우였다.
나는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계획과 달리 날아갔지만 사용은 했다. 10분.
며칠이 지나 수업을 마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본의 아니게 미리 구해뒀던 알바를 그놈 때문에 날려 먹은 바람에 저녁 알바를 구해야 했다. 그냥 집 근처를 구하는 편이 속 편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 쉬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 재우가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못 본 척 지나치며 정류장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강의를 들으며.
그러자 그가 내 곁에 다가와 자리에 앉는가 싶더니 내 어깨에 그의 어깨가 부딪혔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며 내 손을 잡았다.
" 왜? 미소야?"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재우는 내게 물었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 왜? 미소야? 언제부터 안 거야?"
내가 그렇게 재우에게 묻자 어느새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 오빠 아는 사람이야?"
그러자 그가 자리에 앉더니 그의 여자 친구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한 후 끌어 앉고는 머리켤을 천천히 넘기며 말했다.
" 아. 아냐. 내가 잘못 봤어. 미정이라고. 아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곧 버스가 도착하자 그렇게 유유히 그들은 버스에 올라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떠나는 버스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분은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왜일까. 훗. 왜지?
" 인정. 내가 개새끼 너 하나는 인정해 주지. 타이밍 기가 막히게 잘 잡네. 아하하하하하하 "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렇게 미친 듯 소리를 내고 웃으며 박수를 쳐대며 가는 버스를 향해
" 유후"
소리를 지른 뒤 두 손을 번쩍 들어 저만치 멀어진 버스를 보며 엄지 척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