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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아 Mar 04. 2021

쓰디쓴 시절 달달한 고구마의 추억

꼰대가 되고 있다는 증거 하나 - 200922

언제였더라! 그러니까 제대 후 복학을 앞둔 해 겨울이었으니까 97년이었을게다. 늦깎이 대학생의 부모님에 대한 염치였을까? 학비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무턱대고 군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불현듯 그때의 몇 가지 기억들이 생각났다. 


첫 손님은 배스킨라빈스 알바생이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또래였고 단발머리였다. 그녀는 “와 벌써 군고구마가 나왔네”하면서 2천 원에 몇 개인지를 물었다. 당시 고구마 한 박스의 가격이 얼마인지도 한 박스에 대략 몇 개가 들었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먹으려고 사다 놓은 집에 있던 고구마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5개라고 했고 그것을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주었다. 까만 비닐봉지도 새것이 아니었다. 역시나 엄마가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것들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몰랐다. 뜨거운 군고구마가 비닐을 녹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배스킨라빈스로 들어가기도 전에 까만 비닐봉지는 녹아 터졌고 군고구마는 철퍼덕하고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제야 아버지가 가끔씩 종이봉투에 붕어빵이나 군고구마를 사 오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랴. 이미 엎어진 물인걸, 아니 군고구마인걸... 주변 가판대에 있는 벼룩시장을 가져와서 아무렇게나 정말로 투박하게 고구마를 싸서 주었다. 물론 새것으로... 그때부터 그녀는 거의 매일 군고구마를 샀고 나는 군고구마를 판 돈으로 어쩌다 한 번씩 배스킨라빈스 고급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와 군고구마 장사 경쟁을 하던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채 좌판을 열고 겨울에는 군고구마 장사를 했다. 그의 군고구마 수레는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삐까뻔쩍했다. 당시 내 것이 티코였다면 그의 것은 당시 suv의 자랑 갤로퍼였다. 수레 하나에 군고구마통이 무려 세 개나 달렸다. 게다가 화덕처럼 생긴 가스불로 고구마를 구워댔다. 감자도 구웠고 밤도 구웠다. 주력은 군고구마였지만 군감자와 군밤도 팔았다. 군고구마를 2천 원어치 사면 군밤과 군감자도 서비스로 하나씩 끼워주었다. 야채 장사를 하기 때문에 질 좋고 맛있는 고구마를 싼값에 가져왔을 것이다. 자본주의 질서 내에서 그와 경쟁을 한다는 건 무모해 보였다. 집적과 집중이라고 했나. 모든 고객과 부는 그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군고구마는 역시 장작으로 구워야 정겹고 맛있습니다”라는 피켓을 만들어 홍보했다. 가스불로 구운 고구마와 장작으로 구운 고구마를 상상해보시라!  또 하나는 긴 노동시간이었다. 오전 11시부터 밤 12시까지 장사를 했다.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지친 몸으로 터덜터덜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기다렸다. 언제든 그곳에 가면 잘 생긴(?) 그 젊은이가 장작으로 굽는 고구마를 살 수 있다는...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은 그 거대한 군고구마 수레를 볼 수 없었다.


97년 겨울이었으니까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거리에 넘쳐났을 때였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 장작불도 끄고 남은 군고구마를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서류가방을 든 40대 그러니까 지금의 내 나이 때 아저씨 한 분이 500원어치만 달라고 했다. 원래 500원어치는 팔지 않는다. 한 개를 주자니 야박해 보이고 두 개를 주자니 단가가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줘야만 할 것 같았다. 두 개를 건넸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군고구마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괜히 짠해서 근처 자판기에서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 건넸다. 그러자 다 큰 아저씨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거다. 사립학교 행정실장(그때도 행정실이란 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아니고 사무를 보는 부서에서 제일 높은 직급에 있었다고 했다)이었는데 잘렸다는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말도 못 하고 학교에 간다고 하고 나와서 인력시장에 가는데 고작 일주일에 한두 번 팔려나간다는 것이다. 위로 한 마디 할 수 있을 만큼 주변머리도 없는 나였어서 남은 군고구마 전부를 건네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해야만 했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씩 500원어치에 남은 군고구마를 모두 떨이로 가져갔다. 아주 가끔씩 그가 흘린 눈물은 떨이를 가져가기 위한 악어의 눈물은 아니었을까 하는 시답잖은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장작불로 구운 고구마가 더 맛있는 이유는 추운 겨울 고구마의 달달함이 아니라 장작불의 따스함과 푸근함을 먹기 때문이 아닐까? 


11시부터 장사를 하려면 9시부터는 준비를 해야 한다. 장작을 주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참나무 장작은 도무지 수지가 안 맞아서 꿈도 못 꾼다. 대신 아파트 주변 재활용장 주변을 돈다. 그러면 가정에서 버려지는 장롱이나 책장 등의 가구를 경비아저씨들이 분해해서 차곡차곡 모아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정에서 경비아저씨에게 재활용 처리 스티커 비용을 주면 아저씨는 스티커를 사서 붙이는 대신 가구를 분해해서 내가 가져가기 좋게 만들어 놓는다. 그럼 나는 그것으로 고구마를 굽고 또 남은 고구마는 경비아저씨들의 저녁 야식으로 드렸다. 아저씨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고였고 내 입장에서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IMF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는 게 어려웠을 시기였다. 한 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초췌한 할아버지가 고구마 3개를 달라고 하며 만원을 건넸던 적이 있었다. 거스름돈 9천 원을 드리니 됐다는 거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젊은이처럼 열심히 사는 게 너무 고마워서라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는 그 이후부터도 일주일에 세네 번씩은 오셔서 만원에 고구마 세 개씩을 가져가셨다. 당시 그 동네(서울 상계동 마들역 부근)에서 제일가는 부자라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

마들역 앞 인도는 한낮에는 시장 골목으로 변했다. 200여 미터 전체가 노점과 좌판이 나래비를 섰으니까. 문제는 구청의 노점 단속이었다. 오후 2시가 되면 단속 트럭이 와서 4시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그 2시간 동안은 장사를 거의 못한다고 봐야 했다. 과일 트럭, 떡볶이 순대 어묵 포장마차, 멍게 리어카, 붕어빵 튀김 수레 등 모든 좌판이 뒷골목으로 숨어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숨어든 뒷골목에선 2시간 동안 시끌벅쩍한 파티가 벌어진다. 군고구마를 꺼내놓고 귤 한 박스를 풀고 바삭한 붕어빵과 튀김에 멍게와 초고추장까지... 참 생선 아주머니도 있었는데 어떨 때는 고등어 2마리 또 어떤 날은 꽁치, 또 꼬막을 내놓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먹냐고? 굵은소금을 솔솔 뿌린 후 포일에 싸서 고구마통에 넣고 굽는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그 고등어구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왁자한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석 달은 참 정겹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11월부터 복학하기 전인 이듬해 2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 등록금에 1년 치 자취방 세를 내고도 남을 만큼의 큰돈을 벌었다. 뭐를 하든 두려울 것 하나 없었을 때였다. 하지만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모든 게 두렵다.

내년에는 고구마밭을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다섯 식구 한겨울 내내 실컷 먹을 수 있도록...

올해 초 처음으로 텃밭을 만들고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는 비료를 주면 안 된다고 해서 그저 맨 땅에 이랑을 만들어서 대충 아무렇게나 고구마 순을 묻었던 터였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기특하게도 모두에서 뿌리를 내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구마 줄기가 밭 전체를 점령해버렸다.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한다는데 그새를 참지 못하고 고구마 줄기 몇 개를 뽑아봤다. 오호~ 생각보다 많은 양의 고구마가 올라왔다. 그중에 얇은 놈 몇 개를 삶았다. 달고 맛있다. 심지어 심도 없다. 딸내미랑 고망쥐처럼 맛있네를 연발하며 순식간에 여러 개를 해치웠다. 늙은 것일까? 고구마 하나 먹으면서 20년 전의 그때가 떠올라 이렇게 주절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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