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어떤 사랑을 해오신 건가요?
#1.
"사랑에 빠졌다"
이런 흔하디흔한 표현을 두고 사랑의 불가항력적 성격과 무의식적인 저항을 떠올리는 사람의 책을 어떻게 안 읽을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지, 작가의 통찰력에 놀라면서 읽었다.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감히 '생애'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잘 풀어낸 것 같다. 책에선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나온다. 형배, 선희, 영석, 준호, 민영, 그리고 형배의 부모님까지 제각기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 비슷하지만 다른 사랑의 모습들을 책에 잘 녹여낸 것 같다. 사랑은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니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서도 이런 통찰이 가능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아니면 설마 작가님은 이런 사랑들을 다 경험해 본 걸까?
책에서 하는 말이 가장 공감이 갔던 인물은 '준호'이다. 과격해 보이지만 그의 논리를 깨긴 참 어렵다. 지금까지 알던 지식과 경험한 것들로 애써 부정할 뿐이다. 영화 <HER>에서 사만다의 사랑도 떠올랐다. 조금 먼 미래에서는 그런 '폴리아모리'가 우리나라에서도 보이지 않을까? 반면, 내가 했던 사랑과 유사한 건 안타깝게도 형배와 영석의 모습이다. 웹툰 <찌질의 역사>에 나오는 20대 초반 남성의 찌질한 연애를 볼 때는 마치 내 모습 같아 크게 웃었는데, 형배와 영석을 볼 땐 공감했지만 웃진 못했다. 너무 현실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사랑을 할까 겁이 났다. 다음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노력은 하겠지만, 아마도 그저 숙주로서 내 안에 들어오는 사랑을 받아들일 것만 같다.
#2.
책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책들이 생각났다. 주제, 이야기하는 방식 그리고 소설을 가장한 철학책이라는 게 비슷한 것 같다. 당연히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이 더 유명하지만, 나한테는 이 책이 훨씬 와닿았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루해서 포기하고 이쪽으로 선회했다.(잘한 것 같다!) 번역도 그렇고, 사랑을 대하는 문화 차이도 있다 보니 아무래도 우리나라 책이 더 잘 읽힌 것 같다. 사랑 관련된 책을 떠올리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이제는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 일 것 같다.
#3.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도 참여했는데, 재밌게도 이 책과 영화 <첨밀밀>을 함께 보고 얘기를 나누었다. 198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소군(여명)과 이요(장만옥)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두 사람은 성향이 아주 다르다. 적당히 벌어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소군과 야망을 갖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요. 상황도 여의치 않다. 블랙 프라이데이에 크게 데인 이요와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는 소군. 그런 와중에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빠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는 둘의 사랑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런 사랑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이런 형태의 사랑도 분명 사랑인 것 같다.
독서 토론에서 공통적으로 얘기가 나온 게 영화의 세련됨이다. 30여 년 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지 않은 게 참 신기하다. 마지막 장면의 연출은 첨밀밀이 많은 영화들에 영향을 주었겠다고 생각했다. 또, 음악이 참 매력적이다. 적절한 장면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더욱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어준다. 아마도,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을 메인 OST, 등려군의 첨밀밀은 역시 명불허전. 사실, 주변에 첨밀밀 아냐고 물어보면 노래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유명하고, 또 그만큼 좋은 곡이다. 안 들어 보신 분 꼭 들어보시길!
#4.
작가가 사용하는 문장들이 정말 재밌다. 말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곱씹을수록 그 의미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어렴풋한 것이 어떤 것보다 또렷하고 실체 없는 것이 무엇보다 생생했다."
"사랑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지만 사랑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지만,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저런 문장을 수집하다 보니 '하이라이트·메모'란에 55개의 문장이 쌓였다. 독후감을 쓰며 계속해서 음미해 보는데, 다시금 예술이라고 느끼고 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아이유가 나얼의 곡 가이드에 대해 말하면서 황홀함과 동시에 가수로서의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비록 작가는 아니지만, 아이유의 감정이 공감이 갔다. 그래도, 무력감보다는 황홀감이 큰 것 같으니, 앞으로도 이 작가의 문장을 열심히 수집해야겠다.
#5.
15년 전 이 책의 작가의 말에 나는 욕조가 놓인 방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는 문장을 썼었다. <욕조가 놓인 방>이 연애소설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사람들의 마음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소설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둘을 다른 것으로 보았다는 게, 지금은 좀 이상하다. 연애소설이 곧 사람들의 마음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소설이 아닌가. - <욕조가 놓인 방> 2022년 개정판 서문
책을 읽고 작가의 문장력과 호흡에 너무 끌려 충동적으로 책을 샀다. 사랑의 생애는 E-book으로 읽었는데, 왠지 종이책이 사고 싶었다. 이 책 역시 연애를 통해서 사람의 속마음을 말하는 책인 것 같은데,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내 취향일 것 같다! 해설을 제외한 분량은 110p인데 요즘 읽을 책이 많다 보니 선뜻 책을 펼치기가 어렵다. 언제 읽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