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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과 사막 가운데_알마티, 카자흐스탄

나의 비단길 이야기-9

by 현진

#27 세 번째 만남


"오늘 차가 엄청 막히네..."

메흐메드는 창 밖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카자흐스탄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는 날. 여기 학생들도 교복을 입는데, 교복 위에 선거철 정치인처럼 띠를 두르고 다닌다. 띠에는 '졸업자'라고 쓰여있다고 메흐메드가 알려줬다. 모두들 정말 신나 보였다. 졸업장을 받고 사진을 몇 장 찍고 친구들과 모여 토할 때까지 술을 마셨던 내 졸업식이 떠올라 잠깐 친구들 생각을 했다.


20180525_161009.jpg 대통령 공원


졸업 사진을 찍는 학생들로 붐비던 대통령 공원은 규모가 꽤 크다. 산책로, 벤치, 분수 같은 조경이 예쁘게 조성돼있다. 잔디도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고. 누군가 이 넓은 잔디밭을 땀 흘려가면서 관리했겠지. 갑자기 털털거리던 제초기가 떠오르며 잔디밭이 잔인해 보였다.


카우치서핑의 행아웃 기능을 처음 써봤다. 활성화를 시키면 같은 도시에 있는 다른 카우치서퍼들을 만날 수 있다. 행아웃 활성화를 해놨는데, 몇 분 뒤에 리퀘스트가 왔다. 신기했다. 저녁에 시내인 지베크 졸리에서 마지나를 만나기로 했다.


허겁지겁 택시를 타고 왔지만, 약속 시간인 6시보다 늦게 도착했다. 마지나는 이미 와있었다.

"즈드라스트부이쩨!"

어색하게 첫인사를 하고, 먼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직 해가 안 져서 메흐메드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배고픈 메흐메드를 앞에 두고 피자 한 판을 마지나랑 나눠먹었다. 나도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식당을 나와 길거리를 걷는데, 낯익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캐나다인 아비나쉬는 투루판과 이닝의 호스텔에서 만났던 친구. 자전거를 멈추고 서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끌어안았다.

"야 너 뭐냐, 나 스토킹 하냐?"

거의 같은 말이 각자의 입에서 튀어나와 부딪혔다. 서로 중국에서 여기까지의 여정을 떠들다 깜빡 잊고 있었던 친구들 소개를 했다.

"여기는 마지나와 메흐메드. 이쪽은 아비나쉬.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한잔하러 갑시다!"


20180525_235932.jpg 추코트카 바


메흐메드도 근처에 친구가 있다며 친구를 데려와서 인원이 5명으로 불어났다. 술집을 찾아서 맥주를 마시고 게임을 했다. 게임 이름은 모르겠는데, 특정 단어가 휴대폰에 떠오르고 제한시간이 주어진다. 술래는 폰을 이마에 붙여서 단어를 못 보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보고 술래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식이다. 술래는 그걸 듣고 단어를 맞추고, 스무고개랑 비슷하다.

"해리포터...? 아니야? 그러면 뭐지... 아니 힌트 하나만 더 주라"

별 거 아닌데 왜 이렇게 웃기는지, 다들 숨 넘어가게 웃어댔다.


술을 몇 잔씩 마시고는 클럽으로 향했다. 아비나쉬와 메흐메드는 바에 앉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마지나는 춤을 췄다. 러시아와 인접한 지역인 악토베가 고향인 그녀는 알마티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거친 면으로 만든 스커트와 흰색 티셔츠가 잘 어울렸다.

"생일 축하해, 메흐메드!"

12시가 넘자마자 우리는 메흐메드에게 달려가 등을 두드려댔다. 어색해하는 메흐메드를 플로어로 끄집어냈고, 이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클럽에서 나왔을 때 귀가 멍멍했다. 서로 소리치듯 얘기를 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지난 캄캄한 판필로프 공원에서 우리는 달리기를 했다.


#28 소비에트 아파트먼트


기다리던 카우치서핑 리퀘스트에 대한 답장이 왔다. 오늘 오후부터 호스팅을 할 수 있다며, 집주소를 보내줬다. 내가 있는 곳과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 지하철을 타야 했다.

"굿모닝..."

침대에 걸터앉아 열심히 지하철 노선을 검색하고 있던 중 맞은편 침대의 메흐메드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라마단 기간이긴 하지만, 오늘은 생일이니까 금식 안 할 거라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메흐메드, 너 그저께 내가 산 까만 라면 기억해? 내가 그걸로 점심 만들어줄게, 잠깐만 기다려봐"

아직 정신이 덜 든 그를 앉혀놓고 공용 부엌에서 불닭볶음면을 삶았다. 네 이놈 신성한 라마단 기간을 안 지키다니, 알라신의 분노를 보여주마!

불닭볶음면의 소스를 남김없이 다 짜넣었다. 그리고 메흐메드를 불렀다. 거의 울면서 먹는 메흐메드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맵지...? 내일 화장실에서 한번 더 매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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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메흐메드와 작별하고, 카우치서핑 호스트인 발렌티나의 집으로 향했다. 자기 집이 소비에트 스타일 아파트라고 했는데, 진짜 구소련 시대 건물이었다.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는 엘리베이터는 3명이 간신히 탈 수 있을까, 4명은 못 탈 것 같았다. 8층에 내려 떨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버튼
20180528_091905_HDR.jpg 아파트 뷰


발렌티나는 반갑게 맞아줬다.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눴다. 우리 누나랑 동갑인데, 신기하게 자기도 나랑 동갑인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또 영어를 정말 잘했는데, 내가 본 러시아인 중에서 영어 제일 잘하는 것 같았다. 카자흐어도 할 줄 아냐고 물어봤더니 못한다고, 하지만 알마티에서는 러시아어가 카자흐 어보다 많이 쓰인다고 했다. 카자흐 어가 공용어인 줄 알았는데, 카자흐 민족만 쓰는 것 같았고 이곳의 러시아 사람들은 여전히 러시아어를 쓴다.


"너 오늘 계획은 뭐야?"

"아직 모르겠는데, 어디가 좋아요? 콕토베 언덕이랑 판필로프 공원은 가봤어요"

"그럼 메데우나 침불락은 어때? 알마티 외곽의 스키리조트가 있는 산인데 버스 타고 올라갈 수도 있어. 거기서는 만년설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거야"

그녀의 추천대로 산으로 향했다. 워커를 신고, 긴팔 점퍼도 챙겼다. 산 위에 올라가면 춥다며 발렌티나도 반팔 위에 후드티셔츠를 껴입고 따라나섰다. 어제 침불락에 다녀온 아비나쉬가 아직 눈이 녹는 중이라 질척해서 별로라고 했지만, 현지인과 편하게 갈 수 있을 때 가야지.


20180526_171142.jpg 메데우 빙상경기장
20180526_174107.jpg 침불락 스키 슬로프


메데우까지는 시내버스가 다니고, 메데우보다 산 위에 위치한 스키리조트인 침불락까지 가려면 케이블카를 타거나 미니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케이블카는 3000텡게 정도였고, 버스는 300텡게. 당연히 버스를 탔다. 하지만 스키 슬로프 정상까지 올라가는 두 번째 케이블카는 6월 1일에 다시 열린다고, 버스로는 베이스캠프까지 밖에 못 올라갔다. 녹는 중이긴 하지만, 여기는 여전히 잔설이 남아있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내려 슬로프가 커다란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신발을 버리기 싫어서 더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산에 다녀왔으면 고기는 먹어줘야겠지. 발렌티나가 샤슬릭 잘하는 집으로 데리고 가줬다. 샤슬릭은 꼬치구이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먹는 양꼬치보다 향신료는 적게 들어가고, 곁들여 나오는 소스도 있다. 고기 한 점 빼먹고 리뾰시카라고 불리는 빵에 소스를 치덕치덕 발라서 한입에 우물우물 같이 먹으면 엄청 맛있다. 발렌티나가 누런빛의 음료를 권했다. 크바스는 빵으로 만드는 음료라며, 카자흐스탄의 국민음료라고 했다. 빵으로 만든 음료라고? 호기심에 마셔봤는데 톡 쏘는 맛에 이어 구수한 빵 냄새가 난다. 맥콜이랑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도 밥으로 식혜를 만드니까, 비슷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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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알마티 시내를 조금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발렌티나는 건축 전공이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면서 건물 설명해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알마티 시내의 큰 건물들은 거의 다 둘러봤다. 러시아의 영향인지 큼직큼직하고 웅장한 느낌의 건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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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Dude, finally we made it!


오늘은 아비나쉬와 차른 캐년 국립공원을 가기로 했다. 버스가 7시 반에 알라타우 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6시 반쯤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다행히 아파트가 알라타우 역 근처라서 걸어가도 됐다.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발렌티나가 아침을 해줬다. 내가 준비한다고 부스럭대서 깬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오늘 많이 걸을 텐데 아침은 꼭 먹어야 한대서 먹고 나왔다. 빵이랑 주스랑 쿠키도 챙겨줘서 들고 나왔다. 이따가 점심으로 먹어야지.

(차른 캐년 가는 법 : 보통 인원을 모아 차량을 렌트한다. 아니면 투어를 신청하거나. 하지만 4인 기준 차량은 역시 비싸다. 일요일마다 알라타우역 주차장에서 버스를 운행한다. 이것도 투어 회사에서 운행하는 것 같기는 한데, 가격이 훨씬 싸다. 4000텡게)


차른 캐년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걸린다. 3시간은 포장도로를 타고 가는데, 1시간 정도는 거의 오프로드를 달린다. 에어컨도 안 되는 버스가 너무 심하게 덜컹거려서 빨리 내리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버스에서 내렸더니 미국 서부영화에서 보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깊은 계곡과 바위들. 어제는 설산이었는데, 오늘은 사막이다. 비록 버스 때문에 엉덩이가 아팠지만 계곡 아래로 내려가 길을 따라 걸었다. 왠지 방울뱀이라도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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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서 계속 걸었더니 강이 나왔다. 강변에서 챙겨 온 빵도 먹고 과자도 먹으면서 노닥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깨달았다. 버스가 있는 주차장까지 돌아가려면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걸. 내리막길은 나쁘지 않았지만, 촉박한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서 다시 오르막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건 힘든 일이었다. '제발 이번 모퉁이만 돌면 나와라'라는 주문을 몇 번은 반복하다가 겨우 주차장으로 가는 길을 찾았을 때, 너무 기뻤다. 주차장 앞에서 아비나쉬랑 하이파이브를 했다. 아비나쉬랑 말하면서 느꼈는데, 평소 쓰는 말에 dude, sucks, shit 등을 좀 섞으면 아메리칸 스타일로 말할 수 있다. Dude, finally we mad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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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투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지 호수도 하나 들렀다. 이름을 물어봤더니 바르토게이(Bartogai)라는 생소한 이름을 알려줬다. 꽤 높아 보이는 산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데,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어서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산이 가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거리가 가늠이 잘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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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 앉아서 물살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 ASMR 같은 걸 듣는 기분이었다. 먼 산을 보면서 소리만 듣고 있었는데도 지겹거나 그러진 않았다. 문득 천천히 수영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담가본 호수는 악 소리 나게 차가웠다.


알마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아침에 나와서 하루 종일 싸돌았다니다 밤에 집에 슬쩍 들어가려니 발렌티나한테 조금 미안했다. 점심때 먹은 빵 빼고 먹은 게 없어서 배가 엄청 고팠다. 집 앞 마트에 들러서 맥주랑 쿠키를 샀다. 집에 들어갔더니 발렌티나가 저녁을 차려줬다. 으깬 감자랑 고기 요리였는데, 장조림 맛이었다. 배고파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정말 맛있어서 접시를 싹싹 긁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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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었더니 바나나가 들어간 팬케익을 구워줘서 또 먹었다. 맛있는데 배불렀다. 설거지도 못하게 하려고 해서 설거지는 제발 제가 하겠습니다 했다. 배고프고 피곤했는데 갑자기 배불리 먹고 맥주까지 마셨더니 잠이 쏟아졌다. 하루 종일 먼지를 많이 마셔서 얼굴이 찝찝했다. 샤워는 하고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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