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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날들_알마티, 카자흐스탄

나의 비단길 이야기-10

by 현진

#30 달이 차오른다, 가자


발렌티나가 아침 일찍부터 출근 준비를 했다. 나는 일어나 다녀오세요, 인사만 해주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편안하게 눈을 떠보니 이미 정오가 지나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발렌티나가 오믈렛을 만들어두었다. 오믈렛을 데워먹고 빈둥대다가 밖으로 나갔다. 딱히 어디를 찾아가지는 않고 그냥 걸었다. 걷다가 마트 구경도 하고, 공원 산책도 하고. 나는 이 도시가 좋다. 공원에 한참을 앉아서 비둘기를 구경했다. 비둘기가 걷는 모습은 자꾸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머리로 추진력을 얻어서 몸을 끌고 가는 것 같다.


오우 좀 놀 줄 아는 놈인가?


그저께 샤슬릭을 먹으면서 같이 마신 크바스 얘기를 몇 번 했더니 저녁때쯤 발렌티나가 퇴근하고 오는 길에 나오래서 크바스 전문점을 갔다. 크바스 종류만 십 수 가지였다. 사실 그냥 크바스는 김 빠진 맥주 맛이다. 레몬향이 들어간 크바스가 진짜 맛있다.



새로 사 온 크바스에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감자를 데워 먹었다. 밥을 먹고 쉬고 있으니 발렌티나의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남자 친구 세르게이가 차를 몰고 왔다.

"뒷산에 달 보러 가자 친구들!"

난 밤에 하는 드라이브를 정말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 운전대를 잡은 크리스티나의 선곡 센스도 좋았다. 완벽한 밤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차를 몰고 이제는 익숙한 도심을 달렸다. 익숙한 곳을 지나니 점점 한적한 주택가가 나오고, 아예 불이 꺼진 어두운 도로로 들어섰다. 시내를 꽤 멀리 벗어나 근교에 있는 산으로 간다고 했다. 날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자동차는 포장도로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세단이 올라갈 수 없는 비포장도로라 차를 세워두고 내렸다.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산길이었다. 해리포터처럼 휴대폰을 다들 꺼내 불을 켰다. "루모스!"


세르게이가 길을 안다고 앞장서서 걸었다. 산이라기보다는 완만한 언덕이었는데, 낮에는 소와 말을 방목하는 곳인지 큰 똥들이 여기저기 있어서 휴대폰 라이트로 발 밑을 비추면서 걸어야 했다. 낮에 보는 것보다 불에 비춰 보이는 똥이 더 커 보였다. 커다란 송전탑이 있는 언덕이었는데 송전탑 근처에 가면 파지직 거리며 전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근처엔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전기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달이 정말 밝은 날이었는고, 발렌티나는 달 사진을 찍으려 휴대폰 카메라 설정을 이리저리 바꿨다. 하지만 달을 담기란 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계속 걸어 언덕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알마티 시내가 보였다. 낮에 보면 초록빛 도시지만, 지금은 노란 불빛밖에 안보였다. 평평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황금실로 수를 놓은 커다란 태피스트리 같았다.



날씨가 추워서 보온병에 담아 갔던 뜨거운 차를 나눠마셨다. 다행히 크리스티나 차에 담요가 있어서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전기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야경을 봤다. 춥지만 않았어도 더 있었을 텐데, 사실 야경보다는 달을 보는 게 더 좋았다. 그리고 거의 만월이었는데도 북두칠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별들을 보며 별자리 얘기를 했다.


#31 마지나 샤타예브나


발렌티나 집을 나서 마지나의 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나는 날까지 나흘을 신세 지기로 했다. 다행히 발렌티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개울을 따라 걸었다. 비슷하게 생긴, 단호한 스타일의 소비에트 시대 건물들을 연달아 지나쳤다. 마지나는 공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만에 마지나를 만났다. 짐을 풀고 그녀가 다녔던 대학교로 나갔다. 대학 근처에는 카페가 많다.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펍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그녀는 란제리 디자이너였다. 자기 성을 딴 브랜드도 있다며, 휴대폰을 꺼내 열심히 설명하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마지나의 작업실

화요일부터 내내 아무것도 안 했다. 장을 봐와서 밥을 해 먹고, 때때로 마지나가 옷 만드는 걸 구경했다. 그녀가 작업이 없는 날이면 영화를 보거나 카드놀이를 했다. 한국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러시아어 자막을 찾는 게 어려웠다. 작업이 빨리 끝난 날, 자기가 잘 안다는 조지아 음식점에 나를 데려갔다. 조지아라니, 생소했지만 치즈가 올라간 하차푸리는 정말 맛있었다. 생각해보니 두 달만 있으면 조지아에 갈 텐데, 가서 많이 먹어야지.


마지나는 내가 더듬더듬 읽어가는 러시아어 간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줬다. 알마티에서 러시아어가 많이 는 느낌이다. 기초적인 패턴으로 대화하는 법을 익혔다. 예를 들면 기차역은 어디에 있나요라던가, 물 좀 더 주세요 라던지. 상대방의 대답도 뻔하기 때문에 그 대답에 이어 말할 수 있는 다음 문장까지 배우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다.


러시안 카드


하루는 메흐메드를 초대해 같이 맥주를 마셨다. 그도 이제 러시아어 강좌가 끝나가서 곧 비슈케크로 다시 돌아갈 계획인 것 같았다. 국경에서 가끔 뇌물을 요구하기도 한다며, 나에게 주의를 줬다.


친구들한테 한국 요리를 대접해주고 싶었는데, 만들 줄 아는 게 라면밖에 생각이 안 나서 아쉬웠다. 찬밥이라도 있으면 많은걸 할 수 있는데, 밥 없이 뭘 하려니 생각이 안 났다. 닭볶음탕 같은 간단한 고기 요리라도 연습해 갈 걸. 시시한 펜네 파스타나 만들었다.



#32 다시 길 위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날이다. 알마티에서는 딱 2주를 채웠다. 나는 이 도시와 여기서 보낸 5월이 마음에 들었고,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도 헤어지기 싫었다. 프란체스카나 칭휘와 헤어질 때도 비슷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아직은 여행지에서의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익숙하지가 않다.

"현진, 도스비다냐"(잘가)

마지나가 버스터미널까지 배웅을 해줬다.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가는 버스는 샤이란 버스터미널에서 매일 출발한다. 비슈케크로 가는 버스 창구는 따로 있는데, 가격은 1500텡게였다. 마찬가지로 출발 시간은 없고 사람이 다 차면 출발하는 미니버스였다. 짐을 실어두고 차에 올라 노래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일어나 보니 버스가 출발해있었다. 1시간밖에 안 기다린 것 같다. 이 구간은 인기가 많아서 사람이 금방금방 찬다. 국경까지는 3시간, 창 밖의 초원과 가끔 지나가는 양 떼와 말을 보면서 노래를 들었는데 하나도 지겹지 않았다. 오히려 도착을 늦게 했으면 싶었다. 이 길을 계속 달리고만 싶은 느낌. 내가 좋아하는 여행 노래들을 반복 재생해서 들었다. 가끔 길 위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 뭔가 헤쳐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고 그댄 내게 얘기하지

그대가 말하는 세상엔 애당초 난 흥미가 없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걸 내가 틀림이 없다는 걸

어느샌가 알게 될걸 내가 번쩍번쩍할 거란 걸

_문샤이너스 '모험광백서'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사이의 코르다이 국경은 이용자도 많고 교통편도 많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수속도 금방금방 끝났다. 입국할 때 받았던 카드를 제출하고 출국 도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키르기스스탄 입국도 수월했다. 그냥 여권 받자마자 도장을 찍어줬다. 키르기스스탄은 입국 카드도 없고 외국인 거주 등록을 할 필요도 없다. 마음이 편했다.


타고 온 버스를 기다리는데 비슈케크까지 이 버스를 타고 가려면 꽤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수도까지는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의 택시로 갈아타는 것 같았다. 또 레이더를 돌렸다. 어디에 붙어야 할까.

"즈드라스트부이쩨, 모쥐나 이띠 비슈케크?"

내 앞자리에 앉았던 또래 친구가 택시 흥정을 하는 걸 보고 잽싸게 다가가 부러진 러시아어를 주섬주섬 늘어놨다.

"나 너 알아! 우리 같은 버스 타고 왔잖아, 너도 비슈케크 가는 거야? 나도 거기로 가는데 택시 같이 타자 그럼!"

유창한 영어로 대답이 돌아왔다. 친구 이름은 아루. 카자흐스탄 심켄트 출신이지만 비슈케크에 있는 대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AUCA(American Univ in Central Asia)에 다니기 때문에 영어도 잘했다. 또 완벽한 길동무를 섭외했다는 안도감에 기분이 좋았다. 아루가 흥정한 택시비는 400솜(6000원).


택시를 타고 가다가 환전소가 보여 남은 카자흐스탄 텡게를 키르기스스탄 솜으로 환전했다. 국경을 넘긴 했지만 중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올 때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구소련 국가들이라 그런지 러시아어를 쓰는 것도 똑같고 분위기도 비슷하다. 다만 깔끔한 유럽풍 도시인 알마티와 비교했을 때 여기는 좀 어수선하다. 관리가 안된 오래된 유원지 느낌이 난다. 공사가 중단된 건물도 많고 도로도 곳곳이 갈라져 정비가 잘 돼있지는 않다. 특히 신호등도 별로 없어서 길 건널 때 좌우를 잘 살펴야 한다.



통화가 바뀌었으니, 또 적응을 해야 한다. 이제 기껏 텡게에 익숙해졌는데, 당분간 돈을 쓸 때 생각을 좀 해야겠다. 개념이 서기 전에 돈을 쓰면 그냥 막 쓰게 된다. 물과 빵을 사러 슈퍼마켓에 들러서도 초콜릿과 치즈를 사도 될까 한참을 고민했다.


아루와는 헤어지면서 번호를 교환했다. 아마 다음 주쯤 만나게 될 수도. 항상 새로운 곳에 가면 거기 사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그게 제일 확실하고 또 편하니깐. 아루는 밤에 혼자 다니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호스텔 앞 골목


호스텔은 찾기가 쉬웠다. 사쿠라 호스텔은 일본인 아저씨랑 키르기스인 아주머니 부부가 운영하는 곳인데 시설도 깔끔하고 사람들도 많이 묵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 골랐는데 선택을 잘한 것 같다. 주인아저씨 때문인지 역시 일본인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 배웠던 일본어를 떠올려봤지만 머릿속에 끊어진 단어들만 떠돌았다. 군대에서 일본어를 공부해보려고 기본서를 샀는데, 딱 절반 보고 그만뒀다. 그래도 인사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어 '와따시와'로 시작하는 자기소개까지 마치면 다들 그다음부터 일본어만 써서 사실 나 일본어 못한다고 고백을 해야 했다. 6인실 같은 방을 쓰는 여행자들은 아유미, 히로, 카즈요시. 다들 익숙한 일본 이름들이었다.

"모두들 오야스미!"

새로 간 흰 시트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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