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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in the USSR_비슈케크, 키르기스스탄

나의 비단길 이야기-11

by 현진

#33 김밥과 치킨


"히로상, 란치 잇쇼니 도오데스까?"

"하이, 도우조"

맞은편 침대를 쓰는 형님인 히로상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물어봤다. 수염을 기르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는 전형적인 일본인 여행자의 모습이다. 재밌게 봤던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의 주인공과 이름이 같아 만화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모르는 눈치다. 요코하마에서 참치 식당을 한다는 그는 이제 곧 일본으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식당을 개업한다고 했다.

"스게- 그럼 개업 전 마지막 여행인 거네요?"

머리에 띠를 동여매고 사시미로 참치를 슥슥 쓸어낼 그의 모습이 퍽 잘 어울렸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점심을 먹고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 안마당 정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봤다. 히로와 같이 볼만한 영화가 있나 폴더를 뒤지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고전 '7인의 사무라이'를 틀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는 유독 비 오는 장면이 많다. 비 오는 날 비가 내리는 영화를 반은 건성으로 봤다. 하지만 히로는 내 노트북에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가 있는 것에 큰 감명을 받은 듯했다.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지쳐 노트북을 히로에게 맡기고 낮잠을 잤다. 그 사이 아루가 호스텔에 들러 키르기스스탄 심카드를 주고 갔다. 어제 자기가 안 쓰는 심카드가 있다고 준댔는데, 자는 사이에 호스텔까지 와서 리셉션에 맡겨두고 갔다고, 너무 고마웠다. 어쨌든 공짜 심카드를 얻었다.


아유미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아루가 추천해준 한국 식당이었는데, 치킨 스타라는 이름의 한국식 치킨집이었다. 치킨과 김밥, 맥주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먹는 김밥은 너무 맛있었다. 진짜 한국 김밥집에서 먹는 김밥 맛. 점원들도 한국말을 배우는 분들이 많아서 자꾸 나한테 한국말로 말을 걸고 싶어 했다.



세계일주를 하는 아유미와 여행 얘기를 하고 맥주를 마시며 노닥거렸더니 10시가 넘어있었다. 비슈케크는 밤이 되면 꽤 어둡다. 가로등도 별로 없고 공사장은 많고. 론리플래닛에도 알마티보다는 치안이 안 좋으니 주의하라는 말을 봤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우리 뒤쪽으로 누가 따라오면 지도를 확인하는 척하며 기다렸다가 우리를 앞질러가면 다시 걸었다. 아유미는 특히 더 경계하는 듯했다.

"그래도 현진짱 니가 군대를 갔다 와서 안심이야"

아닌데, 겁은 내가 더 많을걸... 하지만 겁 안 나는 척 씩씩하게 괜찮다며 걸었다. 호스텔이 어두운 골목 안에 있어서 라이트를 비추며 더듬더듬 찾아냈다. '요캇타... 앞으로 밝은 데만 다니자'



#34 이것은 문전박대?


아유미도 투르크메니스탄 비자를 받아야 한대서 같이 대사관에 가기로 했다. 줄이 길 것을 염려해 대사관이 문을 여는 9시에 딱 맞춰 가자며, 8시에 안마당에서 보자며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눈을 뜨고 불길한 예감이 확 들어 시계를 확인했더니 역시 8시 반이었다. 후다닥 슬리퍼를 신고 안마당으로 내려갔다. 아유미는 정자에 앉아있었다.

"아유미짱 고멘... 그런데 나 깨우지 그랬어!"

"아니야 괜찮아, 나도 그림을 그리면서 기다렸어" 라며 그녀는 수첩에 그린 그림들을 보여줬다. 그렇게 9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겨우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만 3개째, 남의 나라 대사관을 이렇게 다양한 나라에서 찾아가 보기도 처음이다.



버스와 합승택시인 마슈르카를 갈아타고 좀 걷기도 하면서 대사관에 도착했다. 비슈케크의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은 좀 박하다. 방문객을 마당에 세워두고, 건물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대신 두꺼운 담장에 난 구멍 같은 창문으로 비자 접수를 받는다. 초청장을 제출하고 비자 서류를 만들어서 냈다. 초청장이 없는 아유미는 초청장 신청양식을 먼저 써서 냈다.


키르기스스탄 은행


이어 비자비 55달러를 입금하러 은행에 갔다. 대사관 근처에는 은행이 없다.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가 은행에 들러 송금을 하고, 영수증을 받아 다시 대사관에 왔다. 대사관 오전 업무시간은 9시부터 12시 반까지다. 시간에 조금 쫓겼지만 시간 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사관에서는 오늘 비자 업무는 17시부터 라며 그때 다시 오라는 말만 전해줬다.


아유미는 초청장에 필요한 인접국 비자인 이란 비자 사본이 흑백이라 컬러로 다시 내라고 했다. 17시에 다시 같이 오기로, 오후에는 아루를 만나기로 했는데 아유미에게도 아루네 대학교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다시 아루를 만나 반가웠다.

"우리 학교부터 구경시켜 줄게!"

우리는 아루의 손에 이끌려 갑자기 신입생처럼 캠퍼스 투어를 하고 교내 카페에서 커피까지 마셨다. 교환학생이라도 은 느낌이다.



캠퍼스 투어를 마치자 기숙사 근처 자기 동네를 구경시켜준대서 또 따라갔다. 아루는 이제 2학년 올라가는데 선배처럼 가이드를 해줬다. 가는 길에 길거리에서 파는 걸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해서 주섬주섬 먹어야 했다. 저기가 근처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고, 저 집은 뭐가 맛있고. 찰라브라는 음료를 꼭 먹어보래서 길에서 드럼통에 넣어두고 파는 걸 한 컵 샀다. 맛은 치즈 녹인 물에 소금 한 스푼을 더 넣고 맥주 거품을 위에 올린 맛이었다. 한 모금 먹고 '앗 이건 내가 먹을게 아니구나'하는 느낌이 딱 왔다.

"어때? 별로야?"

표정으로도 읽혔는지 아루가 물어봤다.

"응... 짜고 시큼하고, 나는 좀 별로네. 이거 너 먹을래?"

"아니, 난 괜찮아. 그래도 내가 사줬으니까 다 먹을 거지?"

생일주 먹는 기분으로 숨을 꽉 참고 꿀꺽 삼켰다. 머리 위로 컵을 터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 선배님 말씀 들어야지...


구경하다 보니 5시가 다 돼서 다시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은 다행히 아루네 대학이랑 가까웠다. 4시 40분에 도착해 비자를 받으러 왔다고 했지만, 직원은 아직 5시가 안됐다고 기다리랜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당에 앉아 또 5시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5시가 넘었는데도 문을 안 열어줘서 같이 따라와 준 아루가 물어봤더니, 대사님이 출장 가셨는데 다시 오실 때까지 창구 문을 열 수가 없다고 일단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6시가 넘을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이 친구 조기퇴근하셨네... 내일 다시 오자 아유미. 밥이나 먹으러 가자"

투르크메니스탄 가기, 비자부터 쉽지 않다.



아루가 아는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편안한 소파가 많아서 좋았다. 앉아서 저녁을 먹고 술도 먹고 디저트까지 먹고 놀았다. 뭔가 아쉬워서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살짝 들러서 꼬냑과 초콜릿을 샀다. 아루가 비슈케크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면서 꼬냑을 추천했다. 200ml 작은 병에 3천원 정도로 아주 싸다. 얼음이 없어서 차가운 생수를 한 병 사서 아유미와 술을 나눠마셨다. 잠이 잘 왔다.




#35 소련으로 시간여행


아침부터 바로 대사관으로 향했다. 어제 오전과 오후 합쳐서 꽤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오늘도 기다릴 준비를 하고 갔다. 이제 대사관 가는 길도 익숙하다. 대사관 입구로 들어섰더니 경비아저씨가 알아보고 인사를 해주셨다. 굳게 닫혀있던 창구가 오늘은 아침부터 열려있다. 예감이 좋았다.


창구로 다가갔더니 언제 애태웠냐는 듯 시원하게 비자가 찍힌 여권을 내줬다. 이렇게 쉽게 받을 일이었다니... 일이 쉽게 풀리려면 이렇게 쉽게 풀리나 보다.

"얏타! 축하해 현진"

이란 비자 사본을 제출하러 온 아유미가 옆에서 박수를 쳐줬다.



비자를 받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내를 구경하러 갔다. 비슈케크의 중심지인 알라투 광장으로 갔다. 소비에트 시절에 조성된 의장용 광장의 느낌이 강하다. 별로 볼 게 없다지만 알라투 광장의 그 시절 건물들을 보는 건 재미있었다. 비슈케크의 시내는 80년대에서 멈춘 느낌이다. 물론 내가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분명 그때도 굴러다녔을 버스들이 지나다니고, 여전히 레닌의 동상이 서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비슈케크에는 햄버거 가게가 많다. 가판대 햄버거부터 수제버거까지. 평범해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달걀이 들어간 햄버거를 사 먹었다. 버거 이름은 시카고 버거. 이제껏 봐왔던 빛바랜 소련 시절의 모습 때문인지 시카고, 뉴욕, LA 등 미국의 도시 이름이 붙은 버거의 이름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이거 자본주의 맛이네요.



호스텔로 돌아가 낮잠을 자던 중 아루의 전화를 받고서 일어났다.

"현진, 언제까지 자는거야? 저녁때 별다른 계획 없으면 시내로 나와, 놀자!"

'아시아 몰'이라는 쇼핑몰 앞으로 약속을 잡았다. 아루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 친구 이름은 울룩, 당당하게 반바지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다니는 모던 보이였다. 여기는 남자가 반바지나 스키니진을 입으면 다들 쳐다본다고, 밤에는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고 한다.

"키르기스스탄도 이젠 바뀌어야 해, 너무 고리타분한 사람들이 많아"

그는 저녁 내내 이런 푸념을 늘어놨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의 금식 달인 라마단은 착실하게 지키는 착한 친구였다. 라마단이라 술을 못 먹는다는 울룩을 앞에 앉혀두고 아루와 나는 진토닉을 마셨다. 초콜릿 케이크와 진토닉은 처음 먹어봤는데 좋은 조합인 것 같다.



아루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울룩은 본가가 이식쿨 호수 근처인 카라콜인데, 시험만 끝나면 고향으로 내려간댔다. 나도 그때쯤 카라콜에 갈 건데, 시간이 맞으면 보자며 약속을 했다. 나를 이식쿨로 이끌었던 소설 '하얀배' 얘기를 해주며 고등학생 때부터 가보고 싶었다니까,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며 놀라워했다. 아마 러시아어로는 번역 안돼 있겠지.


비슈케크의 지하도


아루랑 울룩 손에 이끌려서 나이트 시티투어를 해야 했다. 이 친구들 클럽이랑 바에 왜들 이렇게 빠삭한지, 진짜 쿨한 클럽이 있다고 나를 데려가고 싶어 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커다란 클럽의 문은 닫혀 있었다. 평일이라 다행이다... 이제 그만 집에 보내줘 친구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호스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히로의 코 고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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