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해피 호스텔은 가족이 운영하는 곳인 듯싶다. 주인 할머니가 불러서 옆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감자, 치즈, 토마토가 들어간 볶음요리였다. 맛없기가 힘든 조합이다. 빵에 버터를 바르고 차에는 각설탕을 두 개 집어넣었다. 크림도 조금 넣고. 뿌예진 찻물을 휘휘 젓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굿모닝, 오늘 날씨 좋지?"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이도와 샤케드. 일정 얘기를 하다가 두 친구는 오늘 카라콜로 향한다며 이미 차를 빌려놨다고 했다.
"나도 오늘 카라콜 갈 건데, 같이 나눠 타면 안 될까?"
"오 맨, 물론이지. 아침만 다 먹고 출발하자고"
터미널로 가서 또 차편을 알아볼 생각에 귀찮았는데, 또 우연히 동행을 구했다.
이식쿨로 향하는 도로는 꽤 잘 닦여있다. 유명한 관광지니까, 가는 사람도 많은가 보다. 발락치를 지나고 드디어 이식쿨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새파란 호수가 바다 같았다. 이식쿨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새로운 친구들과 차를 나눠 타고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미루나무가 양 옆으로 늘어선 신작로 느낌 나는 길을 따라 우리가 탄 도요타 자동차는 빠르게 달렸다. 소설처럼 소련제 지굴리를 타고 왔으면 더 분위기가 났을 텐데.
동화의 계곡이라는 스카즈카 계곡에 도착해 잠시 차를 세웠다. 입장료는 50 솜. 가보지는 않았지만, 장예의 칠채산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누가 구겨놓은 듯 주름이 잔뜩 잡힌 바위들은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다른 색깔을 띠고 있었다.
하이킹을 좋아하는 이 친구들은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 해서 모래가 앉은 미끄러운 바위를 기어올랐다.
"너 축구 좋아해?"
월드컵 시즌을 앞두고 딱히 화젯거리가 없던 나는 만국 공통의 화제를 내밀었다.
"당연하지, 우리는 둘 다 미친 축구 팬이야. 다만 응원하는 팀이 다를 뿐이지 하하"
"이스라엘이면 요시 베나윤 아니야? 잉글랜드에서 뛸 때부터 봤어"
이스라엘 축구 얘기가 나오니 반색을 하며 축구팬들의 토론이 시작됐다.
"야, 이스라엘에서 제일 센 팀은 마카비 하이파야. 너 들어봤어?"
"어허, 말도 안 되는 소리! 야, 샤케드 말은 무시해. 마카비 텔아비브가 최고야"
들어본 적도 없는 이스라엘 축구팀 이름이 양쪽 귀를 번갈아가며 때린다. 이 훌리건들 앞에서 괜히 축구 얘기를 꺼냈나 싶었다.
"그래 그런데 너네 이번에 월드컵은 나가는 거지?"
"..."
다시 차에 타서 카라콜을 향해 달렸다. 여행을 하면서 매일 숙소를 바꾸는 것만큼 피곤한 게 없다. 아침마다 짐을 싸고, 또 짐을 풀고... 하지만 최근 3일 동안 세 번이나 바쁘게 숙소를 바꿨다. 그런 만큼 카라콜에서는 조금 느긋하게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떠들썩하던 이스라엘 친구들과 작별하고, 나는 미리 알아본 호스텔을 찾아 걸었다. 카라콜은 마치 이미 엔딩을 본 게임에 남아 'continue to play'를 누른 듯한 느낌이었다. 도시의 존재 목적 따위는 진작에 잃고 서서히 닳아가는 듯한 모습니다.
도착한 호스텔에서 체크인을 했다. 이 호스텔은 조금 특이하다. 건물 안의 도미트리 룸은 6달러, 마당의 유르트는 5달러여서 유르트를 골랐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텐트에 물이 새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나에게 호스텔 스탭은 '노 프로블롬'을 연발했다. 비가 오긴 하지만 하늘의 한구석은 여전히 맑다. 이런 걸 여우비라고 하나? 탁 트인 데서 봤으면 무지개도 볼 수 있었을 날씨다.
#39 빛바랜 도시
유르트 안으로 밤새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담요 밖의 아침 공기는 서늘했다. 뒷목부터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픈 것 같다. 여기서 더 있기는 힘들 것 같다. 근처의 다른 5달러짜리 호스텔로 방을 옮겼다. 소련 시대의 영웅들의 흉상과 붉은 별이 그려진 포베디 공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6월이지만 가을 아침 느낌이 난다. 다행히 오늘은 맑다. 중앙아시아의 날씨가 원래 이상한 건지 올해 날씨가 이상한 건지 여행하며 흐린 날이나 비를 자주 만났다. 그리고 6월인데 더워지지도 않고. 이건 올해가 유독 좀 춥다고 한다. 여름옷만 챙겨 왔는데, 1달째 맨날 같은 두꺼운 겉옷을 걸치고 다닌다.
밀린 빨래를 끝내고 호스텔을 나섰다. 카우치서핑에 올려둔 내 카라콜 여행 계획을 보고 메시지가 왔다. 디나는 비슈케크에 사는데, 잠시 고향에 내려와 있다고 했다. 도시 구경하는 거 도와준다 해서 점심을 먹고 '팻 캣'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Fat cat cafe
카라콜은 작은 도시다. 도시 자체로는 볼 게 별로 없다. 도시보다는 근처의 트래킹 코스의 베이스캠프 역할로 관광객을 모은다. 정교회 성당같이 시내 중심부의 옛날 건물과 공원 몇 군데를 둘러보면 할 게 없다. 시내 중심부지만 포장이 벗겨진 도로 위로 자동차와 말이 끄는 수레, 사람들이 뒤엉켜 지난다. 흙먼지가 나는 번잡한 도로를 지나면 염소들이 풀을 뜯는 한적한 주택가가 나온다. 파란 칠을 한 대문과 파란 지붕을 인 집들을 지나쳤다.
"카라콜 시내에서는 딱히 볼 게 없지? 대신 내 비밀장소에 데려가 줄게"
디나는 나를 이끌고 좁은 길로 들어섰다. 무너진 담장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갔더니 탁 트인 공터가 나왔다.
"옛날에는 여기서 경마를 했대. 지금은 가끔 말을 타는 사람들이나 와서 승마 연습을 하는 곳이야"
"으스스한데, 너는 여기 왜 와? 너도 말 타는 거야?"
"아니 하하 말은 무서워서 못 타. 혼자 조용한 곳에서 생각하며 앉아있으려고, 가끔 밤에는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와"
경마장은 오래된 스탠드와 담장이 방치되어 있고 커다란 잡초들이 자라는 곳이었다. 근처에는 철근 뼈대가 다 드러난 폐공장이 자리해있고, 그 옆엔 건설자재가 쌓여있다. 밤에 돌아다니면 돈 뺏기기 딱 좋아 보였다.
흐릿한 트랙을 따라 경마장을 걸었다. 비가 올 모양인지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호스텔 안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가 걱정됐다.
"나 호스텔에 빨래를 널어놔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알겠어! 그런데 오늘 밤에 사촌동생이랑 술 마실 건데, 너도 올래?"
"음... 생각해보고 연락 줄게, 잘 가!"
빠른 걸음으로 호스텔까지 돌아왔다. 다행히 빨래를 다 걷을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다 잠이 들었다. 30분쯤 잤나, 부스스 일어났는데 디나한테 메시지가 10개나 와있었다.
'지금 무지개 떴는데 뭐해?'
'자는 거야? 빨리 봐!!'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나가봤는데 무지개는 이미 져있었다.
'미안해 잠들었어. 그런데 나 머리가 아파서 오늘 저녁에는 못 나갈 것 같아. 다음에 만나자'
낮게 깔린 하늘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호스텔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 비틀비틀 걸어가 뜨거운 수프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두통약까지 챙겨 먹고 자리에 일찍 누웠다.
#40 디나 어머니의 초대
알람도 맞추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나 앉아 이마의 느낌에 정신을 집중했다. 오래 잔 탓에 머리가 맑지 못할 뿐, 아프지는 않았다. 여름 감기가 온 줄 알고 걱정했지만, 다행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호스텔 로비에서 달콤한 믹스 커피를 한 잔 타 마셨다. 컨디션이 돌아온 기분이다. 팻 캣 카페로 나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제처럼 밀크셰이크와 그릴 샌드위치를 먹으며 트래킹 계획을 짰다.
그러던 중 디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 일 없으면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내가 어제 키르기스 전통 음식인 베쉬바르막을 안 먹어봤다니까 어머니랑 같이 요리했다며 먹으러 오랬다. 방금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그래도 가봐야겠지.
남의 집에 갈 때는 빈 손으로 가는 거 아니라고 배웠다. 근처 시장에 들러 체리와 홍차를 샀다. 요즘은 체리가 제철이라 가격도 싸고, 맛도 좋다. 노점에서 1킬로그램을 퍼담았는데, 1500원 정도 했다. 체리만 싸다면 우리나라도 살 맛 날 텐데.
디나의 집으로 찾아가니 어머니가 요리를 내오셨다. 베쉬바르막은 초원 지대 유목민들의 전통 음식이다. 말고기는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소고기와 맛이 비슷했다. 먼저 갈비탕 맛이 나는 국물을 한 사발 마시면 이어 갈비 한 짝을 주신다. 칼로 고기를 슥슥 발라내 살코기를 다 먹고 나면 얇게 썬 고기와 직접 민 국수를 잘게 잘라 같이 비빈다. 고기 국물도 조금 부어서 축축하게 만들어 먹는다. 맛은 갈비탕에 칼국수 사리면을 넣어먹는 것 같다. 파도 송송 썰어 넣고, 깍두기도 조금 곁들이면 훨씬 좋을 텐데.
밥을 다 먹으니 바로 이어서 차를 끓여오셨다. 차와 쿠키, 잼과 과일.
"직접 만든 체리 잼 좀 크래커에 발라서 먹어봐요"
어머니는 끊임없이 먹을 것을 권하셨다. 배가 너무 불렀지만 신기하게 또 먹으면 맛있었다. 디나의 통역을 통해 어머니와 언니, 조카와도 얘기를 나눴다. 조카는 나에게 게임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바람도 쐴 겸 뒷마당으로 나갔다. 뒷마당에서 닭들이 모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새끼 고양이들이 자기들끼리 뒤엉켜서 노는걸 한참 동안 봤다. 닭은 별로 귀엽진 않지만 병아리는 귀엽다. 하지만 병아리들은 금방금방 자라서 닭이 된대서 아쉬웠다. 귀여운 모습 그대로 머물러 줄 순 없니?
한참을 놀다 호스텔에 돌아오니 호스텔 사람 몇 명이 술을 마시고 있어서 나도 껴서 앉았다.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주도하던 루슬란은 턱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러시아 사람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밑 잔을 남기면 안 돼. 무조건 원샷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술을 지나치게 권해서 나뿐만 아니라 다들 좀 당황했다. 다들 서로 먼저 방으로 들어갈 눈치만 보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이탈리아인 알레시오 커플이 먼저 일어나자 루슬란 앞에 남은 사람은 나와 프랑스인 사야 뿐이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고 싶은데 자기한테 술은 많다고 계속 냉장고에서 꺼내와서 말린다고 힘들었다. 결국 뻗어버린 루슬란을 어깨동무를 하고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루슬란의 파티에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사야와 고개를 저으며 한 마디씩을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