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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배를 찾아서_이식쿨 호수, 키르기스스탄

나의 비단길이야기-14

by 현진

#41 이식쿨 호수에 발을 담그다


여느 날처럼 팻 캣에 앉아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비치된 트래킹 안내 책자를 뒤적였다. 카라콜 근처에는 트래킹 코스가 많다. 하지만 몇 박씩 텐트에서 자며 계곡과 산을 넘나들어야 하는 코스를 빼면 하루 만에 왔다 갔다 할 곳은 제한적이다. 디나가 그중 제티오구즈 계곡이 괜찮고, 가고 싶으면 같이 가준대서 가보기로 했다. 그래도 너무 많이는 걷지 말자며.



마슈르카를 타고 제티오구즈 마을로 갔다. 거기서 택시로 갈아타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계곡 입구가 나온다. 제티오구즈는 일곱 황소라는 뜻이라고 디나가 설명을 해줬다. 과연 황소 모양의 커다란 붉은 바위들이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다. 여느 키르기스스탄 마을같이 닭과 말이 돌아다닌다. 닭이 말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말똥을 주워 먹었다.



트래킹 코스를 따라 계곡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대자연이었다. 무섭도록 울창한 침엽수 사이로 탁한 계곡물은 희뿌연 거품을 내며 흘렀다. 계곡을 따라 낚시하는 사람들도 가끔 보인다. 저렇게 물살이 센데 물고기가 잡힐까? 길을 따라 계속 걸으니 좋긴 한데 지루했다. 디나가 여기 전설이랑 이것저것 얘기해주긴 했지만, 뭔가 익스트림한 게 없었다.

"하지만 폭포까지 가려면 1시간은 더 걸어야 하는데?"

디나는 제티오구즈를 만만하게 보고 온 나를 보며 우습다는 듯 말했다. 한 길이라 돌아올 때도 같은 길로 걸어와야 한다니, 깔끔하게 포기했다. 폭포는 사진으로 봐야겠다.



디나가 잠깐 기다려달라며, 커다란 나무 뒤에 쭈그리고 앉아 성냥을 켜 필터가 없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학생도 아닌데 담배를 왜 숨어서 피워?"

"키르기스스탄이니까.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사람들이 다 안 좋게 쳐다봐. 심지어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어. 사실 너 같은 외국인이랑 길을 걸어도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담배까지 피우면... 나는 그런 사람들이 싫어"

반바지를 입고 다니던 울룩이 한 말이 생각났다. 잠깐 스쳐 지나갈 내가 본 키르기스스탄은 어떤 점에선 아직 닫혀있었다.


디나의 성냥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택시를 기다렸지만 택시는 오지 않았다. 길가에서 히치하이크를 하기로 했다. 계곡에는 차가 뜸하게 다니데 마침 한 대가 섰다. 디나와 아저씨가 얘기를 주고받더니, 카라콜까지 1인당 50솜에 합의를 한 것 같다. 여기는 히치하이킹을 해도 돈을 내는 게 일반적이다. 아니면 영업택시와 일반 차량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올 때 쓴 교통비보다 적게 내고 카라콜로 돌아갈 수 있어서 디나 덕을 좀 봤다고 생각했다. 카라콜 시내에 도착해서는 많이 걸었으니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며, 카라콜에서 샤슬릭을 제일 잘한다는 집에 가서 샤슬릭을 먹었다. 중국에서는 양로우촨, 중앙아시아에선 샤슬릭, 터키에서는 시쉬 케밥으로 이름이 바뀌는 요리. 본질적으로 양꼬치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가미되는 향신료가 점점 바뀐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지볶음을 곁들여 쯔란을 듬뿍 묻혀 먹는 양꼬치가 제일 맛있다. 양꼬치는 가지볶음이랑 먹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여긴 가지볶음을 안 팔아서 재미없는 샐러드랑 같이 먹었다.



늦은 점심밥을 다 먹자 디나 어머니께서 이식쿨 호수로 드라이브를 가자며 연락이 와서 따라갔다. 디나 언니와 조카들까지 다 데리고. 디나 어머니의 차에는 돗자리와 간식, 컵과 접시까지 잔뜩 실려있었다. 카라콜은 호숫가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다. 도로를 따라 호수의 동쪽 끝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동쪽 호숫가는 좁은 만이라 바다같이 넓은 느낌은 안 들었다. 호숫가에 차를 대고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차를 한 잔 마시고 발이라도 담가보려고 바지를 둥둥 걷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호숫물은 차가울 만큼 시원했다.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이곳을 얼마나 오랫동안 꿈꿔 왔는지, 고등학교 때 꼭 가고 싶은 호수로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페루의 티티카카를 꼽아 다이어리에 적어둔 적이 있다. 벌써 두 군데를 지웠다. 생각보다 목표를 빨리 이루고 있다.



"안녕하십니까, 이 말은 우리나라 말입니다!"

소설처럼 한국어를 배우는 고려인 소녀 류다와 하얀 배는 찾을 수 없었지만 디나의 조카들이 옆에서 장난을 쳐댔다. 그렇게 한참을 놀았다. 해가 슬슬 넘어가자 어머니께서 우리를 불렀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저녁은 이곳 음식인 아쉴란푸를 먹자고 하셨다. 다시 차를 타고 아쉴란푸로 유명한 식당이라며 시장 안에 있는 조그만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가셨다. 알고 보니 디나 어머니의 동생의 아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다른 손님들도 서로 다 아는 듯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왠지 가족 모임에 낀 것 같았다.



19세기 말 신장 지역의 무슬림 탄압을 피해 키르기스스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주로 정착한 카라콜. 그들은 이곳에서는 둥간족으로 불린다. 아쉴란푸는 그들이 가져온 음식이다. 청포묵 같은 면에 식초와 고춧가루로 만든 소스를 부어 먹는다. 중국에서 먹었던 량피와 맛이 비슷했다. 오랜만에 중국 맛을 먹으니 반가웠다.


내일은 말 타러 가는 날이다. 카라콜 시내 중심부에 CBT를 비롯한 여행사들이 모여있는데 3군데 정도 다니면서 말을 하루 빌리는데 얼마 달래는지 알아봤다. 여행사에서 말 키우는 아저씨를 소개해주고 도시 외곽의 목장으로 데려다주면 아저씨를 따라 같이 말을 타고 카라콜 계곡을 둘러보는 프로그램. 하루 정도 빌리는데 보통 3000솜 수준이었다. 이곳 물가를 생각하면 비싼 편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의 승마는 여행 중 꼭 해보고 싶은 일이기 때문에 내일 하루 말을 빌리기로 했다. 송쿨에서 한 시간 타보긴 했지만 옆에서 친구가 붙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도와줬기 때문에 자신은 없다. 내가 직접 말을 몬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떨리게 짜릿하면서도 무섭다.


#42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현진 씨, 여행사에서 픽업 차량이 왔어요"

호스텔 주인아주머니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불렀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내 면접시험 차례가 온 것처럼 비장하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차를 타고 도시 외곽의 목장으로 갔다. 오늘 나와 함께 말을 탈 아저씨를 만났다. 이름은 들어도 남아있지가 않다. 아저씨도 자꾸 내 이름을 까먹어서 한 5번은 물어본 것 같다.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러시아어를 못해 서로 인사만 하고 조용히 있었다.


아저씨가 말먹이를 먹이고 안장을 얹었다. 내가 탈 말의 이름은 크즐. 타기 전에 크즐과 인사를 했다. 말 근처로 갈 때는 뒤로 돌아가면 안 된다. 말이 놀랄 수도 있기 때문에. 말한테 나를 보여주고 목을 몇 번 쓰다듬었다. 안녕 크즐! 그리고 천천히 등자를 밟고 말에 올랐다. 등자는 항상 발 끝으로 밟고 있어야 한다.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는 작은 채찍을 들었다. 출발할 때는 채찍으로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츄!’ 하면 앞으로 가고, 멈출 때는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드르르’라고 하면 된다. 속도나 방향 조절도 마찬가지로 고삐를 움직여서 할 수 있다.



아저씨가 이제 출발하자고 해서 채찍으로 크즐의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하지만 크즐은 고개만 움직일 뿐 꼼짝도 안 했다. 너무 살살 때렸나? 혹시 세게 때렸다가 놀라서 펄쩍 뛰면 어쩌나 싶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들도 기수가 초보인지, 능숙한지 다 안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처음부터 크즐에게 정확히 간파당했나 보다. 내가 출발도 못하고 있으니까 아저씨가 오셔서 대신 말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막상 출발을 하고 아저씨를 따라 말을 몰아가니 어려운 점은 별로 없었다. 배운 대로 '츄'하면 앞으로 가고, '드르르'하면 멈추고. 방향 조절도 쉬웠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저씨가 탄 말은 속도를 내서 멀리 앞서가는데, 크즐은 맛있어 보이는 풀이 나오면 뜯어먹는다고 한눈을 팔아서 자꾸 뒤처졌다. 먹는데 방해하면 싫어할 거 같아서 기다려줬다.



두 시간쯤 산길을 타니 다리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말 등 위에서 다리로 균형을 잡아야 해서 허벅지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무겁게 낮게 깔린 하늘은 머잖아 부슬부슬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땅도 질어지고, 말들도 힘들어 보였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좁은 산길에서 나이가 많은 말인 크즐은 자꾸 미끄러졌다. 크즐도 스스로 놀란 듯 펄쩍 뛰어 말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삐만 꼭 쥐고 '드르르! 드르르!'만 필사적으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놀란 말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슬슬 산길에 말을 몰고 온 게 후회됐다.



경치고 뭐고를 다 떠나서 말을 모는데만 집중을 했다. 시야가 말의 갈기와 고삐로 고정됐다. 출발한 지 7시간 뒤, 다시 목장에 도착해 땅을 밟으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승마가 레저라니, 익스트림 스포츠다. 계속 긴장해서 힘을 주고 있었더니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산길이라 그런지 엉덩이랑 허벅지가 많이 들썩거려서 아팠다. 승마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전속력으로 달려서 장애물도 막 뛰어넘고 그러는 걸까.

목장에서 차를 타고 나와 호스텔 근처 식당에서 양고기가 들어간 라그만과 설탕을 두 스푼 넣은 뜨거운 차를 먹었다. 용을 썼더니 단 게 먹고 싶었다. 라그만을 다 먹고 아이스크림도 주문했다. 호스텔로 돌아가 샤워까지 했더니 기진맥진했다. 말을 능숙하게 몰아 초원을 달려보고 싶다는 내 꿈은 여기서 산산조각 났다. 아마도 미래의 과제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43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호수의 동쪽에 자리 잡은 카라콜과 북쪽의 촐폰아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들 했다. 산맥과 깊은 계곡에 둘러싸인 카라콜과 달리 촐폰아타는 이식쿨 호수와 바로 접해있을 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휴양도시다. 호스텔 주인아주머니는 아직은 휴가철이 아니라 조용할 거라며, 영업을 하지 않는 호텔이나 식당도 많을 거라고 조언을 해줬다.


카라콜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팻 캣에 들러서 미디엄 사이즈 피자와 밀크셰이크를 시켰다. 두툼한 도우 위에 아낌없이 올라간 치즈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비록 배는 작은 편이지만, 한 판을 욕심스레 다 먹고 싶어서 푸드 파이팅을 하는 것처럼 빨리 먹었다. 그랬음에도 한 조각을 남겼다.



카라콜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마슈르카를 찾았다. 버스정류장의 오피셜 매표소에는 장거리 구간 표만 팔고, 같은 지방 도시로 가는 마슈르카는 기사님한테 직접 돈을 내는 방식이다. 대충 아저씨들이 모여계시는 곳으로 가서 '촐폰아타'라고 도시 이름을 대면 거기까지 가시는 분이 가격을 말씀해주신다. 짐을 차에 싣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승객이 꽉 찰 때까지 기다린다.

승객이 다 차고 차가 출발한다. 카라콜과 촐폰아타는 꽤 가깝다. 하지만 중간에 마을이 나올 때마다 기사 아저씨가 승객을 태우려고 천천히 달려서 속도가 안 난다. 3시간이나 걸려서 촐폰아타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에 내려 민박집까지 걸었다. 어플로 찾은 곳인데, 호스텔의 침대도 아닌 개인실이 6달러길래 기대를 하고 달려왔는데, 방이 정신병원 독방 같았다. 화장실이랑 샤워장은 공용인데 문도 안 잠긴다.


시간이 잘 가는 게임


그래도 오랜만에 ‘내 방’에 있으니 아늑하고 좋았다. 하얀 시트가 깔린 편안한 호텔방에 묵으면서 하는 여행은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호스텔의 다인실에서 북적이며 얻을 수 있는 것도 많겠지. 창가에 앉아 일기를 쓰고, 노트북으로 영화도 한 편 보고, 받아왔던 게임도 좀 했다. 방에 가만히 앉아 노닥거리면 시간이 참 잘 간다. 이병헌과 김영철이 나오는 달콤한 인생을 봤는데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 대사가 나와서 진지한 장면이지만 웃음이 픽 나왔다. 이게 여기서 나온 거였구나.

#44 비시즌의 휴양지


어제 빨래를 했어야 됐는데, 귀찮아서 다음 날으로 미룬 게 화근이었다. 오늘 일기예보는 강수확률 60%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나머지 40%에 걸었겠지만, 당한 전례가 있다 보니 이제는 좀 조심스럽다. 속옷만 빨아서 방에 널어두고 호숫가를 걸으러 나섰다. 날씨는 꽤 맑았다. 비는 언제 온다는 거지?



휴양지 도시는 비시즌엔 썰렁해진다. 본격적인 시즌은 7월부터라 호숫가의 카페나 식당은 아직 영업을 안 하는 곳이 많았다. 보수 공사 중인 곳도 많고, 분수들은 말라붙은, 전반적으로 황량한 분위기였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재미도 없다. 호숫가를 따라 모래사장을 걸었다. 호수 건너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톈샨 산맥만 아니라면 진짜 바다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처럼 파도가 해변으로 밀려왔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호숫물에는 염분도 좀 있대서 살짝 찍어서 먹어봤는데 짠맛은 거의 안 났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수영도 하고 놀 수 있었을 텐데, 설산을 보며 수영하는 것도 이색적일 것 같다.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점심으로 샐러드와 아이스티를 사 먹었다. 이제 겨우 러시아어를 더듬더듬 읽을 줄 알게 됐는데, 읽어도 뜻을 몰라서 아무 의미가 없다. 여전히 메뉴판에 그림이 없으면 힘들다. 오늘은 계란이 들어간 샐러드를 먹고 싶었는데, 감으로 시킨 샐러드에는 역시 계란은 없고, 토마토와 오이, 양파와 이름 모를 풀만 가득했다.



오후 서너 시부터 분명 비가 온댔는데, 하늘은 오히려 더 맑아졌다. 빨래하고 나올걸, 오늘은 역으로 당했다. 중앙아시아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비도 시원하게 쏴아 내리는 게 아니라 찔끔 내리다 다시 찔끔 뿌리는 식이라 빨래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다.



더 멀리 나가진 않고, 말을 타서 아직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방으로 돌아와 어제 하던 게임을 이어했다. 비록 최신판은 아니지만, 풋볼매니저는 재미를 붙이면 멈추기가 힘들다. 슈퍼에서 팔던 러시아 라면을 면만 삶아 가져 간 진라면 스프를 넣고 끓여먹었다. 내일은 비슈케크로 다시 돌아가고, 곧바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갈 궁리를 해야 한다. 또 귀찮은 국경 넘기 타임이 돌아왔다. 우즈베키스탄은 입국부터 쉽지 않다는데,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만 많아서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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