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아웃을 하며 숙박 등록증을 받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숙박 등록증을 꼭 받아서 챙겨두어야 한다. 이것 또한 카자흐스탄의 외국인 거주 등록처럼 구소련 시기의 산물이지만, 여전히 철저하게 지켜지는 듯하다. 호텔이나 호스텔이라면 숙소에서 알아서 등록을 해주고, 등록증을 발급해준다. 하지만 캠핑이나 현지인 집과 같이, 공인되지 않은 장소에서 숙박을 한다면 이틀 안에 이민국 사무실에 들러 거주 등록을 해야 한다. 만약 거주 등록을 하지 않았다면 경찰이 숙박 등록증 제시를 요구했을 때 벌금 등 귀찮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경찰을 조심하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
우즈베키스탄은 다른 중앙아시아 나라들에 비해 기차 편이 많다. 차편만큼 종류도 많은데, 고속열차인 아프로시압과 우리나라의 새마을호 정도 되는 급인 샤르크 중 고민하다 샤르크 기차를 탔다. 내가 탄 3등 칸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3시간 동안 기차가 달궈져서 찜질방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티셔츠가 땀으로 젖었다.
사마르칸트는 이름부터 매력이 있다. 이국적인 발음 때문인지 신비한 모험의 도시 같은 인상을 풍긴다. 기차역에 내리면서부터 기대를 잔뜩 하고 내렸다. 하지만 곧 현실이 다가왔다. 시내까지 가는 방법은 모르겠고, 외국인인 나를 본 택시기사들은 몰려들고. 또 얼떨결에 택시를 타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배낭을 멘 커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택시기사들에게 손사래를 치고 커플에게로 달려갔다.
"안녕, 너희도 방금 사마르칸트에 도착한 거야? 시내까지 어떻게 가는지 물어도 될까?"
친구들은 타냐와 프랭크, 독일인 커플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은 독일, 프랑스인이 많았다.
"우리는 가이드북을 보고 왔는데 73번 버스를 타면 레기스탄 광장으로 간다 해서 지금 찾는 중이야, 너도 그쪽으로 가면 같이 갈래?"
타냐와 프랭크를 따라 걸었다. 기차역을 나오면 차고지 같이 생긴 버스 종점이 있다. 줄지어 주차된 버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버스를 찾았다. 기차역에서 시내인 레기스탄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지도를 보면서 어디서 내릴지 가늠을 하다 레기스탄 근처에서 내렸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은 레기스탄 광장 바로 옆. 또 보자며 타냐와 프랭크와 헤어졌다.
호스텔은 골목 안에 있지만 찾기 쉬웠다. 점심을 안 먹어서 체크인 후 짐만 대충 던져놓고 밥을 먹으러 나왔다. 가는 길에 갑자기 모래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점점 하늘이 노래지네,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면서 모래가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던 사람들도 어딘가로 다들 몸을 피한 듯 보이지 않았다. 나도 들어갈 곳을 찾다 보이는 삼사 가게로 들어갔다. 고기소가 들어간 빵인 삼사나 하나 먹으면서 바람이 그치길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간 가게는 텅 비어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은 아저씨에게 삼사 하나 달라고 했다. 그 아저씨는 러시아어로 뭐라고 말을 했는데, 당연히 나는 못 알아들었다. 물론 삼사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무슨 상황일까 혼자서 고민하고 있는데 구석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형이 와서 내 앞에 섰다.
"너 한국인?"
"다, 야 까레이...?" (응, 나 한국인인데...?")
“나는 바티, 러시아말 안 써도 된다. 한국에서 일해서 한국말 해. 여기 삼사 없어. 앉아 일단”
갑자기 나타난 한국어에 정신이 없었다. 얼떨결에 자리에 앉아있으니 바티는 곧 콜라 두 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곤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5년 동안 한국에서 일했어, 지금도 내 동생은 대구에서 일해. 나는 고향에 잠깐 돌아와 있는데, 곧 다시 한국으로 일하러 떠날 거야."
그의 5년 간의 한국 생활은 다행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듯했다. 한국 생각을 많이 한다며, 사마르칸트에 한식당이 하나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 한국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하러 모인다며 '크' 소리를 내보였다.
"거기 다 맛있어. 혹시 가고 싶으면 바람이 그치면 데려다줄게."
바티와 얘기를 하며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으로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조금 보고 있으니 바람이 멎었다. 식당까지 그의 차를 얻어 타고 가며 한국에 다시 오면 꼭 연락하라며 번호를 교환했다. 도착한 한식당 이름은 식후경. 좋은 이름이다.
밥을 먹고 설렁설렁 시내를 걷다가 카페에 들러 진토닉을 마시고, 벤치에도 앉아 쉬며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호스텔로 돌아오는 길 레기스탄 광장 바로 왼쪽에서 광장과 같은 이름의 마트를 발견하고 기뻤다. 여긴 거의 작은 구멍가게뿐이라, 한 층짜리 슈퍼마켓을 찾기도 힘들다. 장바구니를 집어 들고 진열대 사이를 몇 번이나 돌며 물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비록 물가가 싼 동네지만 싼 곳에 있을 때 아껴두어야 한다. 고르고 골라 시리얼과 요거트, 옥수수를 샀다. 꽤 가격이 있는 네스퀵 시리얼을 집으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이걸로 몇 끼를 먹으면 더 싸게 먹히겠다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호스텔 안마당에 앉아 옥수수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달팽이처럼 진 여행자가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암란, 인도네시아에서 온 형이었다.
"브로, 너 한국인이야? 월드컵에서 보겠네, 좋겠다! 인도네시아는 월드컵은 못 나갔지만 난 잉글랜드랑 일본을 응원해. 일주일 뒤에 러시아로 넘어가서 일본 팀의 경기를 볼 거야."
이 호스텔의 4인실 도미트리에는 특이하게 구식 브라운관이지만 텔레비전이 있다. 투숙객도 나와 암란 밖에 없어서 새벽 1시까지 그와 축구를 봤다. 일본이 콜롬비아를 이겼다. 암란은 응원하던 일본 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그쪽에 돈이라도 건 듯 기뻐했다.
#50 절름발이 티무르
사마르칸트는 과거, 상인으로 유명했던 소그드인들이 주로 활동하던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였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한 정복자 티무르가 수도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내 곳곳에는 레기스탄 광장을 비롯한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티무르는 30년간 정복 전쟁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대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한쪽 다리를 절어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데, 실제로 20세기 그의 묘를 발굴하고 관 뚜껑을 열었을 때, 한쪽 다리가 온전치 않은 유골이 발견됐다고 한다.
그의 영묘인 구르 아미르로 향했다. 우즈베키스탄에 온 이후로는 계속 덥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시원한 영묘 내부로 들어갔다. 벽이 두꺼워서 그런지 마치 동굴 안에 들어온 것 같다. 입구로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중앙의 넓은 홀에는 관이 자리해있고, 채광창으로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금빛 천장과 타일을 비췄다.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무덤을 파헤쳤던 사실만 뺀다면 꽤 안락한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영묘 근처 로터리의 중심에는 티무르의 좌상이 있다. 이곳도 소비에트 시절의 도시계획 때문인지 포플러 나무가 늘어선 보행자 전용 도로가 많다. 산책로의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나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호스텔에는 암란이 여전히 침대에 누워 축구를 보고 있었다. 저 정도 열정은 있어야 남의 나라 응원하러 러시아까지 가는 거겠지. 배가 고파서 어제 산 네스퀵 시리얼을 타 먹었다. 시리얼을 먹는 내 옆에서 암란은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한 입 먹을래?"
사양 않고 포크를 가져와 암란의 옆에 앉았다. 한 입만 먹을 생각이었는데, 반은 뺐어 먹은 것 같다. 역시 라면은 한 입 아니겠냐며 면발을 가득 집었다.
#51 비비하눔 이야기
알람도 맞추지 않았는데, 보이스톡의 진동 때문에 눈이 떠졌다.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현진아 우리 니가 말한 호스텔에 도착했어! 너 방은 어디냐?"
부하라를 먼저 찍고 야간기차를 타고 사마르칸트로 넘어온 승수 형과 관복 형이 내가 묵는 호스텔에 도착했다며 나를 찾았다. 내 방은 1층이기 때문에 문을 열고 나가 반갑게 포옹을 했다.
"형들 조금만 더 자다가 점심때쯤 같이 나가봐요."
레기스탄 광장을 기준으로 어제 갔던 구르 아미르만 서쪽에 있고, 비비하눔 모스크나 샤흐진다 영묘, 아프라시압 박물관은 모두 동쪽에 있기 때문에 레기스탄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걸어 나가는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인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교의 학교인 마드라사 세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사마르칸트의 대표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하지만 현지인과 외국인의 입장권 가격이 달랐다.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외국인 가격을 물려니 왠지 억울했다. 우리 모두 '굳이 들어가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마드라사 안에는 기념품 가게만 있다고 론리 플래닛에 나와있었기 때문에 굳이 돈까지 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쉬르도르 마드라사
레기스탄은 모래의 땅이란 뜻으로, 사람들은 옛날에 이곳이 모래가 깔린 광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커다란 시장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소그드 상인들은 동양과 서양에서 실려온 물건들을 여기서 거래한 다음, 다시 다른 지역으로 물건을 팔러 갔겠지. 광장 오른쪽의 쉬르도르 마드라사에는 이슬람에서는 금기시되는 동물 그림이 있다. 아치 위로 그려진 호랑이 두 마리가 그것인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지폐에도 그려질 만큼 유명하다.
비비하눔 모스크
티무르와 그의 아내 비비하눔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 가장 유명한 전설이 담긴 곳이 비비하눔 모스크. 당시 건축 기술을 총동원했을 이곳은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아내를 위한 이 모스크의 건설을 지시한 사람은 역시 티무르. 하지만 그가 원정을 나간 사이 공사는 지지부진해지고, 티무르의 개선 전 모스크를 완성해 보이고 싶었던 왕비 비비하눔에게 페르시아인 건축가가 접근한다. 비비하눔에게 반한 그는 한 번의 키스를 허락해준다면 공사를 시일 내에 끝마칠 수 있다고 장담하고, 고민하던 그녀에게서 마침내 키스를 허락받는다. 원정에서 돌아와 이를 알게 된 티무르는 건축가는 목을 베어버리고, 비비하눔은 탑에서 떨어뜨려 죽게 했다.
샤흐진다 영묘
비비하눔 모스크와 왕실의 영묘인 샤흐진다를 거쳐 아프라시압 박물관까지 걸었다. 단체 관광객 같은 강행군에 우리는 지쳐버렸다. 사마르칸트의 옛 이름은 아프라시압. 그 아프라시압 박물관 안뜰에 앉아서 우리는 박물관을 들어갈까, 고민했다.
"형, 굳이 의무감 때문에 박물관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요."
아프라시압 박물관 내부에 있다는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의 벽화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이미 지쳐버렸다. 멋쩍게 서 있는 한국어 비석 앞에서 잠깐 발걸음을 멈춘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사마르칸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레기스탄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오늘은 호스텔에 한국인만 3명이니 한국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자취 8년 차인 승수 형이 소시지볶음과 계란말이로 집밥 같은 저녁을 만들어주겠다고 자신했다.
"야, 보드카도 한 병 할까?"
승수 형은 채소를 썰고, 계란을 부치며 뚝딱 저녁을 만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라면을 끓였다. 관복 형까지 불러 안마당에 상을 차렸다.
"잘 먹겠습니다!"
자작하게 끓인 라면과 적당히 매콤한 소시지, 레모네이드를 탄 보드카. 마치 누군가의 자취방에 놀러 온 듯한 나른하고 행복한 저녁이다.
"안녕, 저녁은 먹었어?"
우리 테이블 옆으로 방금 도착한 듯 커다란 배낭을 들고 지나가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친구 이름은 모니카.
"안녕! 나는 홍콩에서 왔어, 중국 아니고 홍콩."
모니카도 숟가락을 챙겨 와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누가 한 음식이냐며 맛있게 먹었다. 나도 여행 오기 전 요리 몇 가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할 수 있게 연습해 올 걸 그랬다.
저녁을 먹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호스텔 스태프가 레기스탄 광장은 조명을 10시까지 켜주는데, 사실 밤이 훨씬 낫다며 슬쩍 귀띔을 해줬다. 우리도 소화도 시킬 겸 레기스탄 광장으로 다시 걸었다. 낮에 비해 열기가 많이 식었다. 선선한 전형적인 초여름 날씨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 틈에 섞여 그 분위기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갖고 다니는 관복 형은 별 사진을 찍으러 어두운 곳을 찾아 떠나고, 우리는 키오스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암란이 나가고, 오늘은 모니카와 4인실 방을 나눠 쓰게 됐다. 이제 아무도 축구를 안 틀겠구나, 싶었는데 모니카도 심각한 축구팬이었다. 새벽까지 월드컵 중계방송을 귓등으로 들으며 꼼지락댔다.
#52 니콜라스, 소주 한 잔 어때요?
내일이면 부하라로 떠나는 날. 나와 일정이 같은 모니카의 제안에 하루 전 역에 들러 표를 사러 갔다. 올 때의 기억을 되살려 73번 버스를 타고 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이 종점이기 때문에 언제 내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역에 내려 바로 매표소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5분이 지났다며 매표소 창구는 굳게 닫혀있었다.
우리도 밥이나 먹고 시간도 보낼 겸 근처의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와이파이가 호스텔보다 잘 터졌다.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앉아 인터넷을 쓰고 있으니 한 시간이 금방 갔다. 매표소로 돌아 창구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내일 부하라로 가는 오후 기차가 있었다. 고속 열차인 아프라시압은 탈 생각도 없었지만 물론 매진이었고, 일반 열차인 샤르크만 빈 좌석이 있었다. 부하라까지 샤르크로는 3시간 정도 걸린다.
모니카는 비비하눔 모스크 근처 바자르에 살 게 있다며 1호선 트램을 타고 가고, 나는 시내 중심부에서 달러를 뽑으려고 3번 버스를 탔다. 곧 입국할 투르크메니스탄과 이란은 해외 카드 사용이 힘들기 때문에 미리 달러를 조금 더 준비해둬야 했다. 어제 호스텔 스태프가 우즈베크 내셔널 뱅크에 가면 비자 카드로 달러를 뽑을 수 있대서 티무르 동상 근처의 국립 은행을 찾았다.
"쏘리, 노 머니, 노 캐시."
직원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자동인출기에 현금이 없어서 사용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해석했다. 대신 'President Plaza'라는 사마르칸트에서 제일 좋은 호텔의 이름을 대며 약도를 그려줬다. 여기로 가라는 말이겠지, 거리는 가까워서 문제없이 찾을 수 있었다.
티무르 로터리
찾아간 호텔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경비를 서는 고급 호텔이었다. 나는 외국인이라 그다지 출입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은행 직원의 말대로 1층에는 ATM이 설치되어 있었다. 달러도 술술 잘 나온다. 국립 은행에도 없는 돈이 호텔에서는 잘 나오는 게 아이러니지만, 그럴 수도 있지.
호스텔로 돌아왔더니 옆 침대에 새로운 사람이 와 있었다. 니콜라스는 페루에서 왔다며 자기를 소개했다.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그 역시 축구팬이었다.
"우리 집안은 벨기에에서 왔지만 내 고향은 페루야. 하지만 자란 곳은 스페인, 지금 사는 곳은 스위스라 4팀을 모두 응원해, 한 팀은 우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하"
니콜라스와 얘기하다 저녁시간이 돼서 형들과 같이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저께 바티의 소개로 갔었던 한국 식당에 형들을 데려가기로 했는데, 니콜라스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 식당에 한국인들과 함께 가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라며 따라왔다.
식후경에 도착해서 나는 물냉면, 승수 형은 불고기 백반, 관복 형은 비빔냉면, 니콜라스는 비빔밥을 시켰다. 나도 비빔밥이 먹고 싶어서 한 입 뺏어먹을 요량으로 니콜라스에게 추천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만 빼고 모두 성공이었다. 내가 시킨 건 물냉면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무언가였다. 아이스티에 케첩과 우뭇가사리를 넣은 맛? 왜 국물에서 아이스티 맛이 나는지 모르겠다.
니콜라스와 여행 얘기를 하던 중 그의 인스타그램에 함께 팔로우된 아유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나를 앞질러간 그녀는 이미 부하라와 히바를 지나 카스피해를 건넜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히바의 호스텔에서 그녀를 만났다며, 우리 모두 이런 우연에 소름이 돋았다. 유라시아의 동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우리는 서로 길 위에서 아는 친구를 만나면 반갑게 근황을 전해주자며 즐거워했다.
승수 형은 역시 소주를 시켰는데, 니콜라스에게 코리안 주도를 가르쳐준다고 머리를 굴렸다. 그의 나이를 물어보니 형들과 동갑이었다. 니콜라스는 '한국식 나이 문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현진, 형이 주는데 왜 잔을 한 손으로 받지?"
"잔은 깨끗이 비워야 하는 거 아니야?"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나눠 마시고 나왔다. 사실 소주는 여기서는 비싼 술이라 많이 마실 수가 없다.
"부하라에서 만났던 캐나다 친구들이 지금 펍에서 축구 보면서 맥주 한 잔 한다는데, 같이 갈래?"
살짝 아쉬웠던 우리는 니콜라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펍까지 한 곳 들렀다.
한국인 세 명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한국어로 말을 거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한국에서 5년, 7년씩 일을 하셨다며 말씀을 시작했다. 워낙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안 좋은 대우에 관해 들은 게 많아 혹시 한국에서 나쁜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들 좋았다고만 말해주셨다.
"나는 양주의 돼지 농장에서 일을 했어요. 거기서 번 돈으로 집으로 티비도 보내고, 냉장고도 사고, 자동차도 샀어요. 지금 이 가게도 그때 벌어온 돈으로 시작했죠."
물을 사러 들른 구멍가게의 주인아저씨까지도 한국어를 구사하니, 니콜라스는 한국어가 이렇게 널리 쓰이는 언어였냐며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