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_송쿨 호수, 키르기스스탄

나의 비단길 이야기-12

by 현진

#36 니콜라스 아저씨를 찾아서


'현진, 아직 비슈케크에 있어? 우리는 비슈케크에서 지프를 렌트했고 오늘 밤 코치코르에 도착했어. 여기서 송쿨 호수까지는 3시간 거리야. 내일 날씨만 좋다면 송쿨 호수로 들어가서 유목민 캠프를 찾을 거야. 만약 내일 출발 전 코치코르에서 만날 수 있다면 송쿨 호수까지 태워줄게. 메일을 본다면 답장해줘_나탈리'


나탈리의 이메일을 하룻밤 늦게 확인했다. 이미 정오가 가까워졌으니 송쿨 호수로 출발했겠지, 어젯밤이라도 확인을 했다면 아침에 부지런히 움직여 코치코르에서 엠마네 가족을 따라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만나서 차를 얻어 탔다면 경비를 꽤 줄일 수 있었을 테지만 내 계획도 오늘 송쿨 호수로 가는 일정이기 때문에 그 길목의 작은 도시인 코치코르로 우선 움직이기로 했다. 송쿨에서는 만날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코치코르로 가는 길


짐을 챙겨서 나온 비슈케크 버스터미널 역시 합승택시 기사들이 진을 치고 호객을 한다.

"코치코르, 발락치, 카라콜?"

외국인인 나를 보고 본인들의 차를 두드리며 근처 도시들을 읊어주신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지.

"니옛, 야 이슈 압토부스 까사!"(아니요, 매표소를 찾는데요)

친절한 아저씨들은 또 매표소는 저기 있다고 가르쳐준다. 매표소에 가서 코치코르라고 했는데, 막상 표를 받으니 남부의 도시인 나린으로 가는 표를 줬다. 다시 물어봤더니 같은 길이라며, 코치코르에서 중간에 내리면 된다고 했다. 물론 내 짐작으로 '그렇게 들렸다'


마찬가지로 만석이 되면 출발하는 버스. 우려와는 다르게 승객은 금방 찼다. 혹시나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 코치코르 간다'며 밑밥을 깔았다. 도착해서 내가 안 내리면 알려주지 않을까. 코치코르까지는 3시간 걸렸다. 물론 나는 여기가 내가 내릴 곳인지 몰랐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나보고 내리래서 멍하게 있다가 차에서 뛰어내리듯 내렸다. 나름 수도인 비슈케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골 마을 느낌. 역시 나를 보고 택시 아저씨들이 몰려들어 어디 가냐 물어보지만, 송쿨 호수에 간다 하면 다들 거기는 안 간다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불안해진다.



론리플래닛에서 송쿨 호수로 가는 차는 여행사에서 잡아준다는 말을 들어서 제일 유명한 여행사인 CBT로 향했다. 옛날에는 가격도 착하고 네트워크도 넓어서 키르기스스탄에서 신뢰받는 여행사였다는데, 요즘은 가격을 후려친다는 말을 들어서 절대 호갱 당하지 않겠다는 긴장된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코치코르 CBT


나를 맞아준 직원은 송쿨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계산기를 꺼내서 이것저것 찍어보더니 7200이란 숫자를 보여줬다. 왕복 지프, 유르트 1박, 식사 포함. 말도 타면 8000솜. 우리 돈으로 약 15만원으로 거의 내 일주일 생활비다. 너무 비싼데...

"혹시 송쿨 호수까지 가는 지프 대절은 얼마죠?"

"차편만 하시면 왕복으로 4000솜이에요"

운전자가 호수까지 들어갔다가 승객이 없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편도는 없고, 무조건 왕복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아 엠마네 가족을 만나면 니콜라스의 차를 얻어 타고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편도로 해달라고 징징댔다. 긴 협상 끝에 결국 2500솜에 편도 차를 구했다. 그마저도 못 미더워서 잠깐 기다리라 해놓고 버스터미널로 돌아가 택시 아저씨들이랑 또 흥정을 했다. 3500솜 밑으로는 안 떨어지길래 합리적인 가격이구나 깨달았다.


코치코르에서 송쿨 호수까지는 지도상으로는 꽤 가까워 보이는데 3시간이 걸린다길래 의아했는데 출발하고 왜 그런지 알았다. 1시간 포장도로를 달리고 2시간은 비포장 산길을 달린다. 아직 눈이 다 녹지도 않은 산길을 타고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 가드레일도 없어서 지프는 아슬아슬하게 벼랑길을 올라간다. 길 중간에 양 떼가 지나가면 양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양치기 개들이 가끔 차를 향해 짖는다.



깎아지른 산길을 지나자 거짓말처럼 갑자기 탁 트인 초원이 나왔다. 도로는 여기서 끊긴다. 초원 위로 난 바퀴 자국을 따라 호수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저 멀리 호수가 보인다. 물가로 갈수록 유목민들의 캠프들이 하나둘 보였다. 유르트를 하나 지날 때마다 엠마네 가족이 혹시나 있을까,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의 단서를 찾는 탐정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사 아저씨가 이쪽 길로 프랑스인 가족이 지나갔냐고 물어보자고 해서 유르트 캠프에 들렀다. 차에서 막 내렸는데, 니콜라스가 담요 더미를 가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니콜라스는 멀리서 차가 한 대 오길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는데, 내가 내려서 정말 깜짝 놀랐다고. 그러게, 세상 참 좁네요. 나도 만날 줄 몰랐는데 일이 딱 들어맞았다.


유르트 내부


"내일 다시 도시로 나가면 내가 태워줄게, 나린으로 나갈 텐데 괜찮아?"

알마티에서 얘기했던 대로 니콜라스가 차를 태워주기로 했다. 일이 잘 풀린다. 그리고 엠마네 가족의 유르트에 자리가 남아서 거기에 껴서 지내기로 했다. 한쪽 구석 자리를 받고 짐을 올려두었다.


저녁 어스름을 따라 호수를 걸었다. 호수 근처에는 이끼가 가득 자라고 있었다. 이끼 사이의 단단한 땅만을 골라 디디며 호숫가로 가서 손을 담갔다. 만년설을 담은 호숫물은 역시 차가웠다. 해발 3000미터도 넘는 곳에 있는 호숫가의 공기도 서늘했다. 한동안 입지 않았던 후리스와 점퍼를 꺼내 입었다.



저녁은 고깃국과 빵, 버터와 잼을 먹었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고깃국에 든 포슬포슬한 감자가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왔더니 완전히 해는 저물어있었다. 불을 켜지 않으면 사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려면 라이트를 켜고 멀리 나가야 한다. 캠프에서 떨어진 곳에 구덩이가 있는데, 그곳을 화장실로 사용했다. 볼일을 보고, 옆에 있는 삽으로 흙을 떠 덮어두는 식이다.


니나의 재롱잔치


별이 잘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구름이 잔뜩 껴서 별은 볼 수가 없었다. 가끔 내가 살던 세상에서 거리에 상관없이 정말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온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과 인도양의 꼬리뻬, 진주의 군사훈련단이 나에게 그런 장소로 남아있다. 입대 첫날밤, 다른 스무 명의 모르는 사람들과 한 방에 누워 국방색의 까슬한 모포를 처음 받아 들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던 나. 나의 일상은 아득히 멀어진 듯싶었고 그저 눈을 끔뻑이며 벽에 걸린 빨간 엘이디 시계 불빛만을 바라보며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은 무섭도록 캄캄한 호숫물과 저 멀리 있을, 밤의 장막에 싸여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 눈 덮인 산맥을 마주하며 비슷한 단절감을 느낀다. 순수한 어둠 때문인지 세상이 무한히 넓어 보인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_또 다른 고향, 윤동주


싸늘하게 식어버린 공기에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해져 그나마 남아있던 온기마저 모두 날려버렸다. 유르트에 들어가 덧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벽 사이로 스며오는 한기에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담요를 돌돌 말고 잠이 드려고 애를 썼다.


#37 Don't worry, be happy!


날씨는 완전히 개어있었다. 새벽에 이슬비가 내렸는지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먼 산까지 잘 보였다. 이미 말들도 양들도 다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실 들여다보는 엠마


아침을 먹고 말을 한번 타보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이식쿨 호수에 가서 타는 건데, 여기서 연습 삼아서 한번 타봐야지. 엄밀히 말해서 탔다기보다는 1시간 동안 강습을 받은 것 같다. 등자를 밟고 올라서는 법부터 고삐 잡는 법,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말이 착해서 그런지 고분고분 잘 따라와 줬다.


당나귀


말의 높이가 익숙해지자, 먼 산을 보며 달려보고 싶었다. 속도를 올리려면 말의 옆구리를 차면서 엉덩이를 들썩이면 된다고 했는데, 차마 용기가 안 나서 그러지는 못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감당 못할 거 같기도 했고. 10살쯤 돼 보이는 친구 한 명이 붙어서 가르쳐줬는데 말 타는걸 자전거 타듯이 능숙하게 했다. 나도 어려서부터 탔으면 저렇게 잘 탔으려나. 이식쿨 호수에서는 더 잘해봐야지.



호수에서 나올 때는 역시 엠마네 차를 얻어 탔다. 나린으로 가는 길도 들어올 때와 같이 비포장 산길이다. 끝도 안 보이는 길이 산허리를 따라 길게 이어지고 아득히 보이는 발 밑으로는 눈 녹은 물이 세차게 흘러내린다.



골짜기와 초원을 지나 포장도로가 나왔고, 나린에 도착해 버스터미널 앞에서 차를 세웠다.

"니콜라스, 나탈리 정말 고마워요. 세 딸을 데리고 여행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당신들과 얘기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다음 여행지가 한국이길 바래요!"

"잘 가요, 현진! 널 보면 우리가 대학생일 때가 생각나서 좋았어. 혼자 여행하니까 특히 더 안전에 신경 쓰고, 즐거운 여행 되길.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작별의 순간에 니나가 울음을 멈추지 않아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코치코르로 가는 마슈르카를 타고 바로 잠이 들었다. 몇 시간 뒤 부스스 일어나니 코치코르 도착. 기분 좋게 차에서 내렸다. 이제 호스텔을 찾아볼까 하면서 폰을 봤는데 데이터가 딱 끊겼다. 그저께 200솜 주고 충전했는데 벌써 다 쓴 거야? 마슈르카에서 승객이 모이기를 기다리면서 인터넷을 깔짝깔짝 썼더니 필요한 순간에 끊겨버렸다. 그때 호스텔이나 찾아둘걸, 바보 같은데 써버렸다.


구글 지도에 나와있는 아무 호스텔이나 찾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도 GPS도 오락가락해서 당황스러웠다. 너희들 왜 갑자기 쌍으로 말썽이냐... 폰을 껐다 켰다 몇 번 해도 위치가 안 잡혔다. 배터리는 닳아가고, 해는 지고, 비도 오기 시작했다. 동네는 판잣집 밖에 안 보이고, 이런데 호스텔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 막막해져 갔다.



같은 길을 몇 번이나 걸었는지. 폰을 껐다 켰다 반복하던 중 GPS 위치가 제대로 잡혔다. 이상한 방향으로 멀리도 걸었다. 다시 제대로 된 방향을 잡고 걸었다. 비는 좀 맞았지만 휴대폰 배터리가 다 닳아갈 때쯤 호스텔을 찾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호스텔 이름도 해피 호스텔. 객실로 들어가 젖은 발을 말렸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네요.

(Happy Hostel 8인실 1박 350솜)

keyword